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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두 개의 세상, 미래를 건 싸움

등록 2006-09-21 17:39수정 2006-09-22 13:35

한승동의 동서횡단

사람의 인생관과 세계관, 품격은 그가 자신이 속한 세상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느냐에 좌우된다. 한 사회의 집단심리나 성숙도도 그런 개인들의 구성비율에 따라 결정된다.

“만주국 건국 이래 난징공략에 나선 것은 침략이란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 일본기자클럽 주최의 총리후보들 공개토론회에서 아소 다로 외상은 패전까지의 일본 제국주의 행보를 침략전쟁이라고 보느냐는 질문에 그렇게 대답했다. “침략이란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니. 침략이면 침략이고 아니면 아니지. 침략이 아니지만 여러 사정을 감안하건대 침략이라 주장해도 딱히 부인하기도 어렵다는 얘긴가. 고이즈미 외교정책 사령탑으로, “창씨개명은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한 것”이라는 식의 지론 소유자인 그의 세계인식 수준으로는 실상 “침략이라니, 말도 안돼”가 본심에 가까울 게다. 하지만 그의 인식수준을 능가하는 아베 신조 관방장관 대항마로서 차후 정치일정에서 존재감을 살려야 하는 그로서는 일단 아베와는 다른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같은 질문에 대한 아베의 대답은 “역사인식은 역사가에게 맡긴다”였다. 전형적인 본질 회피 수법이다.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등의 우익 역사가들을 다독이고 지원하는데 앞장서온 그였다. 아베는 1972년 다나카 가쿠에이 당시 총리가 중국을 방문해 양국 국교를 텄을 때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가 한 말도 공식 외교문서에 남아 있지 않다는 이유로 부인했다. 저우는 “중국인민은 마오쩌둥 주석의 교시에 따라 극소수의 군국주의분자와 광범한 일본인민을 엄격히 구별해왔다”고 말했다. 일부 전범자들만 확실히 단죄한다면 과거사는 문제삼지 않겠다는 얘기다. 그런데 아베는 “그런 문서는 남아 있지 않다. 나라와 나라 간의 국교 정상화는 교환한 문서 외에 달리 입증할 방법이 없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고이즈미 총리 등 일본 지배그룹이 A급 전범자가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수교 당시 저우언라이 등 중국 지도부와 한 약속을 저버린 행위 아니냐는 지적에 대한 답변이었다.

결국 아베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간단명료하다. 자신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 등이 앞장섰던 군국일본의 아시아태평양 침탈은 결코 침략전쟁이 아니라는 것, ‘아시아민족해방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조선에 대해서는 그나마 언급조차 없다. 아베나 아소만 그런 것이 아니라 토론회를 주최한 일본기자들에게도 아예 조선침략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 일본인들의 전쟁범죄 인식지평에 조선 대만 류큐(오키나와)에 대한 잔혹한 침략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1931년 만주침략 이후 패전까지의 중국 미국과의 전쟁이 전부다. 조선 대만 류큐엔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한다. 일부 쓸개빠진 식민지백성들도 동의하는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의 출발점이다.

지금의 아베와 아소 같은 인간유형을 양산한 것은 기시 노부스케 같은 전범자들을 전후 냉전정책의 아시아 교두보 일본재건의 리더로 재기용한 미국이었다. 미국이 마음대로 갈라놓은 한반도 남쪽에서도 꼭같은 과정이 되풀이됐고 그 리더들중 다수에게 아베와 아소 같은 인간유형이나 그들을 키운 미국은 구세주였다.

한국에는 크게 두 개의 세상이 존재한다. 2차대전 이래 나머지 절반의 동포와 국토야 어찌됐든 분단당한 절반이나마 그런대로 먹고 살 수 있게 된 것은 행운이고 그런 행운을 가져다준 미국과 아베, 아소들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세계관의 소유자들이 사는 세상이 한쪽에 있다. ‘잔인하게 성폭행당한 자의 뒤틀린 짝사랑’이라는 비아냥도 있다. 또 한쪽에는 그렇게 강요당한 세상과 세계관을 거부하는 자들이 사는 세상이 있다. 지금 한국에는 또다시 이 두 세상이 맞부딪쳐 미래를 건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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