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동의 동서횡단
미국 허드슨 연구소의 로버트 두저릭이라는 사람이 로버트 스칼라피노, 빅터 차, 마커스 놀런드 등 미국내 한반도 전문가들 논문을 모아 펴낸 <한국: 동북아의 안보축(Korea: Security Pivot in Northeast Asia)>에 이런 구절이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한국전의 결과로 생긴 현재의 상태가 이 지역의 평화를 유지시키는 ‘전략적 구조’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한국은 동북아 안보의 관건”이고 “이런 환경의 중요 요인은 주한미군에 의해 보장되고, 주일미군에 의해 강화되는 ‘팍스 아메리카나’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앞으로 10년 안에 남북통일 또는 그에 버금가는 극적인 변화가 있을 텐데 그렇더라도 미군은 계속 한반도에 주둔해야 하며 미국과 한국, 일본과의 군사관계는 강화해야 한다 운운.
먼저 분명히 해둬야 할 일은, 흔히 미국인 전문가들이 사태의 본질을 흐리거나 뒤집어 놓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미국이든 어디든 피할 수 없는 집단의 맹목적 이기주의에 의심의 눈길을 던져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겐 이런 얘기마저도 또 하나의 음모론이나 의도적 왜곡으로 들리겠지만, ‘현재의 상태’가 결코 ‘한국전의 결과’로 생긴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책이 지적한 ‘현재의 상태’를 특징짓는 최대요인은 아마 한반도 분단과 남북한 대립, 그리고 그 대립축을 중심으로 한 북의 중국-러시아-북한과 남의 미국-일본-남한의 대결적 세력배치일 것이다. 그러면 이런 세력배치 구도가 과연 한국전쟁에 의해 촉발되고 결정된 것인가? 결코 아니다.
알다시피 남북한의 북위 38도선 분단은 미국이 우리의 의사와는 아무 상관없이 2차대전 종전과 함께 소련과의 세력분할선으로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이다. 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 것이 1947년 3월이었고 건준과 여운형 등의 활동은 억압당했으며, 48년에는 기시 노부스케 등 A급전범을 비롯한 일본전쟁범죄자들이 냉전에 대처하기 위한 미국의 일본 교두보 강화정책에 따라 석방돼 전후 일본의 친미반공 보수합동체제 만들기에 들어갔다. 49년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됨으로써 ‘현재의 상태’와 같은 동북아 기본 세력구도는 이미 완성됐다. 50년 6월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그 전에 한반도를 일방적으로 분단한 미-소의 세계분할지배정책에 따라 정립된 그런 동북아 세력구도 때문에,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전개된 것이며, 수백만명이 희생당한 열전 끝에 원래 대치선을 따라 정전이 이뤄짐으로써 결과적으로 기본 세력구도를 좀더 고착화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과 같은 대결적인 동북아 세력구도는 한국전쟁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며, 한국전쟁이야말로 미국이 갈라놓은 그런 대결적 세력구도 때문에 발발했고 결과적으로 그 세력구도를 더 심화시킨 것이다.
미국인들이 한국전쟁을 현재와 같은 동북아 대결구도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지 또는 의도적일 수 있다. 만일 의도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계산된 책임회피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한국전쟁을 부른 기본 판을 누가 만들었나? 지금도 1천만 이산가족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통일신라시대 이래 1천년간 하나였던 한반도의 정상적인 발전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뒤틀리게 만들어 영원한 동북아의 약자로 몰아가는 분단을 누가 강요했던가? 전승국이라 해서 패전국 식민지를 자기들 마음대로 처분해도 된다는 권리를 누가 주었나?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이 보장하고 강화한다는 팍스 아메리카나는 바로 한반도의 희생을 토대로 존립하고 번성하는 주변 강자들의 부도덕한 세계경영의 도구가 아닌가? 이것을 묻지 않는 미군 계속주둔론은 강자의 후안무치거나 주눅든 약자의 현실도피, 자기부정이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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