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동의 동서횡단
‘일본의 대추리’라 불리는 일본 헤노코 지역은 오키나와현 나고시에 속해 있다. 미국과 일본 정부는 근처 후텐마 미 공군기지를 이곳 앞바다로 옮기려다 주민들의 줄기찬 반대운동에 부닥치자 다시 연안기지 건설 안을 들고나왔으나 이것 역시 강력한 반대로 고전중이다.
오키나와와 한국의 인연은 깊다. 오키나와는 원래 류큐왕국이었는데, 1372년에 명나라에 복속된 뒤 500여년간 중국 조공국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1592~1598년)을 준비하면서 사쓰마번에도 조선침략 지원을 요청하자 사쓰마 무사 시마즈 요시히로가 1591년 류큐왕국에 군사 7500명의 10개월분 식량을 조달하든지 5개 섬을 내놓으라고 했다가 거절당했다. 노량해전에서 패퇴한 시마즈는 그때 80여명의 조선도공들을 끌고가 일본 도자기 역사를 만들었다. 그 시마즈가 1609년 끝내 류큐왕국을 침략해 정복했다. 하지만 일본이 류큐왕국을 자국 영토로 정식 편입한 것은 메이지유신 뒤인 1879년이었다. 그러니 일본령 오키나와 역사는 100여년밖에 안된다. 홍길동이 세웠다는 율도국이 류큐에 있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얘기도 있다.
오키나와는 일본 영토의 0.6%밖에 안되지만 주일 미군기지의 75%가 몰려 있다. 미-일동맹의 중추는 미군기지이며 그 핵심은 오키나와 기지들이다. 일본에서 소득수준 가장 낮은 옛 류큐왕국이 미-일동맹 일본쪽 짐의 대부분을 지고 있는 셈이고 그만큼 현지주민들의 기지반대운동은 뿌리깊다.
기노완 시의 ‘가슴에 울려퍼져라 여성들의 소리 네트워크’라는 단체는 매주 금요일 그곳 미국 총영사관 앞에서 집회를 열었는데, 이 금요집회는 서울의 용산 미군기지 앞에서 열린 한국쪽 금요집회에서 배운 것이다. 반대로 한국 용산기지의 평택 이전 예정지 토지공유화운동은 ‘한국의 한평지주운동’이라 불렸는데, 이는 가데나 미 공군기지내 반전지주들의 저항운동에서 배웠다. 가데나기지 인근 주민들은 반전지주회를 결성하고 1982년 6월부터 한 사람당 1만엔씩을 걷어 수용될 땅떼기들을 사서 등기한 뒤 맞섰는데 이를 ‘한평반전지주운동’이라 불렀다.(<오키나와현대사> 아라사키 모리테루 지음. 2005)
2000년 7월 미·일 정부는 주요7개국(G7) 정상회담을 오키나와에서 열기로 하고 그것을 미군기지 재배치의 호기로 활용하기 위해 많은 돈을 쏟아붓고 선전공세를 강화했다. 그 때문에 한때 기지수용 여론이 높아지기도 했으나 그해 4월에 나온 ‘오키나와민중 평화선언’의 반기지운동 대의는 선명하다. “(기지를 수용함으로써 얻게 될) ‘경제적 번영’이란 일부 대국이나 그들 특권계급의 이익 추구이고, (그들이 말하는) ‘평화’란 그 이익을 보증하는 경제체제와 국제질서 유지일 뿐이다.” “우리가 바라는 ‘평화’는 지구상 모든 사람들이 자연환경을 귀하게 여기고 한정된 자원과 부를 될수록 평등하게 나눠가지며, 켤코 폭력(군사력)을 쓰지 않고 다른 문화·가치관·제도를 서로 존중하며 공생하는 것이다.”
2005년 6월 류큐신보사와 마이니치신문사가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오키나와 주민들중 오키나와 주둔 미군기지가 ‘필요하다’(6.2%)거나 ‘대체로 그렇게 생각한다’(23.8%)는 쪽보다 ‘대체로 그렇지 않다’(30.2%)거나 ‘필요없다’(39.8%)는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대다수가 미군기지 철수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기지 철수운동을 ‘반미’로 낙인찍는 청맹과니들이 이땅에는 많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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