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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축구공처럼 백인에 내둘린 아프리카

등록 2006-06-22 19:52수정 2006-06-23 16:21

한승동의 동서횡단

졸지에 사냥당한 흑인들은 목에 쇠고랑이 채워진 채 총칼의 감시 아래 채찍을 맞아가며 해안지대로 끌려갔다. 때론 1천㎞가 넘는 먼 길이었다. 다섯명 중에 두명이 이동과정에서 죽었다. 해안지대에 도착한 그들은 우리속에 갇혔다. 노예상인들이 그들을 하나하나 발가벗겨 놓고 검사해 ‘품질’등급을 정한 뒤 가슴에 달군 쇠로 낙인을 찍고 다시 10~15일간 우리속에 가뒀다. 노예무역선이 당도하면 ‘상품’급 흑인들은 소금에 절인 생선처럼 어둡고 습기찬 배 밑창에 차곡차곡 채워졌다. 층 사이가 50여㎝에 불과한 밑창의 돌아눕기도 어려운 관같은 좁은 공간에 채워진 흑인들 목과 발은 다시 사슬로 묶였다. 질식상태의 밑창 바닥은 피와 체액으로 번질거렸다. 기회를 틈타 아비규환의 도살장을 자살로 거부한 흑인들도 적지 않았다. 지옥의 노예무역선에 실린 ‘상품’의 3분의 1이 바다를 건너는 도중에 죽었다.

유럽과 신대륙을 점령한 백인 노예상인들과 입식자들에게 흑인노예는 엄청난 부가가치를 안겨준 살아있는 보물이었다. 17세기 초 흑인노예무역이 본격화한 이래 1800년 무렵까지 아메리카 대륙에 끌려간 아프리카 흑인은 1천만~1천5백만명에 달했으며, 이는 아프리카에서 실제 포획된 흑인의 3분의 1 정도로 추산됐다.

따라서 인류역사상 가장 선진적이라던 근대 유럽문명 여명기에 서유럽과 미국의 노예상인과 플랜테이션(대농장) 소유주들에 의해, 유럽 못지않은 독자적 문명을 구축했던 1억명의 아프리카 대륙 흑인주민들 중 연 5천만명이 죽음에 내몰리거나 노예로 붙잡혀 갔다. 교회는 이를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낄 필요가 없는 정당한 일이라고 옹호했다.(하워드 진 <미국 민중사, 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아프리카는 원래 저주받은 미개의 땅이었기 때문에 유럽 백인들에게 당한 것이 아니라 백인들한테 그토록 철저하게 당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굶주리고 동족상잔의 분쟁이 끊이지 않는 저주의 땅이 됐다. 흑인문명은 화약무기를 앞세운 백인들에 의해 파괴당하고 사회재생산의 근간인 노동력을 철저히 수탈당했다. 백인들은 노예무역에 이어 아프리카 대륙 자체를 자기들 입맛대로 갈라 식민화하고 망가뜨렸다. 백인들이 자랑하는 근대 유럽 자본주의문명은 이런 가혹한 유색인 수탈을 통한 무자비한 원시적 축적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가능했다.

유럽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월드컵 축구대회. 토고 등 아프리카 대표선수들은 유럽에 고용된 덕에 가난을 면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조국은 여전히 1인당 연간 평균소득이 불과 수백달러에 지나지 않는 가난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기묘하게도 축구 강세지역은 옛 흑인노예무역의 발상지, 본고장과 거의 일치한다.

얼마전 한·중·일 기자들이 토론자로 참석한 서울의 한 회의석상에서 일본기자는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일제 식민지배가 한국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의견도 한국쪽이 존중할 수 있겠느냐며 힐난하듯 말했다. 원시적 축적을 위한 침략과 식민지배와 착취는 백인과 유색인종 사이에서만 벌어진 건 아니다. 세상에, 남을 돕기 위해 침략하고 식민지배했다니! 사회를 지배하고 부를 독점한 일본인 입식자들과 그들에 협력한 식민지 부역자들에겐 그랬을 테지. 명성황후 시해나 동학혁명 파괴, 수백만명의 디아스포라와 강제연행자를 낳고 역사와 민족을 불구로 만든 식민지배도 그들에겐 모두 한국근대화를 위한 진통으로 보였을 테지. 일본의 숱한 보수우익 식자들이 ‘유럽 제국주의에 대항한 아시아민족해방의 대동아공영권’ 따위 유치한 허위의식과 자기기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한 일본의 근대 극복과 동아시아 공동체건설은 불가능하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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