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무는 ‘유행의 고향’ 창신동 리포트] ① 세계화·개발 기로에 서다
“취재하고 기사쓰고 싶었는데…땡볕에서…”
김규남 인턴기자(성균관대 경제학과 졸업)의 ‘창신동 취재기’
김규남 인턴기자(성균관대 경제학과 졸업)의 ‘창신동 취재기’
무더위와 장맛비가 엇갈렸던 7월초, 우리(김규남·송경화·김진화·장유영 인턴기자)들의 일터는 창신동이었다. 예전에, 기자는 취재원 만나서 취재하고 기사 쓰는 일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우리는 창신동 사람들 140명에게 설문조사를 벌였고, 봉제공장이 얼마나 몰려있는지 직접 발로 뛰며 일일이 확인해 지도도 그렸다. 설문지를 나눠주면서 인터뷰도 했다.
처음엔 지도 그리기나 설문조사가 취재가 아닌 것 같았다. 7월의 햇볕이 거리를 뜨겁게 달구는 거리를, 또는 장대비가 퍼붓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설문조사를 나흘쯤 반복하니 약간은 지겨워졌다. 이런 일 그만하고 기사도 써보고 싶었다.
그러나 지겨움의 대가는 달았다. 처음에는 설문조사도, 지도 그리기도, 인터뷰도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었다. 나흘쯤 되니 지도를 보완하고 설문조사도 하고, 인터뷰도 하는 등 동시다발적인 컨트롤이 가능해졌다. 좀 오버해서 비유하자면 미니맵의 세밀한 움직임까지 주시하면서, 전투 중인 머린을 컨트롤 하면서 멀티에 센터를 짓고 있는 프로게이머 임요환의 손놀림이 연상됐다.
“평생 설문응답만 해왔는데…” 투명인간 대접 받다 설문조사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태어나서 설문 응답만 하며 살아왔던 나였다. 숫기가 적은데다 낯가림까지 있는 성향 때문에 애당초 설문조사는 내 적성이 아니었다.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쭈뼛쭈뼛) 안녕하세요, 한겨레신문에서 나왔는데요...”, “다른 신문 보고 있어요.” 이런 반응이 8할 이상이었다. “저... 신문 보시라는 게 아니고요, 이러쿵저러쿵해서 창신동 봉제공장에 대한 설문조사 중입니다. 간단히 5분만 시간 좀 내주실 수...” “바빠요.” “그래도 잠시만 시간 내주시면 되는데요...” “......” 더 이상 대꾸하기 귀찮았는지 이제 아예 나를 투명인간으로 대접한다. 이렇게 몇 번 ‘당하고’나면 끊었던 담배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러다 “설문조사요? 어디 봐요”하며 관심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만나면 눈물날 정도로 고마웠다. 열혈 기독교인 아주머니를 만난 한 동기는 아주머니가 “먼저 내 얘기(복음!)를 듣고 나면 설문조사를 해주겠다”고 했으나 우리끼리 정한 시간과 분량이 있어서 “죄송하다”고 일어선 적도 있다고 했다. 나의 경우엔 봉제공장 주인 부부와 ‘시사 이슈’를 논하느라 한 시간 넘게 잡혀 있기도 했다. <한겨레>에서 나왔다고 하니, 한미FTA, 양극화 같은 현안에서 박정희에 대한 평가, 노무현에 대한 평가 등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부부의 ‘근성에 말려들어’ 말을 도중에 끊지도 못하고 한 시간 동안 고담준론을 나눴다. “한겨레에서 나왔는데요”하면 “우린 딴 신문 봅니다” “박정희에 대해 어캐 생각하나” 5일 동안 창신2동 봉제공장을 거의 다 누비고 다녔다. 마지막 날이었다. 설문을 더 받을 만한 곳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아 보였다. 나에게는 우리가 각자 정한 할당량에서 마지막 한 장이 남았다. 그 한 장의 여백을 채우기 위해 나는 꼬박 1시간을 돌아다녔다. 판판이 거절당하며 무거운 발걸음 옮기기를 30여분. ‘내가 슬쩍 해버릴까?’ ‘조작’하고 싶은 유혹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왔다. ‘한 장인데 뭐 어때?’ 매우 강렬한 유혹. 하지만 기사의 진실성을 이 한 장이 담보한다는 거창한 생각보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으로 후에 정말 후회하게 될 것 같았다. 이내 어렵게 유혹을 떨쳐내고 마지막 설문조사를 해냈다. 창신동 기획기사의 가장 중요한 밑바탕이 됐던 설문지 한장 한장은 이렇듯 초보 기자들의 좌충우돌 시행착오 속에서 태어났다. 무더운 날씨 속에서 조사를 벌이며 우리는 잠시 쉴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창신2동 주민자치센터를 ‘본부’로 삼았다. 그곳엔 동네지도, 소파, 커피자판기, 정수기, 에어컨, 화장실 등이 구비돼 있었다. 설문조사와 지도 작성 등의 임무수행을 위한 우리의 본부로 삼기에는 딱이었다. 우리가 ‘작전회의’를 하며 좀 떠들어도, 돌아다니다 지쳐 들어와 앉아 꾸벅꾸벅 졸아도 터치하는 사람이 없었다. ‘공공시설이란 게 참 중요하구나’ 난생 처음 동사무소가 고마워졌다.
취재하고 기사쓰려던 내가 고산자 되어 ‘발품 팔아 지도 그리다니’ 우리는 지도를 그리기 위해 창신2동 주민자치센터 축으로 창신동을 4등분했다. 각자 한 구역씩 맡아 지도그리기에 나섰다. 봉제공장(5인 이상), 봉제공장(5인 이하), 시아게(끝손질집), 부자재, 자수, 오토바이 가게 등으로 구분해 각자 가진 지도에 표시하는 일이었다. 도서관 서가에 빼곡히 들어찬 책처럼 창신동의 각 건물마다 봉제공장들이 가득가득 자리하고 있었다. 문이 닫혀 있는 곳들도 공장인지 여부, 규모 등을 파악하기 위해 닫힌 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창신동 곳곳을 다니며 우리는 낯선 말에 어리둥절해지곤 했다. 패턴, 나나인치, 큐큐, 시아게…. 어렸을 때 어디선가 들었던 용어들이다. 하지만 그 뜻은 잘 모르고 있었다. 패턴은 옷의 모양을 종이에 그리는 작업이다. 패턴은 옷 만드는 과정에서 고급 기술에 해당한다. 패턴을 전문적으로 하려면 어떤 디자인이든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옷 만드는 과정(디자인-> 패턴-> 재단-> 봉제->시아게) 전반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패턴일을 하는 분들의 연령은 최소 40대 중반 이상이다. 나나인치와 큐큐는 시아게(단추달기, 다림질)에 해당하는 작업이다. 나나인치는 남방 등 얇은 옷에 단추구멍을 뚫는 일이다. 큐큐는 바지나 큰 잠바 등에 단추구멍을 뚫는 일이다. 우리 중 가장 나이가 어렸던 한 인턴기자는 오토바이로 배달하는 사람들을 취재했는데, 오토바이 아저씨들이 얼마나 바쁘던가. 시간이 곧 돈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 씩씩한 인턴기자는 달리고 있는 아저씨들을 붙잡아 인터뷰를 하며 듣고 싶은 대답을 듣고야 마는 근성을 보여줬다. “패턴, 나나인치, 큐큐, 시아게…” 어디선가 듣던 말인 것 같은데 한편 나는 취재과정에서 만난 공장 주인 때문에 고민도 생겨났다. 너무도 친절하게 성의껏 답해주었던 사장님은 자기 하는 일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꺼렸다. 환경오염 때문에 서울에선 불법으로 정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사회공익을 해치는 부분이 있는데, ‘사회적 약자’이기도 한 그 아저씨의 불법적 행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도 혼란스럽다. 창신동은 지금 잿빛이다. 이 동네는 봉제업을 축으로 오토바이, 식당, 시장 등이 한데 물려 돌아가는데, 봉제업이 한달에 보름이상 일을 하지 못할 정도로 어렵다. 설문조사와 인터뷰에서도 나타났듯이 봉제업 종사하는 분들은 희망의 언어를 잃고 있다. 세계화와 산업구조 변화 등 도도한 거시적 흐름 속에서 이를 거스르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엎친 데 덮친 듯 최근에는 성인오락실이 파고들어와 개인을 나락으로, 가족을 파멸로 빠뜨리기도 한다. 하지만 ‘수다공방’을 취재하면서 마음이 한결 밝아졌다. 이곳은 전순옥(<전태일 평전>에 등장하는 전태일 열사의 동생, 바로 그 분이다) 참여성노동복지터 대표가 연 교육센터다. 활동의 주요 목표는 노동부의 지원을 받아 20년 이상 봉제경력의 동대문지역 여성 노동자와 영세 자영업자를 대상으로 옷 제작 과정의 이론과 실무를 체계적으로 교육하여 이 지역의 패션을 주도할 고급 기술자 양성,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옷 제작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경의 구절처럼 희망의 싹이 희망의 아름드리나무로 무럭무럭 자라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함께 취재하며 고생한 결과…조직이 만들어지다 언제나 그렇듯 사람들과 고생을 나누면 정이 두터워진다. 이렇게 창신동 길바닥에서 꼬박 일주일을 함께한 우리 인턴기자 4명은 끈끈한 사이가 되어 모임을 결성했다. ‘창파’. 창신동파의 준말이다. 창신동 취재를 끝으로 각기 다른 부서로 배치된 우리는 흩어졌지만 자주 연락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부를 확인한다. 취재를 하고 나서 애면글면 기사 나오길 기다렸다. 이제 기다림에 지쳐갈 무렵 드디어(!) 기사가 나왔다. 우리가 발먼지 풀풀 날려가며 그렸던 지도도 깜찍하게 나왔고, 인터뷰했던 멘트들도 기사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기사를 본 <한겨레21>의 한 선배는 지난 몇 년 동안 <한겨레>에서 본 기사 중에 가장 훌륭하다고 한 말씀 걸쳐주셨다. 기뻤고, 보람이 느껴졌다. 신문 독자였을 때는 하나의 기사가 이렇게 많은 품을 들여 생산되는 것인지 몰랐다. 우리를 지도해주셨던 선배는 “여러분들이 하지 않았으면 그건 다 우리가 했어야 했을텐데, 아마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거나 거의 불가능했을 것”라고 말했다. 기자는 ‘세상 모든 문제 개입자’이다. 하지만 변신에만 능하고, 적응만 잘한다고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마음의 바탕에 사람과 세상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취재 지역과 취재원들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후좌우 360도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인 것 같다. 그게 진짜 취재고 진짜 기사인 것 같다. 이번 창신동 취재는 그래서 소중했다. 정말, 기사 하나하나가 쉽게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한겨레> 김규남 인턴기자
창신동 봉제 마을 지도. 인턴기자들이 한달간 창신동 골목골목을 발로 누빈 끝에 만들어낸, 창신동의 지도이다.
“평생 설문응답만 해왔는데…” 투명인간 대접 받다 설문조사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태어나서 설문 응답만 하며 살아왔던 나였다. 숫기가 적은데다 낯가림까지 있는 성향 때문에 애당초 설문조사는 내 적성이 아니었다.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쭈뼛쭈뼛) 안녕하세요, 한겨레신문에서 나왔는데요...”, “다른 신문 보고 있어요.” 이런 반응이 8할 이상이었다. “저... 신문 보시라는 게 아니고요, 이러쿵저러쿵해서 창신동 봉제공장에 대한 설문조사 중입니다. 간단히 5분만 시간 좀 내주실 수...” “바빠요.” “그래도 잠시만 시간 내주시면 되는데요...” “......” 더 이상 대꾸하기 귀찮았는지 이제 아예 나를 투명인간으로 대접한다. 이렇게 몇 번 ‘당하고’나면 끊었던 담배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러다 “설문조사요? 어디 봐요”하며 관심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만나면 눈물날 정도로 고마웠다. 열혈 기독교인 아주머니를 만난 한 동기는 아주머니가 “먼저 내 얘기(복음!)를 듣고 나면 설문조사를 해주겠다”고 했으나 우리끼리 정한 시간과 분량이 있어서 “죄송하다”고 일어선 적도 있다고 했다. 나의 경우엔 봉제공장 주인 부부와 ‘시사 이슈’를 논하느라 한 시간 넘게 잡혀 있기도 했다. <한겨레>에서 나왔다고 하니, 한미FTA, 양극화 같은 현안에서 박정희에 대한 평가, 노무현에 대한 평가 등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부부의 ‘근성에 말려들어’ 말을 도중에 끊지도 못하고 한 시간 동안 고담준론을 나눴다. “한겨레에서 나왔는데요”하면 “우린 딴 신문 봅니다” “박정희에 대해 어캐 생각하나” 5일 동안 창신2동 봉제공장을 거의 다 누비고 다녔다. 마지막 날이었다. 설문을 더 받을 만한 곳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아 보였다. 나에게는 우리가 각자 정한 할당량에서 마지막 한 장이 남았다. 그 한 장의 여백을 채우기 위해 나는 꼬박 1시간을 돌아다녔다. 판판이 거절당하며 무거운 발걸음 옮기기를 30여분. ‘내가 슬쩍 해버릴까?’ ‘조작’하고 싶은 유혹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왔다. ‘한 장인데 뭐 어때?’ 매우 강렬한 유혹. 하지만 기사의 진실성을 이 한 장이 담보한다는 거창한 생각보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으로 후에 정말 후회하게 될 것 같았다. 이내 어렵게 유혹을 떨쳐내고 마지막 설문조사를 해냈다. 창신동 기획기사의 가장 중요한 밑바탕이 됐던 설문지 한장 한장은 이렇듯 초보 기자들의 좌충우돌 시행착오 속에서 태어났다. 무더운 날씨 속에서 조사를 벌이며 우리는 잠시 쉴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창신2동 주민자치센터를 ‘본부’로 삼았다. 그곳엔 동네지도, 소파, 커피자판기, 정수기, 에어컨, 화장실 등이 구비돼 있었다. 설문조사와 지도 작성 등의 임무수행을 위한 우리의 본부로 삼기에는 딱이었다. 우리가 ‘작전회의’를 하며 좀 떠들어도, 돌아다니다 지쳐 들어와 앉아 꾸벅꾸벅 졸아도 터치하는 사람이 없었다. ‘공공시설이란 게 참 중요하구나’ 난생 처음 동사무소가 고마워졌다.
일감이 몰릴 때는 식당에 갈 시간이 없다. 창신동 사람들은 작업을 하다 공장에 신문지를 펼쳐놓고 밥을 시켜 먹는 일이 잦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취재하고 기사쓰려던 내가 고산자 되어 ‘발품 팔아 지도 그리다니’ 우리는 지도를 그리기 위해 창신2동 주민자치센터 축으로 창신동을 4등분했다. 각자 한 구역씩 맡아 지도그리기에 나섰다. 봉제공장(5인 이상), 봉제공장(5인 이하), 시아게(끝손질집), 부자재, 자수, 오토바이 가게 등으로 구분해 각자 가진 지도에 표시하는 일이었다. 도서관 서가에 빼곡히 들어찬 책처럼 창신동의 각 건물마다 봉제공장들이 가득가득 자리하고 있었다. 문이 닫혀 있는 곳들도 공장인지 여부, 규모 등을 파악하기 위해 닫힌 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창신동 곳곳을 다니며 우리는 낯선 말에 어리둥절해지곤 했다. 패턴, 나나인치, 큐큐, 시아게…. 어렸을 때 어디선가 들었던 용어들이다. 하지만 그 뜻은 잘 모르고 있었다. 패턴은 옷의 모양을 종이에 그리는 작업이다. 패턴은 옷 만드는 과정에서 고급 기술에 해당한다. 패턴을 전문적으로 하려면 어떤 디자인이든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옷 만드는 과정(디자인-> 패턴-> 재단-> 봉제->시아게) 전반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패턴일을 하는 분들의 연령은 최소 40대 중반 이상이다. 나나인치와 큐큐는 시아게(단추달기, 다림질)에 해당하는 작업이다. 나나인치는 남방 등 얇은 옷에 단추구멍을 뚫는 일이다. 큐큐는 바지나 큰 잠바 등에 단추구멍을 뚫는 일이다. 우리 중 가장 나이가 어렸던 한 인턴기자는 오토바이로 배달하는 사람들을 취재했는데, 오토바이 아저씨들이 얼마나 바쁘던가. 시간이 곧 돈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 씩씩한 인턴기자는 달리고 있는 아저씨들을 붙잡아 인터뷰를 하며 듣고 싶은 대답을 듣고야 마는 근성을 보여줬다. “패턴, 나나인치, 큐큐, 시아게…” 어디선가 듣던 말인 것 같은데 한편 나는 취재과정에서 만난 공장 주인 때문에 고민도 생겨났다. 너무도 친절하게 성의껏 답해주었던 사장님은 자기 하는 일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꺼렸다. 환경오염 때문에 서울에선 불법으로 정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사회공익을 해치는 부분이 있는데, ‘사회적 약자’이기도 한 그 아저씨의 불법적 행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도 혼란스럽다. 창신동은 지금 잿빛이다. 이 동네는 봉제업을 축으로 오토바이, 식당, 시장 등이 한데 물려 돌아가는데, 봉제업이 한달에 보름이상 일을 하지 못할 정도로 어렵다. 설문조사와 인터뷰에서도 나타났듯이 봉제업 종사하는 분들은 희망의 언어를 잃고 있다. 세계화와 산업구조 변화 등 도도한 거시적 흐름 속에서 이를 거스르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엎친 데 덮친 듯 최근에는 성인오락실이 파고들어와 개인을 나락으로, 가족을 파멸로 빠뜨리기도 한다. 하지만 ‘수다공방’을 취재하면서 마음이 한결 밝아졌다. 이곳은 전순옥(<전태일 평전>에 등장하는 전태일 열사의 동생, 바로 그 분이다) 참여성노동복지터 대표가 연 교육센터다. 활동의 주요 목표는 노동부의 지원을 받아 20년 이상 봉제경력의 동대문지역 여성 노동자와 영세 자영업자를 대상으로 옷 제작 과정의 이론과 실무를 체계적으로 교육하여 이 지역의 패션을 주도할 고급 기술자 양성,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옷 제작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경의 구절처럼 희망의 싹이 희망의 아름드리나무로 무럭무럭 자라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함께 취재하며 고생한 결과…조직이 만들어지다 언제나 그렇듯 사람들과 고생을 나누면 정이 두터워진다. 이렇게 창신동 길바닥에서 꼬박 일주일을 함께한 우리 인턴기자 4명은 끈끈한 사이가 되어 모임을 결성했다. ‘창파’. 창신동파의 준말이다. 창신동 취재를 끝으로 각기 다른 부서로 배치된 우리는 흩어졌지만 자주 연락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부를 확인한다. 취재를 하고 나서 애면글면 기사 나오길 기다렸다. 이제 기다림에 지쳐갈 무렵 드디어(!) 기사가 나왔다. 우리가 발먼지 풀풀 날려가며 그렸던 지도도 깜찍하게 나왔고, 인터뷰했던 멘트들도 기사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기사를 본 <한겨레21>의 한 선배는 지난 몇 년 동안 <한겨레>에서 본 기사 중에 가장 훌륭하다고 한 말씀 걸쳐주셨다. 기뻤고, 보람이 느껴졌다. 신문 독자였을 때는 하나의 기사가 이렇게 많은 품을 들여 생산되는 것인지 몰랐다. 우리를 지도해주셨던 선배는 “여러분들이 하지 않았으면 그건 다 우리가 했어야 했을텐데, 아마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거나 거의 불가능했을 것”라고 말했다. 기자는 ‘세상 모든 문제 개입자’이다. 하지만 변신에만 능하고, 적응만 잘한다고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마음의 바탕에 사람과 세상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취재 지역과 취재원들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후좌우 360도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인 것 같다. 그게 진짜 취재고 진짜 기사인 것 같다. 이번 창신동 취재는 그래서 소중했다. 정말, 기사 하나하나가 쉽게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한겨레> 김규남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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