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신동 봉제산업의 주역인 여성들이 지난달 4일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인 전순옥 박사가 운영하는 서울 종로구 창신2동 ‘참여성노동복지터’에서 윗옷의 패션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허겁지겁 찍어내기 식으론 더는 미래 없어
고급기술 등 익힐 수 있는 ‘수다공방’ 등장
“전엔 더 배우고 싶어도 방법을 몰랐는데…”
고급기술 등 익힐 수 있는 ‘수다공방’ 등장
“전엔 더 배우고 싶어도 방법을 몰랐는데…”
저무는 ‘유행의 고향’ 창신동 리포트
③ 희망을 재단한다 “예전엔 이 일이 부끄러워 숨겼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부심이 생겨 더이상 감추지 않습니다.” 30여년 미싱일을 해온 우귀자(54) 씨는 또박또박 말했다. 서너 평 작업장 구석에서 온종일 미싱만 돌렸다는 그는 요즘 ‘살맛’이 난다고 한다. 우씨가 찾는 곳은 ‘수다공방.’ 전순옥 참여성노동복지터 대표가 올해 ‘핵심 과제’로 내세운 사업이다. 우씨를 비롯해 창신동 사람들의 현실은 ‘살맛’과는 거리가 있다. 중국·베트남 등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값싼 옷들이 창신동 봉제노동자들의 삶을 옥죄고 있다. 여기에 ‘소비의 전초기지’인 동대문시장의 품질과 신뢰가 떨어지는 상황이다. 젊은이들은 더이상 창신동의 재봉틀 앞에 앉으려 하지 않는다. 이때문에 평균 15년 넘게 일해온 이들의 기술력이 젊은이들에게 전해지지 않아 생산 기반까지 무너질 위기로 몰리고 있는 형편이다. 이들의 ‘밑빠진 삶’을 되살리기 위해 전순옥 대표가 안간힘으로 마련한 것이 바로 수다공방이다. 수다공방은 지난 6월9일 서울지방노동청의 예산 2억5천만원을 지원받아 문을 열었다. ‘종잣돈’을 마련하자 전 대표는 과감하게 ‘공격적 전술’을 폈다. 한벌이라도 더 만들어야 먹고 산다는 타성을 버려야만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창신동의 미래’가 있다고 주민들을 설득한 것이다. 전 대표는 오랜 노동에 짓눌린 몸과 마음을 열고 서로 ‘통’하도록 부담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다방’부터 만들었다. 또 허겁지겁 빨리 만드는 데 익숙해진 기술을 업그레이드해 옷을 잘 ‘빚어내는’ 고급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작업장도 마련했다. 패션 경향과 의류 시장의 생산·유통 과정에 대한 교육과 토론을 벌이며 스스로의 미래를 설계하는 ‘참 리더십’도 틈날 때마다 강조한다. 필요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도록 인터넷 교육도 펼치고 있다. 화·금요일 저녁 3시간씩 진행되는 강의를 위해 전문 강사를 일일이 ‘모셔오고’ 있다. 1기 과정이 이달 끝나게 되면 차례로 △2기 8~9월 △3기 10~11월로 나눠 두달씩 모두 40명을 대상으로 교육이 이루어질 예정이다. 아직, 시작은 미약하다. 1기 교육생은 모두 13명으로 창신동에 빼곡히 있는 1만3천여 봉제업 노동자의 0.1% 안팎이다. 활기가 떨어진 창신동 공장들을 움직이기는 역부족이다. 하지만 곳곳에서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경력 27년의 미싱사 곽미순(47) 씨는 “가까이 있어도 서로 몰랐던 사람들과 어울리니 일종의 공동체가 만들어져 좋다”며 “전에는 ‘옷 만드는 공부’를 더 하고 싶어도 방법을 몰랐는데 이제 힘을 모을 구심점이 생긴 셈”이라고 말했다. 정구선(52) 씨는 “전자우편 보내는 방법을 배워 딸한테 보여줬더니 크게 놀라더라”며 “나이가 들어 빨리빨리 배우기는 힘들지만 따라가지 못한 것은 집에서 숙제로 꼭 하게 된다”고 말했다. 교육생 모두가 강의에 흠뻑 빠져 있는 모습을 보니, 배움을 즐기는 사람들 특유의 진지하면서도 명랑한 기운이 느껴졌다. 물론 한계도 있다. 우귀자씨는 “기본적인 생계를 어떻게 꾸려갈 것인지 해결해내지 못한다면 수다공방의 성장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미싱만 쉼없이 돌아가던 이곳에서 ‘교육 공동체’의 첫발을 내디딘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이원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봉제기술은 중국처럼 비용을 적게 들이는 경쟁자가 나타나면 밀려나기 쉽다는 점에서 기술 재교육을 내세운 수다공방의 방향은 바람직하다”며 “앞으로 자체 생산하게 될 제품을 시장과 원활히 연결하기 위해서는 전문경영자를 영입하고 기업단체와 제휴하는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순옥 대표의 꿈은 창신동이 세계화의 경쟁 속에서 당당한 생존을 이루는 것이다. 그는 “시민들이 냉철한 경제논리에 따르더라도 우리 옷을 사도록 만드는 게 목표”라며 “정신과 기술을 새롭게 다져 고급옷을 만들게 되면 창신동이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수다공방의 배움터가 쑥쑥 뻗어나갈 때, 그때쯤이면 아마도 창신동을 드리운 어두운 구름이 걷히지 않을까.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창신동 토박이 염선애씨
먼지·눈물속 30년 “그래도 여기가 편해”
37년을 창신동 토박이로 살아온 염선애(51)씨. 드르륵 득득, 미싱 돌아가는 소리가 몸에 밴 염씨는 몇년 전만 해도 하루가 노루꼬리처럼 짧기만 했다. 한 벌이라도 더 만들어야 돈벌이가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한달째 일거리가 없어 남편보다 가까웠던 미싱을 잡지 못하고 있다. 2006년 7월은 그에게 ‘잔인한 계절’인 셈이다. “이렇게 ‘올 스톱’된 건 처음이에요. 아이엠에프 때도 이렇지는 않았어요, 굉장히 심각하죠.” 근심이 한움큼 묻어났다.
쌩쌩 달렸던 어린 시절=염씨는 1955년 전북 고창에서 4남매의 둘째로 태어났다. 65년 초등학교 3학년을 다니다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가족의 생계는 늘 어머니 유북순(73)씨의 몫. 노점상으로 밥벌이에 나선 어머니 곁에서 아버지는 ‘한량’으로 떠돌기만 했다. 1년이 안 돼 그의 가족은 창신동 판자촌으로 떠밀려왔고 염씨는 68년께 평화시장의 작은 공장에 시다(어린 심부름꾼)로 취직하게 된다.
14살 소녀는 아침 8시에 일어나 눈곱과 밥을 섞어먹고 청계천을 건너 10분만에 공장으로 달음질쳤다. 도너츠 3개에 100원 받던 그 시절, 한달 내내 먼지 뒤집어쓰고 팔이 떨어질 만큼 무거운 원단과 옷뭉치를 나르는 일로 2200원을 받았다. 돈은 몰랐으나 일을 빨리 배우고 싶어 같이 일하던 언니들을 들들 볶았다고 한다. 덕분에 3년만에 미싱사로 ‘고속 승진’해 월급이 3만원까지 올랐다. 고추장·간장에 꽁보리밥 담은 도시락이 전부였지만 세상을 몰라 오히려 견딜 만했던 시절이었다고 염씨는 회상한다.
염씨에게도 전태일은 특별한 이름이었다. 70년 11월 몸을 불사르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던 전태일의 모습을 염씨는 공장 3층 창문으로 목격했다고 한다. “지게꾼들 사이로 비틀거리며 걷다가 쓰러지자 사람들이 택시에 태워 어디론가 가더라구요.” 이후 노동조합 일을 하는 사람들이 밤마다 경찰에 쫓겨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을 그는 숱하게 보았다. 5층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염씨는 노동운동의 의미를 당시에는 전혀 몰랐다고 한다. 그때 나이 16살이었다.
슬픔과 좌절을 건너=염씨는 23살 때 ‘착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가수 윤수일을 닮았던 남편은 선반공작 일을 하다 중동에 두 차례 다녀오기도 했다. 귀국 뒤엔 택시 운전을 했는데 84년 장마철에 원효대교에서 교통사고로 그만 숨지고 말았다. “예전엔 몰랐는데 남편을 잃고 나서 비로소 철이 든 것 같아요.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으니 봉제일을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지요.” 외아들을 남기고 떠난 남편을 땅에 묻고 손에 쥔 건 산재보상금 800만원이 전부였다.
악착같이 돈을 벌어 94년 단국대 근처에 1억5천만원을 들여 생맥주집을 열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가게를 키워보려 했으나 결국 3년만에 빈손 털며 창신동으로 되돌아왔다. 그때 목돈을 날리고는 아직도 형편이 일어서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오직 희망은 하나, 외아들 형건(26)씨다. 전문대학을 나와 친구와 컴퓨터수리업체를 꾸리고 있는 아들을 보면서 염씨는 남편과 가게를 앗아간,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고 싶어 한다.
다시 군불을 지필 때=온종일 라디오와 미싱 소리가 뒤섞이는 2~3평 작업장에서 16시간 넘게 일해온 창신동. 이젠 진저리가 날 법한데 염씨는 창신동이 익숙하고 편해 좋다고 한다. 그는 최근에 ‘희망 그리기’에 나섰다. 이곳에 뿌리내린 참여성노동복지터 전순옥 대표가 문을 연 ‘수다공방’에 다니면서부터다. “10여명으로 시작한 수다공방은 아직 초창기이지만 전순옥씨를 믿기 때문에 열심히 참여해 배우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아무래도 날쎄게 몸을 움직여야 할 것 같아 다이어트도 시작했다고 염씨는 말했다. 이제 차가운 희망에 다시 군불을 지필 때. 먼지와 눈물, 소음과 땀내로 가득한 30여년을 뒤로 하고 오늘 염씨는 새 출발을 다짐한다. 수다로 열어가는 우리들의 미래를 위해.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③ 희망을 재단한다 “예전엔 이 일이 부끄러워 숨겼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부심이 생겨 더이상 감추지 않습니다.” 30여년 미싱일을 해온 우귀자(54) 씨는 또박또박 말했다. 서너 평 작업장 구석에서 온종일 미싱만 돌렸다는 그는 요즘 ‘살맛’이 난다고 한다. 우씨가 찾는 곳은 ‘수다공방.’ 전순옥 참여성노동복지터 대표가 올해 ‘핵심 과제’로 내세운 사업이다. 우씨를 비롯해 창신동 사람들의 현실은 ‘살맛’과는 거리가 있다. 중국·베트남 등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값싼 옷들이 창신동 봉제노동자들의 삶을 옥죄고 있다. 여기에 ‘소비의 전초기지’인 동대문시장의 품질과 신뢰가 떨어지는 상황이다. 젊은이들은 더이상 창신동의 재봉틀 앞에 앉으려 하지 않는다. 이때문에 평균 15년 넘게 일해온 이들의 기술력이 젊은이들에게 전해지지 않아 생산 기반까지 무너질 위기로 몰리고 있는 형편이다. 이들의 ‘밑빠진 삶’을 되살리기 위해 전순옥 대표가 안간힘으로 마련한 것이 바로 수다공방이다. 수다공방은 지난 6월9일 서울지방노동청의 예산 2억5천만원을 지원받아 문을 열었다. ‘종잣돈’을 마련하자 전 대표는 과감하게 ‘공격적 전술’을 폈다. 한벌이라도 더 만들어야 먹고 산다는 타성을 버려야만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창신동의 미래’가 있다고 주민들을 설득한 것이다. 전 대표는 오랜 노동에 짓눌린 몸과 마음을 열고 서로 ‘통’하도록 부담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다방’부터 만들었다. 또 허겁지겁 빨리 만드는 데 익숙해진 기술을 업그레이드해 옷을 잘 ‘빚어내는’ 고급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작업장도 마련했다. 패션 경향과 의류 시장의 생산·유통 과정에 대한 교육과 토론을 벌이며 스스로의 미래를 설계하는 ‘참 리더십’도 틈날 때마다 강조한다. 필요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도록 인터넷 교육도 펼치고 있다. 화·금요일 저녁 3시간씩 진행되는 강의를 위해 전문 강사를 일일이 ‘모셔오고’ 있다. 1기 과정이 이달 끝나게 되면 차례로 △2기 8~9월 △3기 10~11월로 나눠 두달씩 모두 40명을 대상으로 교육이 이루어질 예정이다. 아직, 시작은 미약하다. 1기 교육생은 모두 13명으로 창신동에 빼곡히 있는 1만3천여 봉제업 노동자의 0.1% 안팎이다. 활기가 떨어진 창신동 공장들을 움직이기는 역부족이다. 하지만 곳곳에서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경력 27년의 미싱사 곽미순(47) 씨는 “가까이 있어도 서로 몰랐던 사람들과 어울리니 일종의 공동체가 만들어져 좋다”며 “전에는 ‘옷 만드는 공부’를 더 하고 싶어도 방법을 몰랐는데 이제 힘을 모을 구심점이 생긴 셈”이라고 말했다. 정구선(52) 씨는 “전자우편 보내는 방법을 배워 딸한테 보여줬더니 크게 놀라더라”며 “나이가 들어 빨리빨리 배우기는 힘들지만 따라가지 못한 것은 집에서 숙제로 꼭 하게 된다”고 말했다. 교육생 모두가 강의에 흠뻑 빠져 있는 모습을 보니, 배움을 즐기는 사람들 특유의 진지하면서도 명랑한 기운이 느껴졌다. 물론 한계도 있다. 우귀자씨는 “기본적인 생계를 어떻게 꾸려갈 것인지 해결해내지 못한다면 수다공방의 성장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미싱만 쉼없이 돌아가던 이곳에서 ‘교육 공동체’의 첫발을 내디딘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이원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봉제기술은 중국처럼 비용을 적게 들이는 경쟁자가 나타나면 밀려나기 쉽다는 점에서 기술 재교육을 내세운 수다공방의 방향은 바람직하다”며 “앞으로 자체 생산하게 될 제품을 시장과 원활히 연결하기 위해서는 전문경영자를 영입하고 기업단체와 제휴하는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순옥 대표의 꿈은 창신동이 세계화의 경쟁 속에서 당당한 생존을 이루는 것이다. 그는 “시민들이 냉철한 경제논리에 따르더라도 우리 옷을 사도록 만드는 게 목표”라며 “정신과 기술을 새롭게 다져 고급옷을 만들게 되면 창신동이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수다공방의 배움터가 쑥쑥 뻗어나갈 때, 그때쯤이면 아마도 창신동을 드리운 어두운 구름이 걷히지 않을까.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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