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울산시 북구 양정동 현대자동차 문화회관내 체육관에서 열린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시무식장이 연말 성과급 삭감 지급에 항의하는 노조원들이 뿌린 소화기 분말로 뿌옇게 뒤덮였다. 울산/연합뉴스
노사 갈등의 진실, 그리고 ‘갈등’을 부추긴 세력들
성과급 삭감을 두고 노사가 파업과 고소고발 등으로 맞섰던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은 25일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듯 컨베이어가 돌아가는 소리가 힘찼습니다. 그렇지만 해마다 파업을 벌이는 노조의 못된 버릇을 고쳐 달라며 회사를 응원했던 많은 누리꾼들은 ‘현대차를 사지 말자’며 인터넷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런 반응은 회사가 노조를 이번에는 꺾어주기를 바랐던 기대가 여지없이 허물어진데 대한 상실감에서 비롯됐을 것입니다.
과연 회사가 노조의 힘에 눌려 원칙을 어기고 굴욕적 타결을 했을까요? 아니면 회사가 노조를 굴복시킨 것일까요? 파국으로 치닫던 노사가 왜 갑자기 타결을 했을까요?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1987년 설립된 이 회사 노조의 20년 역사와 그 과정에서 형성된 독특한 노사관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번 사태의 시작과 끝을 찬찬히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복잡하고 숨가빴던 이번 사태의 원인과 진행과정, 의미를 하나씩 풀어봅니다.
◇부풀려진 시무식 폭력
이번 사태는 이달 3일 오전 9시 현대자동차 시무식이 열릴 예정이던 울산공장 옆 문화회관 체육관이 소화기 분말로 뿌옇게 흐려진 장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전국적 사안으로 떠올랐습니다. 노사가 어떤 사안을 두고 부닥쳤을 때 가만있다가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면 특종 경쟁이나 하듯이 앞다퉈 보도했다가, 해결이 되고 나면 언제 그랬냐듯이 동시에 조용해지는 언론의 냄비 근성은 어김없이 발동됐습니다. 사진과 화면을 통해 드러난 시무식 폭력장면은 국민적 분노를 샀고 언론들은 저마다 노조를 비난하는 후속 기사나 특집기사를 사자후처럼 쏟아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시무식 사태의 원인이 됐던 성과급 문제는 실종됐습니다.
성과급 문제를 소홀히 다룬 것은 <한겨레>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사실 <한겨레>는 다른 언론보다 회사 쪽이 사상 처음으로 성과급 50%를 삭감한다는 것을 먼저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기자는 시무식이 열리기 일주일 전인 지난해 12월 28일 오후 3시께 회사 관계자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윤여철 사장이 오후 4시께 박유기 노조위원장을 찾아가 성과급 50% 삭감을 통보했으니 1시간이나 먼저 알았던 것이지요. 지난해 11월 노조창립기념품 비리 의혹 사건(▶▶▶▶관련기사 현대차노조 ‘기념품 사기’ 비호 의혹 https://www.hani.co.kr/arti/society/labor/173558.html)을 중앙일간지 가운데 처음으로 보도해 현 집행부가 중도 사퇴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공로(?)로 회사 관계자가 먼저 정보를 알려준 것입니다.
현대자동차에서 성과급 삭감은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회사가 1992년 이후 해마다 200~300%의 성과급을 고정적으로 지급해 왔기 때문입니다. 2002~2005년의 경우 생산목표대수를 달성하지 못했지만 회사는 4년 연속 성과급 300%를 지급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회사가 처음으로 노조에 성과급 50% 삭감을 통보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며 대등한 노사관계를 정립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됐습니다.
성과급 50% 삭감은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회사가 처음으로 적용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동안 회사는 해마다 임금협상 또는 2년마다 단체협상을 하면서 노조가 파업을 하면 타결과 함께 격려금 등의 각종 수당을 만들어 파업으로 생긴 임금손실분을 보전해 줬습니다. 그래서 노조 집행부가 파업 찬반투표를 벌이면 한 차례도 부결된 적이 없었습니다. 막강한 노조의 힘에 눌려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파업이 연례행사처럼 된 빌미를 회사가 제공한 셈이지요. 성과급을 사실상 고정급으로 챙겨오던 노조의 입장에선 성과급 50% 삭감은 일종의 도발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한겨레는 노사 갈등의 신호탄이 됐던 성과급 50% 삭감 문제를 동아일보와 함께 앞서 보도는 했지만 이 문제가 앞으로 가져올 파장과 의미 등을 비중있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발단은 노조창립기념품 비리?
왜 회사는 노조의 강력한 반발을 예상하면서 노조에 성과급 삭감을 통보했을까요? 회사는 “특별한 이유는 없다.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고 원칙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라고 밝혔지만 노조는 노조창립기념품 사건으로 집행부가 중도 사퇴를 표명해 진공상태에 놓인 것에서 그 원인을 찾았습니다.
3주에 걸친 <한겨레>의 밀착취재로 밝혀진 노조창립기념품 사건은 노조 집행부가 지난해 5월 무자격업체가 대기업 대표이사의 인감도장과 명함을 도용해 납품업체로 선정된 것을 적발하고선 이 무자격업체와 다시 정식 계약을 체결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의혹이 커집니다. 검·경의 조사 결과 브로커 우아무개(45)씨가 무자격업체 사장 박아무개(40)씨에게서 1억원을 받는 조건으로 이 업체의 입찰을 도왔습니다. 또 우씨는 울산공장 의장2부 개선반의 같은 조에서 17개월 동안 근무한 적이 있던 노조 간부 이아무개(44)씨로부터 각종 편의를 제공받았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씨가 박씨에게서 500만원을 받은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우씨와 이씨가 함께 구속되고 노조의 조직적인 비리가 아니라 개인 비리로 일단락되긴 했지만 노조 집행부는 지난달 13일 중도 사퇴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애초 임기가 올 12월말까지였으나 1월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꾸린 뒤 2월에 새 노조위원장(금속노조 현대자동차노조 초대지부장)을 뽑기로 한 것입니다.
사상 처음으로 현 집행부 간부가 비리에 연루된 사실을 접한 노조원들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10여개 현장조직들은 사실상 선거준비에 들어가며 성과급 삭감 문제를 강건너 불보듯했습니다. 한마디로 노조 집행부의 힘이 진공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 노조의 무리수와 회사의 강공
도덕성 시비로 불명예 퇴진을 앞둔 노조 집행부는 성과급마저 삭감당하면 설 자리가 더욱 좁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노조는 성과급 삭감이 통보된 지난달 28일부터 주야간 2시간 잔업거부와 함께 3일 오전 9시 예정된 시무식을 저지하기로 합니다. 노조가 2일 회사 쪽에 ‘충돌이 우려되니 시무식을 연기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회사로선 새해 시무식을 연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전례도 없거니와 ‘이빨빠진 호랑이’로 전락한 노조 집행부를 무서워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회사는 3일 오전 9시 시무식을 강행합니다. 마침 노조사무실에서 회의를 하고 있던 노조 집행부 간부 40여명은 김동진 부회장과 윤 사장이 시무식장인 울산공장 옆 문화회관으로 이동한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갑니다. 경비원 100명 이상이 막았습니다. 수적으로 밀린 노조 간부들은 무리수를 둡니다. 일부 노조 간부들이 김 부회장과 윤 사장이 탑승한 차량에 올라가 마구 굴렀고 한 노조 간부는 시무식장으로 들어가려는 윤 사장을 화단에서 덮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윤 사장은 얼굴에 가벼운 찰과상을 입습니다. 화가난 노조 간부들은 이성을 잃어갔습니다. 의자로 시무식장 유리를 깨고 식장에 분말소화기를 마구 쏘았습니다. 순식간에 시무식장은 난장판이 됐고 결국 시무식은 10분 만에 중단됐습니다. 노조가 왜 무리수를 뒀을까요? 사건이 터진 직후 대다수 언론에선 ‘비리에 연루된 집행부가 위기 국면을 벗어나기 위해 계획적으로 폭력을 행사했다’고 보도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좀 무리가 있습니다. 시무식 폭력사태의 발단이 됐던 성과급 삭감 문제는 회사가 노조에 통보하면서 시작됐습니다. 노조 간부들이 시무식장 저지를 위해 사용했던 시위용품도 시무식장 근처 화단에 있던 나무 지지대와 시무식장 안에 있던 의자, 분말소화기 등이었습니다. 노조가 처음부터 시무식장을 폭력으로 막으려 했다면 쇠파이프나 각목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폭력행위가 사전에 치밀히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이날 노조 간부들의 물리력 동원은 국민들의 지탄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평화적 집회가 보장되지 않았던 군사정권 시대가 아닌 상황에서 무력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행위를 정당화하기엔 국민들의 의식이 너무 성숙해 있었습니다.
노조의 결정적 실책은 <한겨레>를 포함한 모든 언론의 뭇매를 자초했습니다. 20년 동안 노조가 파업을 벌여 입은 매출손실액과 노조의 과거 비리 등 시무식 폭력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기획기사가 연일 신문 지면을 장식합니다.
언론의 일방적 지원에 자신감을 가진 회사는 ‘이번에는 원칙을 바로 잡겠다’며 초강경 대응의지를 거듭 밝히며 노조의 대화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과거 회사가 대화로 해결하자고 노조에 읍소하던 것과 사뭇 다른 풍경이었습니다.
회사는 시무식 폭력 다음날인 4일 노조 간부 22명을 폭력 및 업무방해 혐의로 형사고발합니다. 8일엔 노조 간부 26명을 상대로 사상 최대 금액인 10억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울산지법에 냈습니다. 이전엔 3억원이 최고였습니다. 회사 관계자들이 시무식 사태가 벌어진 직후 기자에게 “100년에 한 번 올까말까한 기회”라고 건넨 농담은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 1보 놓친 <한겨레> ‘대화로 풀어라’ 기사로 제안
시무식 폭력사태가 터지자 기자는 고민에 빠집니다. 시무식 폭력은 현상에 불과할 뿐 본질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언론들의 냄비 근성을 경계했던 것입니다. 또 이 회사에선 크고 작은 충돌이 늘 있어 왔던 까닭에 사건을 일부러 키울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특히 이날 울산지검에선 현대자동차 100여개(7000여명) 사내 하청업체들이 불법 파견인지를 결정하는 기자회견이 열렸습니다. 노동부가 일부 하청업체가 불법 파견이라는 판정을 내려 경찰에 고발한 이후 2년 만에 검찰이 현대자동차의 기소여부를 공식 밝히는 자리였기에 시무식 폭력은 관심에서 멀어졌습니다. 데스크(부장)가 시무식 폭력에 대한 의견을 물었지만 기자는 “좀 더 지켜보자”는 의견을 냈습니다. 결국 잘못된 판단으로 <한겨레>는 1보를 놓치는 실수를 합니다.
시무식 폭력에서 1보를 놓친 <한겨레>는 이 문제를 어떻게든 정리해야 했습니다. 이에 기자는 방향성을 놓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이 사태의 결론은? 누가 승리할 것인가? 경제적 파장은?
10년 이상 현대자동차 노사문제를 곁에서 지켜본 기자는 장고 끝에 이 싸움의 승자는 없다고 결론내렸습니다. 20년 동안 계속돼 온 ‘파업-고소고발-타결’이란 방정식이 그대로 재현될 게 뻔했던 것입니다. 언론이 처음에 대립·갈등구조로 몰아간 뒤 파업이 장기화하면 노사대화를 촉구하는 논조로 나갈 것이란 예상도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누리꾼 다수는 시무식 폭력사태가 일어나자 “회사가 노조의 파업 버릇을 고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며 “회사는 끝까지 밀고 나가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현대자동차 노조의 생성과 성장과정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온 생각입니다. 전국 최강성으로 알려진 현대자동차 노조는 그 명성답게 다른 회사 노조와 분명히 다릅니다. 전임인 66명의 노조 집행부 간부 외에 직선으로 뽑힌 450여명의 대의원과 1500여명의 소의원이 뒤를 받치고 있습니다. 이들 배후에는 학습과 훈련으로 잘 무장된 50~300여명씩의 활동가들이 몸담고 있는 10여개의 현장조직이 버티고 있습니다. 만약 공권력이 투입되고 파업지도부가 무너지면 이들이 제 2, 3의 파업지도부를 구성합니다. 최소 100명에서 최대 1000명의 핵심 활동가를 구속시켜야 노조가 무력화된다는 얘기가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 2004년 민주노총에서 탈퇴하고 올해 13년 연속 무쟁의 임단협 타결이 예상되는 현대중공업 노조는 회사가 한 달 정도만 휴업하면 두 손을 들겠지만 현대자동차 노조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또 현대자동차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컨베이어가 쉼없이 돌아가는 자동차 생산공정이 그것입니다. 회사가 노조의 파업에 맞서 대체인력을 투입하려 해도 노조 간부가 스위치만 꺼면 공장은 멈출 수 밖에 없습니다. 또 배는 1~2달 공정이 느려도 야간작업을 통해 공기 안에 선주한테 건네면 되지만 소비재와 같은 자동차는 1달 이상 공장 가동을 중단하면 고객들의 항의는 물론 외국 수출길이 막힙니다. 파업이 장기화되면 회사는 회생이 불가능한 상태로 몰리게 되고 이는 우리나라 국가경제에 엄청난 부담을 주게 됩니다. 세계 6위 현대자동차를 뒤쫓고 있는 후발 경쟁국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습니다. 노조의 파업에 맞서 직장폐쇄를 하려해도 엄두를 낼 수 없는 구조입니다.
이에 기자는 ‘엄청난 갈등과 파업손실을 한 뒤 대타협을 할 바에야 파업 전 해결이 옳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팩트(사실)에 충실하되 양 쪽의 갈등을 키우는 방향보다는 균형감각을 중심축에 두고 양 쪽의 간극을 좁혀 나가는 방향으로 보도하는게 옳다고 판단했습니다.
시무식 폭력사태가 일어난 사흘 뒤인 1월6일 <한겨레>는 1면에 ‘뉴스분석’이란 문패를 달고 머리기사를 내보냈습니다. 다른 매체들과 달리 시무식 폭력사태의 선정성을 부각하기보다는 시무식 폭력사태가 왜 일어났는지를 차분히 분석했습니다. 일방적으로 노조를 비난하던 언론들과 논조가 달라서 그런지 <인터넷한겨레>엔 누리꾼들이 ‘역시 한겨레는 할 수 없다’는 비난섞인 댓글을 많이 올렸습니다.
9일엔 다시 1면 머리로 ‘시무식 폭력 노조 사과하라’는 제목의 후속 기사가 나갔습니다. 하지만 이날도 제목은 그렇게 나갔지만 본문에선 민주노총 울산본부가 이례적으로 노사가 한 발짝씩 양보하는 4가지 중재안을 냈다는 점을 비중있게 다뤘습니다. 갈등보다는 대화 기조를 유지하자는 애초 접근법을 지켰습니다.
모든 언론이 갈등 구조로 보도할 때 기자는 각계의 중재 노력이 없는지를 살폈습니다. 울산시와 부산노동청 울산지청 등에 확인을 합니다. 의외의 팩트가 잡혔습니다. 첫째는 부산노동청 울산지청장이 9일 박유기 노조위원장을 찾아가 ‘대화형식을 따지지 말고 대화하라’고 설득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울산시와 울산상공회의소가 이례적으로 대화분위기 조성을 위해 시민공청회를 연다는 것이었습니다. 노동부나 자치단체가 중재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울산에선 현대자동차 파업이 너무 잦다보니 행정기관이 파업 전 중재를 사실상 포기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또 일부 언론에서 노사 자율해결을 요구하며 노동부 등의 중재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다루다보니 행정기관은 중재에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부산노동청 울산지청과 울산시, 울산상공회의소가 현대차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중재 움직임은 11일 ‘지역사회 중재나선다’라는 제목으로 1면 머리로 나갔습니다.
◇ 기로에 선 회사
노조의 대화 요구를 거부하며 요지부동이던 회사가 입장 변화 조짐을 보인 것은 12일입니다. 이날 노조는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차기 노조위원장 선거를 연기하고 파업지도부를 결성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했습니다. 사실 회사는 이날 노조 대의원들이 노조창립기념품 비리 사건으로 현장조직과 조합원들로부터 불신을 받아 식물상태가 된 집행부에 힘을 실어주리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류는 10일 노조가 서울 양재동 본사에 항의시위를 마치면서 감지됐습니다. 이날 노조는 애초 3000명 이상이 상경한다고 목표를 잡았으나 당일 1000명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역설적으로 집행부에겐 이게 오히려 약이 됐습니다. 시위대보다 더 많은 경찰 앞에 노조 간부들은 울분을 삼켰고 이는 투쟁의지로 발현됩니다. 10여개 현장조직 대표들은 상경시위가 있던 그날 저녁 서울에서 긴급회의를 합니다. 그 자리에서 차기 선거에 연연하지 않고 집행부를 중심으로 민주노조를 사수하자고 결의했습니다. 물론 이런 결정의 배경에는 성과급 문제를 풀지 않으면 다음 선거에서 어떤 현장조직이 집권을 하더라도 그 부담을 안을 수 밖에 없다는 현실이 있습니다.
노조의 파업 결의에 당황한 회사는 고민에 빠집니다. 기존대로 강공으로 나갈 것이냐? 아니면 대화를 할 것이냐? 현장조직이 똘똘 뭉치면 힘으로 밀어부쳐서 승산이 없는 것을 잘 아는 회사 경영진은 주말인 13~14일 밤잠을 자지 못합니다. 월요일인 15일 오후 1시부터 노조가 4시간 부분파업에 들어갈 예정이어서 파국을 막으려면 월요일 오전까지 돌파구를 열어야 했습니다.
◇ 대화 창구 열기 위한 노사의 신경전 윤 사장은 15일 아침 8시30분께 박유기 노조위원장을 전격 찾아갑니다. 그 자리에서 윤 사장은 “파업을 자제해 달라. 간담회 형식의 대화로 풀자”고 요청합니다. 이에 박 노조위원장은 “특별·보충교섭을 하자”고 말합니다. 결국 두 사람은 대화는 하자는데 공감하면서도 ‘지난해 임금협상안의 연장으로 보며 특별·보충교섭을 하자’는 의견(노조)과 ‘지난해 임금협상과 관계없는 간담회를 하자’는 의견(회사)이 맞서 대화 물꼬를 트지 못합니다. 하지만 박 노조위원장은 불리한 여론을 의식한 듯 이례적으로 이날 오전 10시 기자회견을 열어 “교섭방식을 따지지 않고 교섭위원 전원이 16일 오전 10시 협상장으로 나가겠다”고 선언합니다. 노조가 파업 만능주의에 빠진 것이 아니라 국가경제를 걱정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파업의 정당성을 찾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만약 회사가 협상장에 나오지 않으면 파업 강도를 더 높이는 명분으로 활용하겠다는 의도였습니다. 대화의 물꼬를 트느냐는 회사에게 공이 넘어간 셈입니다. 예정대로 노조는 이날 오후 1시부터 4시간 부분파업에 들어갔습니다. 일부 언론들은 이 회사 노조가 파업을 할 때마다 어김없이 사용했던 ‘배부른 귀족노조’란 표현을 다시 꺼집어내며 철없는 파업으로 몰아부쳤습니다. 격주로 밤에 근무하고 날마다 2시간 잔업과 주말 특근을 해서 5500만원을 버는 평균 근속 16년차가 귀족 노동자냐고 항변했지만 비정규직이나 중소기업체 직원들의 연봉에 비교하는 보도엔 침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비슷한 연차의 대기업 석유화학업체 노동자들의 연봉이 1억원이 넘는다”는 주장도 변명에 불과했습니다.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자 장기 파업이 불가피하다는 우울한 전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특히 이날 오전 노조가 기자회견에선 교섭방식을 따지지 않겠다고 하고선 회사엔 “특별·보충교섭을 하자”는 내용의 공문을 보낸 것이 확인되면서 16일 오전 첫 협상이 사실상 어려운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때문에 대부분의 언론이 첫 교섭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으로 보도했습니다. 하지만 이날 저녁 조기타결의 불씨가 살아났습니다. 노조 사무실을 찾은 기자에게 노조 관계자가 “회사의 한 관계자가 ‘16일 오후 2시 예정인 정몽구 회장의 구형 공판 때 과민반응을 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고 귀띔한 것입니다. 이 팩트(사실)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겉으로 극한 대치를 한 노사가 물밑으로 협상을 시작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기자들이 기자실을 철수했을 무렵인 저녁 8시30분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노조가 다시 회사에 공문을 보낸 것입니다. 간담회를 받아들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제 간담회면 대화를 하겠다는 회사가 노조의 제안을 받아들이냐에 따라 첫 교섭 성사여부가 결정됐습니다. 회사는 30여명의 교섭위원 전원이 나오겠다고 통보한 것은 특별·보충교섭을 하겠다는 의미라고 분석했습니다. 이 말은 교섭장에 나오지 않을 것이란 의미입니다. 하지만 회사는 이날 밤 협상장에 나가는 것으로 가닥을 잡습니다. 회사가 노조의 대화요구에 응하기로 방향을 바꾼 것은 앞서 회사가 노조에 요청한 정 회장 규탄시위 자제와 관련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실제 노조는 비자금 조성과 횡령 등의 혐의로 지난해 4월 구속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던 정 회장의 구형공판에 맞춰 자택 및 법원 앞 거리시위 등을 계획했다가 1인 시위로 변경했습니다. 이것이 회사와의 교감 속에 이뤄진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 가능성은 높아 보입니다. 더구나 다음날 5일엔 정 회장의 선고공판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왕이 위기에 처하면 충신들이 몸을 던져 왕을 구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죠. 기자는 이날 밤 11시께 회사가 내일 협상장에 나간다는 사실을 취재원에게서 확인합니다. 그리고 ‘대화가 열릴지 주목된다’로 썼던 기사를 ‘노사 대화 첫 협상 가진다’로 급히 수정합니다. 인쇄사정으로 울산의 독자들은 볼 수 없었지만 서울·수도권 시민들은 중앙일간지 가운데 유일하게 <한겨레>를 통해 노사 첫 협상 사실을 알게 됩니다.
◇ 대화 물꼬 트고 이틀 만에 타결 다음날(16일) 첫 협상은 예정보다 40분 늦게 열렸습니다. 노조 교섭위원 30여명이 오전 10시10분 협상장에 먼저 나와 기다렸지만 회사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기자의 속은 타들어갔습니다. 중앙일간지 가운데 유일하게 협상이 열린다고 보도했지만 만약 성사가 되지 않으면 오보로 판명납니다. 회사를 기다리던 일부 노조 교섭위원은 자존심이 상했던지 화장실로 가면서 “노조사무실로 돌아가자”는 말을 했습니다. 이례적으로 노조가 먼저 협상장에 나왔는데 30분이나 더 기다렸으니 그럴만도 했습니다. 노조가 협상장에서 기다리는 동안 울산지검이 이헌구 전 노조위원장의 구속영장을 청구했다는 뉴스가 나옵니다. 검찰이 밝힌 이씨의 혐의는 사실 여부를 떠나 파장이 컸습니다. 이씨가 현대자동차 노조위원장으로 있던 2003년 7월말 경남 양산시 통도사 근처 암자에서 당시 김동진 사장(현 부회장)에게서 임단협과 관련해 파업을 철회해 회사의 손실이 발생하지 않도록 협상을 잘 진행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2억원을 받았다는 보도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노조의 기다림이 계속되던 10시40분 윤 사장이 노무담당 부장과 함께 협상장에 나타납니다. 카메라 기자 수십명이 윤 사장의 얼굴을 찍으려 서로 밀치는 모습은 이날 첫 협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순간 기자는 맘 속으로 ‘이제 됐다’고 외쳤습니다. 협상의 물꼬가 터지면 협상이 가속을 내던 이 회사 노사의 협상 관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윤 사장은 협상장에 들어간 지 5분만에 나옵니다. 몇몇 기자들의 입에선 ‘그럼 그렇지. 회사가 마지못해 나왔지’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10분 뒤 노조의 파격적인 협상 행보가 이어집니다. 노조위원장이 간부 3명과 함께 윤 사장을 찾아갑니다. 1시간 회의 끝에 노사는 조기 타결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데 합의합니다. 이날 오후부터 노사 협상은 급물살을 탑니다. 노사 각 3명으로 꾸려진 실무교섭은 여섯차례나 정회를 거듭하며 밤 11시까지 계속됩니다. 노사는 이날 밤 타결을 지으려 합니다. 타결의 첫 관문은 성과급 문제였습니다. 여기서 회사는 지난해 미달된 생산물량과 성과급 문제로 차질을 빚은 생산물량을 만회하는 조건으로 성과급 50%를 격려금이란 이름으로 주기로 결정합니다. 노조로선 이름은 다르지만 성과급 50%를 따내는게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뜻하지 않는 복병이 나타납니다. 고소고발과 손해배상청구소송 취하 문제입니다. 노조는 지금까지 관례대로 파업으로 빚어진 민·형사소송과 고소고발을 서로 취하하자고 합니다. 이에 회사는 ‘이것까지 양보하면 언론의 뭇매를 맞는다’며 손사래를 쳤습니다. 또 회사는 노조에 시무식 폭력의 공개 사과를 요구했지만 노조는 이를 거부합니다. 협상은 될 듯하면서도 부차적인 문제로 무산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결국 노사는 성과급 문제 해결엔 가닥을 잡았으면서도 최종 합의는 하지 못합니다. 노조 쪽 실무교섭위원이었던 하영철(35) 사무국장은 타결 뒤 기자에게 “17일 예정된 6시간 부분파업 전 타결을 보려 했으나 언론이 무서워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서로 양보하려 했지만 합의문을 두고 ‘누가 이겼다. 졌다’로 보도할 게 뻔한 언론이 부담스러웠다는 얘깁니다. 참으로 아쉬운 대목입니다. 물밑 정황을 기초로 노사의 여러 채널을 가동했습니다. 타결이 임박한 것은 분명하며 이르면 17일 타결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노사 협상 급물살’로 기사를 썼던 기자는 이날 밤 ‘17일 타결 또는 타결 임박’으로 수정할지를 놓고 고심합니다. 여기서 기자는 1998년 정리해고 사태를 떠올렸습니다. 당시 회사가 사상 초유의 정리해고를 강행하려고 하자 노조가 배수의 진을 치고 장기파업으로 맞섰고 정부는 파업을 강제로 중지시키는 긴급조정권을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겨우 노사가 합의 직전에 이르렀을 때 일부 언론이 ‘사실상 타결’ 또는 ‘타결’이란 제목으로 앞서 보도했습니다. 합의문 내용이 미리 알려지면서 현장 조합원들의 반발이 거셌고 노사는 다시 재협의에 들어간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물론 다른 언론보다 한 발 앞서 보도하면 여론을 선점하는 효과도 있겠지만 자칫 조기 타결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낙종을 하더라도 노사 대타결에 도움을 주는 게 언론의 자세라고 여겼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17일 일부 언론에서 마치 노사가 합의한 것처럼 보도했습니다. 노조집행부를 믿고 파업에 동참했던 현장 조합원들은 밀실협상을 벌이는게 아니냐며 의혹의 시선을 보냈습니다. 회사도 곤혼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과급 합의가 마치 회사가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다시 지키지 못한 것처럼 해석되면서 인터넷에선 누리꾼들의 비난이 빗발쳤습니다. 언론의 성급한 보도가 조기 타결을 가로막는 악재로 작용한 것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17일 노사 대표가 오전부터 두차례 단독 협상을 벌였지만 난항을 겪었습니다. 이날 오후 5시 겨우 노사는 합의문에 서명을 합니다.
◇ 조기타결의 근본 이유
조기 타결이 되자 많은 이들이 영원히 등을 돌릴 것 같던 노사가 갑자기 합의를 하게 된 이유에 대해 궁금해 했습니다. 대부분의 언론들은 이헌구 전 노조위원장의 구속이 결정적 구실을 했다고 분석했습니다. 여기에 정몽구 회장의 공판이 대화를 거부하던 회사를 협상장으로 나오게 만들었다고 풀이했습니다. 이런 주장은 타당성이 있습니다. 이헌구 전 노조위원장의 구속은 노조는 물론 금품으로 노조위원장을 회유하려한 회사도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혹자는 검찰이 회사와 교감을 하고 이 사건을 터트렸다고 하는데 협상의 유리한 위치에 있던 회사가 이 사건을 계기로 더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선 것을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또 정 회장의 공판은 회사에겐 분명 약점입니다. 더구나 노조가 이 문제를 물고 늘어지면 다음달 5일 예정인 정 회장의 선고공판에도 영향이 미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자는 이런 변수들이 협상을 앞당기는 촉매제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노사가 시간이 흐르면서 ‘이번 싸움은 어느 쪽도 승리할 수 없다’고 분명히 인식한 것이 조기 타결을 끌어냈다고 분석합니다. 회사 사정을 잘 모르는 여론에 휘둘려 대결구도를 계속하면 공멸할 수 밖에 없다는 위기감을 느낀 노사가 상생의 길을 찾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왕 타결을 할 바에야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는 공감대가 조기 타결의 일등공신입니다. ◇ 상생의 희망을 보았다 최단기록인 파업 이틀 만에 쟁의를 타결짓자 대다수 언론은 ‘회사가 노조에 밀렸다’, ‘노조가 회사에 굴복했다’는 등의 제목을 달았습니다. 한 경제지는 ‘현대차가 국민을 우롱했다’고 했습니다. 노조가 파업에 들어가자 ‘하청업체의 피해가 우려된다’고 보도했던 언론들이 조기 타결을 비난하고 나선 것입니다. 회사는 궁지에 몰린 노조를 위해 삭감한 성과급 50%를 다른 이름으로 지급하고, 노조는 원칙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을 게 뻔한 회사의 좁은 입지를 감안해 고소고발 및 손해배상 취하 문구를 합의서에 넣지 않았습니다. 이를 두고 일부 언론은 ‘합의문 문구가 다시 분쟁의 불씨가 되고 있다’며 노사 갈등을 부추겼습니다. 이런 보도를 접한 회사 관계자들은 “현장 분위기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며 허탈해 했습니다. 물론 이 회사는 환골탈태합니다. 노조 역사 20년 가운데 19년 동안 파업을 한 것은 노사 모두 반성해야 합니다. 특히 계속되는 노조의 비리는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회사도 돈으로 노조 간부를 회유하려 하는 전근대적인 노무관리방법을 버려야 합니다. 하지만 이번 조기 타결과정에서 과거와 다른 긍정적인 모습도 보였습니다. 먼저 파업 이틀 만에 합의한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동안 파업없이 타결하거나 조기에 타결지은 노조 집행부는 회사에 민주노조의 정통성을 팔아먹은 역적으로 몰리고 회사도 고육지책 끝에 타결하면 언론으로부터 ‘노조에 백기투행했다’는 뭇매를 맞아온 것을 감안하면 노사 모두 대승적 차원에서 큰 용기를 낸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2004년의 5일 파업이 가장 짧았습니다. 교섭위원수나 교섭방식 등 교섭형식 때문에 교섭창구조차 열지 못했던 관행이 이번에 깨진 것은 새로운 관행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울산/<한겨레> 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성과급 50% 삭감은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회사가 처음으로 적용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동안 회사는 해마다 임금협상 또는 2년마다 단체협상을 하면서 노조가 파업을 하면 타결과 함께 격려금 등의 각종 수당을 만들어 파업으로 생긴 임금손실분을 보전해 줬습니다. 그래서 노조 집행부가 파업 찬반투표를 벌이면 한 차례도 부결된 적이 없었습니다. 막강한 노조의 힘에 눌려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파업이 연례행사처럼 된 빌미를 회사가 제공한 셈이지요. 성과급을 사실상 고정급으로 챙겨오던 노조의 입장에선 성과급 50% 삭감은 일종의 도발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한겨레는 노사 갈등의 신호탄이 됐던 성과급 50% 삭감 문제를 동아일보와 함께 앞서 보도는 했지만 이 문제가 앞으로 가져올 파장과 의미 등을 비중있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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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본관 앞에서 열린 파업 집회에 참가한 노조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울산=연합뉴스)
도덕성 시비로 불명예 퇴진을 앞둔 노조 집행부는 성과급마저 삭감당하면 설 자리가 더욱 좁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노조는 성과급 삭감이 통보된 지난달 28일부터 주야간 2시간 잔업거부와 함께 3일 오전 9시 예정된 시무식을 저지하기로 합니다. 노조가 2일 회사 쪽에 ‘충돌이 우려되니 시무식을 연기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회사로선 새해 시무식을 연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전례도 없거니와 ‘이빨빠진 호랑이’로 전락한 노조 집행부를 무서워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회사는 3일 오전 9시 시무식을 강행합니다. 마침 노조사무실에서 회의를 하고 있던 노조 집행부 간부 40여명은 김동진 부회장과 윤 사장이 시무식장인 울산공장 옆 문화회관으로 이동한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갑니다. 경비원 100명 이상이 막았습니다. 수적으로 밀린 노조 간부들은 무리수를 둡니다. 일부 노조 간부들이 김 부회장과 윤 사장이 탑승한 차량에 올라가 마구 굴렀고 한 노조 간부는 시무식장으로 들어가려는 윤 사장을 화단에서 덮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윤 사장은 얼굴에 가벼운 찰과상을 입습니다. 화가난 노조 간부들은 이성을 잃어갔습니다. 의자로 시무식장 유리를 깨고 식장에 분말소화기를 마구 쏘았습니다. 순식간에 시무식장은 난장판이 됐고 결국 시무식은 10분 만에 중단됐습니다. 노조가 왜 무리수를 뒀을까요? 사건이 터진 직후 대다수 언론에선 ‘비리에 연루된 집행부가 위기 국면을 벗어나기 위해 계획적으로 폭력을 행사했다’고 보도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좀 무리가 있습니다. 시무식 폭력사태의 발단이 됐던 성과급 삭감 문제는 회사가 노조에 통보하면서 시작됐습니다. 노조 간부들이 시무식장 저지를 위해 사용했던 시위용품도 시무식장 근처 화단에 있던 나무 지지대와 시무식장 안에 있던 의자, 분말소화기 등이었습니다. 노조가 처음부터 시무식장을 폭력으로 막으려 했다면 쇠파이프나 각목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현대자동차 노조 역대 파업일수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노조사무실에서 박유기 노조위원장(가운데)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울산=연합뉴스)
◇ 대화 창구 열기 위한 노사의 신경전 윤 사장은 15일 아침 8시30분께 박유기 노조위원장을 전격 찾아갑니다. 그 자리에서 윤 사장은 “파업을 자제해 달라. 간담회 형식의 대화로 풀자”고 요청합니다. 이에 박 노조위원장은 “특별·보충교섭을 하자”고 말합니다. 결국 두 사람은 대화는 하자는데 공감하면서도 ‘지난해 임금협상안의 연장으로 보며 특별·보충교섭을 하자’는 의견(노조)과 ‘지난해 임금협상과 관계없는 간담회를 하자’는 의견(회사)이 맞서 대화 물꼬를 트지 못합니다. 하지만 박 노조위원장은 불리한 여론을 의식한 듯 이례적으로 이날 오전 10시 기자회견을 열어 “교섭방식을 따지지 않고 교섭위원 전원이 16일 오전 10시 협상장으로 나가겠다”고 선언합니다. 노조가 파업 만능주의에 빠진 것이 아니라 국가경제를 걱정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파업의 정당성을 찾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만약 회사가 협상장에 나오지 않으면 파업 강도를 더 높이는 명분으로 활용하겠다는 의도였습니다. 대화의 물꼬를 트느냐는 회사에게 공이 넘어간 셈입니다. 예정대로 노조는 이날 오후 1시부터 4시간 부분파업에 들어갔습니다. 일부 언론들은 이 회사 노조가 파업을 할 때마다 어김없이 사용했던 ‘배부른 귀족노조’란 표현을 다시 꺼집어내며 철없는 파업으로 몰아부쳤습니다. 격주로 밤에 근무하고 날마다 2시간 잔업과 주말 특근을 해서 5500만원을 버는 평균 근속 16년차가 귀족 노동자냐고 항변했지만 비정규직이나 중소기업체 직원들의 연봉에 비교하는 보도엔 침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비슷한 연차의 대기업 석유화학업체 노동자들의 연봉이 1억원이 넘는다”는 주장도 변명에 불과했습니다.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자 장기 파업이 불가피하다는 우울한 전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특히 이날 오전 노조가 기자회견에선 교섭방식을 따지지 않겠다고 하고선 회사엔 “특별·보충교섭을 하자”는 내용의 공문을 보낸 것이 확인되면서 16일 오전 첫 협상이 사실상 어려운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때문에 대부분의 언론이 첫 교섭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으로 보도했습니다. 하지만 이날 저녁 조기타결의 불씨가 살아났습니다. 노조 사무실을 찾은 기자에게 노조 관계자가 “회사의 한 관계자가 ‘16일 오후 2시 예정인 정몽구 회장의 구형 공판 때 과민반응을 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고 귀띔한 것입니다. 이 팩트(사실)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겉으로 극한 대치를 한 노사가 물밑으로 협상을 시작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기자들이 기자실을 철수했을 무렵인 저녁 8시30분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노조가 다시 회사에 공문을 보낸 것입니다. 간담회를 받아들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제 간담회면 대화를 하겠다는 회사가 노조의 제안을 받아들이냐에 따라 첫 교섭 성사여부가 결정됐습니다. 회사는 30여명의 교섭위원 전원이 나오겠다고 통보한 것은 특별·보충교섭을 하겠다는 의미라고 분석했습니다. 이 말은 교섭장에 나오지 않을 것이란 의미입니다. 하지만 회사는 이날 밤 협상장에 나가는 것으로 가닥을 잡습니다. 회사가 노조의 대화요구에 응하기로 방향을 바꾼 것은 앞서 회사가 노조에 요청한 정 회장 규탄시위 자제와 관련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실제 노조는 비자금 조성과 횡령 등의 혐의로 지난해 4월 구속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던 정 회장의 구형공판에 맞춰 자택 및 법원 앞 거리시위 등을 계획했다가 1인 시위로 변경했습니다. 이것이 회사와의 교감 속에 이뤄진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 가능성은 높아 보입니다. 더구나 다음날 5일엔 정 회장의 선고공판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왕이 위기에 처하면 충신들이 몸을 던져 왕을 구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죠. 기자는 이날 밤 11시께 회사가 내일 협상장에 나간다는 사실을 취재원에게서 확인합니다. 그리고 ‘대화가 열릴지 주목된다’로 썼던 기사를 ‘노사 대화 첫 협상 가진다’로 급히 수정합니다. 인쇄사정으로 울산의 독자들은 볼 수 없었지만 서울·수도권 시민들은 중앙일간지 가운데 유일하게 <한겨레>를 통해 노사 첫 협상 사실을 알게 됩니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본관 1층 아반떼룸 앞에서 박유기 노조위원장(가운데)이 협상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울산=연합뉴스)
◇ 대화 물꼬 트고 이틀 만에 타결 다음날(16일) 첫 협상은 예정보다 40분 늦게 열렸습니다. 노조 교섭위원 30여명이 오전 10시10분 협상장에 먼저 나와 기다렸지만 회사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기자의 속은 타들어갔습니다. 중앙일간지 가운데 유일하게 협상이 열린다고 보도했지만 만약 성사가 되지 않으면 오보로 판명납니다. 회사를 기다리던 일부 노조 교섭위원은 자존심이 상했던지 화장실로 가면서 “노조사무실로 돌아가자”는 말을 했습니다. 이례적으로 노조가 먼저 협상장에 나왔는데 30분이나 더 기다렸으니 그럴만도 했습니다. 노조가 협상장에서 기다리는 동안 울산지검이 이헌구 전 노조위원장의 구속영장을 청구했다는 뉴스가 나옵니다. 검찰이 밝힌 이씨의 혐의는 사실 여부를 떠나 파장이 컸습니다. 이씨가 현대자동차 노조위원장으로 있던 2003년 7월말 경남 양산시 통도사 근처 암자에서 당시 김동진 사장(현 부회장)에게서 임단협과 관련해 파업을 철회해 회사의 손실이 발생하지 않도록 협상을 잘 진행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2억원을 받았다는 보도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노조의 기다림이 계속되던 10시40분 윤 사장이 노무담당 부장과 함께 협상장에 나타납니다. 카메라 기자 수십명이 윤 사장의 얼굴을 찍으려 서로 밀치는 모습은 이날 첫 협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순간 기자는 맘 속으로 ‘이제 됐다’고 외쳤습니다. 협상의 물꼬가 터지면 협상이 가속을 내던 이 회사 노사의 협상 관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윤 사장은 협상장에 들어간 지 5분만에 나옵니다. 몇몇 기자들의 입에선 ‘그럼 그렇지. 회사가 마지못해 나왔지’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10분 뒤 노조의 파격적인 협상 행보가 이어집니다. 노조위원장이 간부 3명과 함께 윤 사장을 찾아갑니다. 1시간 회의 끝에 노사는 조기 타결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데 합의합니다. 이날 오후부터 노사 협상은 급물살을 탑니다. 노사 각 3명으로 꾸려진 실무교섭은 여섯차례나 정회를 거듭하며 밤 11시까지 계속됩니다. 노사는 이날 밤 타결을 지으려 합니다. 타결의 첫 관문은 성과급 문제였습니다. 여기서 회사는 지난해 미달된 생산물량과 성과급 문제로 차질을 빚은 생산물량을 만회하는 조건으로 성과급 50%를 격려금이란 이름으로 주기로 결정합니다. 노조로선 이름은 다르지만 성과급 50%를 따내는게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뜻하지 않는 복병이 나타납니다. 고소고발과 손해배상청구소송 취하 문제입니다. 노조는 지금까지 관례대로 파업으로 빚어진 민·형사소송과 고소고발을 서로 취하하자고 합니다. 이에 회사는 ‘이것까지 양보하면 언론의 뭇매를 맞는다’며 손사래를 쳤습니다. 또 회사는 노조에 시무식 폭력의 공개 사과를 요구했지만 노조는 이를 거부합니다. 협상은 될 듯하면서도 부차적인 문제로 무산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결국 노사는 성과급 문제 해결엔 가닥을 잡았으면서도 최종 합의는 하지 못합니다. 노조 쪽 실무교섭위원이었던 하영철(35) 사무국장은 타결 뒤 기자에게 “17일 예정된 6시간 부분파업 전 타결을 보려 했으나 언론이 무서워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서로 양보하려 했지만 합의문을 두고 ‘누가 이겼다. 졌다’로 보도할 게 뻔한 언론이 부담스러웠다는 얘깁니다. 참으로 아쉬운 대목입니다. 물밑 정황을 기초로 노사의 여러 채널을 가동했습니다. 타결이 임박한 것은 분명하며 이르면 17일 타결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노사 협상 급물살’로 기사를 썼던 기자는 이날 밤 ‘17일 타결 또는 타결 임박’으로 수정할지를 놓고 고심합니다. 여기서 기자는 1998년 정리해고 사태를 떠올렸습니다. 당시 회사가 사상 초유의 정리해고를 강행하려고 하자 노조가 배수의 진을 치고 장기파업으로 맞섰고 정부는 파업을 강제로 중지시키는 긴급조정권을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겨우 노사가 합의 직전에 이르렀을 때 일부 언론이 ‘사실상 타결’ 또는 ‘타결’이란 제목으로 앞서 보도했습니다. 합의문 내용이 미리 알려지면서 현장 조합원들의 반발이 거셌고 노사는 다시 재협의에 들어간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물론 다른 언론보다 한 발 앞서 보도하면 여론을 선점하는 효과도 있겠지만 자칫 조기 타결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낙종을 하더라도 노사 대타결에 도움을 주는 게 언론의 자세라고 여겼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17일 일부 언론에서 마치 노사가 합의한 것처럼 보도했습니다. 노조집행부를 믿고 파업에 동참했던 현장 조합원들은 밀실협상을 벌이는게 아니냐며 의혹의 시선을 보냈습니다. 회사도 곤혼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과급 합의가 마치 회사가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다시 지키지 못한 것처럼 해석되면서 인터넷에선 누리꾼들의 비난이 빗발쳤습니다. 언론의 성급한 보도가 조기 타결을 가로막는 악재로 작용한 것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17일 노사 대표가 오전부터 두차례 단독 협상을 벌였지만 난항을 겪었습니다. 이날 오후 5시 겨우 노사는 합의문에 서명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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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노조 간부들이 17일 오후 노사협상 타결소식이 전해진 뒤 울산공장 본관 앞에서 벌이던 파업 집회를 끝내고 땅에 흩어져 있는 깔개와 조합 소식지를 줍고 있다. 울산/연합뉴스
조기 타결이 되자 많은 이들이 영원히 등을 돌릴 것 같던 노사가 갑자기 합의를 하게 된 이유에 대해 궁금해 했습니다. 대부분의 언론들은 이헌구 전 노조위원장의 구속이 결정적 구실을 했다고 분석했습니다. 여기에 정몽구 회장의 공판이 대화를 거부하던 회사를 협상장으로 나오게 만들었다고 풀이했습니다. 이런 주장은 타당성이 있습니다. 이헌구 전 노조위원장의 구속은 노조는 물론 금품으로 노조위원장을 회유하려한 회사도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혹자는 검찰이 회사와 교감을 하고 이 사건을 터트렸다고 하는데 협상의 유리한 위치에 있던 회사가 이 사건을 계기로 더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선 것을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또 정 회장의 공판은 회사에겐 분명 약점입니다. 더구나 노조가 이 문제를 물고 늘어지면 다음달 5일 예정인 정 회장의 선고공판에도 영향이 미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자는 이런 변수들이 협상을 앞당기는 촉매제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노사가 시간이 흐르면서 ‘이번 싸움은 어느 쪽도 승리할 수 없다’고 분명히 인식한 것이 조기 타결을 끌어냈다고 분석합니다. 회사 사정을 잘 모르는 여론에 휘둘려 대결구도를 계속하면 공멸할 수 밖에 없다는 위기감을 느낀 노사가 상생의 길을 찾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왕 타결을 할 바에야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는 공감대가 조기 타결의 일등공신입니다. ◇ 상생의 희망을 보았다 최단기록인 파업 이틀 만에 쟁의를 타결짓자 대다수 언론은 ‘회사가 노조에 밀렸다’, ‘노조가 회사에 굴복했다’는 등의 제목을 달았습니다. 한 경제지는 ‘현대차가 국민을 우롱했다’고 했습니다. 노조가 파업에 들어가자 ‘하청업체의 피해가 우려된다’고 보도했던 언론들이 조기 타결을 비난하고 나선 것입니다. 회사는 궁지에 몰린 노조를 위해 삭감한 성과급 50%를 다른 이름으로 지급하고, 노조는 원칙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을 게 뻔한 회사의 좁은 입지를 감안해 고소고발 및 손해배상 취하 문구를 합의서에 넣지 않았습니다. 이를 두고 일부 언론은 ‘합의문 문구가 다시 분쟁의 불씨가 되고 있다’며 노사 갈등을 부추겼습니다. 이런 보도를 접한 회사 관계자들은 “현장 분위기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며 허탈해 했습니다. 물론 이 회사는 환골탈태합니다. 노조 역사 20년 가운데 19년 동안 파업을 한 것은 노사 모두 반성해야 합니다. 특히 계속되는 노조의 비리는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회사도 돈으로 노조 간부를 회유하려 하는 전근대적인 노무관리방법을 버려야 합니다. 하지만 이번 조기 타결과정에서 과거와 다른 긍정적인 모습도 보였습니다. 먼저 파업 이틀 만에 합의한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동안 파업없이 타결하거나 조기에 타결지은 노조 집행부는 회사에 민주노조의 정통성을 팔아먹은 역적으로 몰리고 회사도 고육지책 끝에 타결하면 언론으로부터 ‘노조에 백기투행했다’는 뭇매를 맞아온 것을 감안하면 노사 모두 대승적 차원에서 큰 용기를 낸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2004년의 5일 파업이 가장 짧았습니다. 교섭위원수나 교섭방식 등 교섭형식 때문에 교섭창구조차 열지 못했던 관행이 이번에 깨진 것은 새로운 관행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울산/<한겨레> 김광수 기자 k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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