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호/서울 휘문고 교사
선생님이 말하는 교실 안팎 /
텔레비전 드라마의 한 장면이다. 배경은 학교 교실. 문제아가 나오고, 잘 생긴데다 인품도 썩 괜찮은 총각 선생이 나온다. 크고 작은 문제들. 결국 갈등이 폭발하는 클라이맥스쯤 가서 선생이 반장에게 몽둥이를 디민다.
“너희들을 이렇게 만든 건 모두 다 내 책임이야. 자, 이 몽둥이로 선생님을 때려. ”
“…”
“뭐해? 어서 때리라니까!”
억수같이 퍼붓는 비를 맞으며 운동장에 모여 있던 아이들이 모두 무릎을 꿇는다.
“선생니임!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흐흑.”
옛날 아날로그 시대엔 이런 감동적인 장면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엔 으으, 소름. 아마 우리 아이들 서로 몽둥이 들겠다고 난리법석을 칠 거다.
“좋은 영화가 나왔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꼭 봐야만 하는 영홥니다. 제목은 <죽은 시인의 사회>. 단체 관람을 적극 추천합니다.” 젊은 혈기로 교무회의 석상에서 침을 튀긴 적이 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소시적’엔 ‘소름 끼치는 드라마’를 연출했던 것 같다. 키팅 선생이 교탁 위에 올라가 연설하는 장면에 감동받아 ‘나도 한번 시도해 볼까?’라는 위험천만한 생각이 그냥 생각으로만 끝난 게 지금 생각해도 얼마나 다행인지. 만약 그때 교탁 위에 올라가 ‘삐끗’ 넘어지기라도 했다면 아마 내 일생일대 최고의 감동적인(?) 드라마를 완성시켰을 거다. 지금 학교라는 무대에는 이쪽 저쪽 채널을 돌려 봐도 그 ‘드라마’란 것이 없다. 텔레비전뿐만이 아니다. 영화, 음악, 문학 모든 장르를 통틀어 아무리 뒤흔들어 봐도 “밤새 울었습니다”란 대사를 아이들로부터 들어본 적이 없다. 그들 눈이 그렇게 시뻘개졌다면 그건 간밤에 컴퓨터 게임이나 음란물을 보느라 그리 됐을 뿐. 낙엽만 굴러가도 코미디의 소재가 되고, 늘어진 새 한 마리 때문에 비극을 연출하며, 창가에 날아온 나비 잡느라 발레를 하던 시절은 진짜 ‘쥬라기’시대다. 미국에서 던진 박찬호의 강속구가 그대로 우리 아이들 눈 속으로 날아오는 시대요, ‘대머리 여가수’가 안방 텔레비전 안에서 “가슴이 예뻐야 여자다”라고 목청껏 노랠 부르는 시대다. 웬만한 자극 아니고선 우리 애들 콧방귀도 안 뀐다. 아니, 여인네의 가슴이 무지 크게 그려진 만화책을 빼앗으면 오히려 의미심장한 미소를 씨익 날리는 우리 아이들이다. 한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배꼽 잡는 얘기를 하셨다. 너무 재밌어서 교실에서 한번 재현해 보려다 그만 얘기도 꺼내기 전에 웃음보가 터지고 만다. 그러자 우리 아이들 창문 냅다 열고 부채질을 해댄다. “끝까지 들어 봐. 얼마나 웃긴데.” “안 웃기거든요.” “좋아, 안 웃긴다 쳐. 그래도 예의상 끝까지 들어 주면 안 되냐?” “‘아부하지 말라’ 그러셨잖아요.” “또 꼬박꼬박 말대꾸다.” “‘할 말은 하라’고 하셨잖아요.” “좋아, 그런데 그게 뭐가 아부냐? 그건 ‘아부’가 아니고 바로 ‘배려’라는 거예요. 너네들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란 것도 모르냐? 그렇게 남에 대한 배려도 없고, 무관심하니까 세상이 이렇게 삭막하고 무서운 거 아냐.” “선생님, 무관심보다 더 무서운 게 있는데 뭔지 아세요?” “뭔데?” “관심있는 척 하는 거요.” “?” 전성호/서울 휘문고 교사 ohyeahh@hanmail.net
“좋은 영화가 나왔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꼭 봐야만 하는 영홥니다. 제목은 <죽은 시인의 사회>. 단체 관람을 적극 추천합니다.” 젊은 혈기로 교무회의 석상에서 침을 튀긴 적이 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소시적’엔 ‘소름 끼치는 드라마’를 연출했던 것 같다. 키팅 선생이 교탁 위에 올라가 연설하는 장면에 감동받아 ‘나도 한번 시도해 볼까?’라는 위험천만한 생각이 그냥 생각으로만 끝난 게 지금 생각해도 얼마나 다행인지. 만약 그때 교탁 위에 올라가 ‘삐끗’ 넘어지기라도 했다면 아마 내 일생일대 최고의 감동적인(?) 드라마를 완성시켰을 거다. 지금 학교라는 무대에는 이쪽 저쪽 채널을 돌려 봐도 그 ‘드라마’란 것이 없다. 텔레비전뿐만이 아니다. 영화, 음악, 문학 모든 장르를 통틀어 아무리 뒤흔들어 봐도 “밤새 울었습니다”란 대사를 아이들로부터 들어본 적이 없다. 그들 눈이 그렇게 시뻘개졌다면 그건 간밤에 컴퓨터 게임이나 음란물을 보느라 그리 됐을 뿐. 낙엽만 굴러가도 코미디의 소재가 되고, 늘어진 새 한 마리 때문에 비극을 연출하며, 창가에 날아온 나비 잡느라 발레를 하던 시절은 진짜 ‘쥬라기’시대다. 미국에서 던진 박찬호의 강속구가 그대로 우리 아이들 눈 속으로 날아오는 시대요, ‘대머리 여가수’가 안방 텔레비전 안에서 “가슴이 예뻐야 여자다”라고 목청껏 노랠 부르는 시대다. 웬만한 자극 아니고선 우리 애들 콧방귀도 안 뀐다. 아니, 여인네의 가슴이 무지 크게 그려진 만화책을 빼앗으면 오히려 의미심장한 미소를 씨익 날리는 우리 아이들이다. 한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배꼽 잡는 얘기를 하셨다. 너무 재밌어서 교실에서 한번 재현해 보려다 그만 얘기도 꺼내기 전에 웃음보가 터지고 만다. 그러자 우리 아이들 창문 냅다 열고 부채질을 해댄다. “끝까지 들어 봐. 얼마나 웃긴데.” “안 웃기거든요.” “좋아, 안 웃긴다 쳐. 그래도 예의상 끝까지 들어 주면 안 되냐?” “‘아부하지 말라’ 그러셨잖아요.” “또 꼬박꼬박 말대꾸다.” “‘할 말은 하라’고 하셨잖아요.” “좋아, 그런데 그게 뭐가 아부냐? 그건 ‘아부’가 아니고 바로 ‘배려’라는 거예요. 너네들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란 것도 모르냐? 그렇게 남에 대한 배려도 없고, 무관심하니까 세상이 이렇게 삭막하고 무서운 거 아냐.” “선생님, 무관심보다 더 무서운 게 있는데 뭔지 아세요?” “뭔데?” “관심있는 척 하는 거요.” “?” 전성호/서울 휘문고 교사 ohyeah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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