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말하는 교실 안팎
우리 반에 윤진(가명)이라는 아이가 있다. 아이가 내게 낯설고, 내가 아이에게 낯설기 때문에 우리는 친해지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많은 싸움을 했다. 주로 나는 따발총처럼 훈계하며 소리치고, 아이는 겁먹은 눈으로 아무런 저항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아이가 독특하기 때문에, 더 독특하다고 불리는 교사인 나는 어떻게 하든지 아이의 아동성을 꺾으려고 했다. 안고, 볶고, 얼르고, 달래고, 잔소리하고 말이다.
아이는 사실 또래에 비해 사회성과 판단력이 부족하다. 내가 배운 발달 단계 지식으로 따지면 이는 유치원 때 형성되었어야 했다. 그래서 1년이 지나도 같은 반 친구들의 이름을 안 외운다. 아이에게 친구란 존재는 그저 언제나 어울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겠지…. 단짝이 없기 때문에 더 심해지는 아이의 자유분방함에 다른 아이들 일기장에는 이 녀석에 대한 항의글이 자자하다. 놀이에도 좀처럼 끼워주지 않는다. 나와 부모는 점점 더 지쳐갔다. 그 사이에 아이는 나에게 혼나가면서 숱한 상처도 받았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따돌림당하면서 때 이른 사춘기를 겪었다.
하지만 아이는 겉보기에 별 문제가 없다. 학습력도 좋다. 단지 너무 자유분방해서 주위 사람들을 질리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어릴 때 또래 친구들과 마음껏 어울리지 못하고 부모 울타리에서만 자라서인 것 같다.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그저 달리고 싶고, 노래하고 싶어하는 아이. 마치 넓은 벌판을 달리는 하얀 야생마 같다. 그 야생마를 붙잡아서 작은 책상에 앉히려는 현실은 그에게 너무 가혹하다. 하지만 학교란 곳은 혼자 뛰어 노는 것이 용납이 되지 않으니까 고삐를 당기면서도 나는 늘 고민한다. 어떤 것이 이 아이를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일지를 말이다.
사실 학교를 거치면 아이들은 대부분 평범해진다. 다들 창의성, 창의적인 인간, 창의적인 교육을 외치지만 알고 보면 평범한 인간을 만드는 곳이 바로 학교다. ‘평범한’ 교사인 나 역시 이런 극단적인 아이 하나 감싸지 못해 평범한 학생들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모른다.
‘어떻게라도 이 아이의 영재성을 끌어내야지.’ ‘이 아이를 정말 멋지게 키워보자.’라고 다짐했던 학기초의 나의 소원은 다른 소원으로 바뀌었다. ‘제발 이 아이에게 상처주지나 말았으면’ ‘내가 교육이란 이름으로, 학교가 아이들에게 바른 생활이란 이름으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 예쁜 아이는 원래 타고난 기질대로 학교에 적응할 수 있을까?’
아이들을 타고난 대로 키우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된다. 내가 자질이 부족해서 그런가 보다. 이 아이에게 상처주지 말자. 제발. 제발. 정여름/대구 용계초등학교 교사 ozoazoayo@paran.com
아이들을 타고난 대로 키우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된다. 내가 자질이 부족해서 그런가 보다. 이 아이에게 상처주지 말자. 제발. 제발. 정여름/대구 용계초등학교 교사 ozoazoayo@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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