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장하는 럼스펠드
5년 10개월 재임기간 ‘패권주의 선봉’에
9·11 뒤 이라크전 주도하다 제 발등 찍어 2000년 미국 대선 당시 조지 부시 공화당 후보는 유세에서 군 개혁을 위해 강력한 인물을 국방장관에 임명하겠다고 공언했다. 앨 고어 민주당 후보와의 ‘대접전’ 끝에 당선된 부시는 그 강력한 인물이 바로 도널드 럼스펠드라고 공개했다. 부시 행정부 대외정책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강력한’ 국방장관 럼스펠드가 퇴장한다. 5년10개월 동안 부시 정부의 국방장관을 역임하며 미국의 세계전략을 쥐락펴락했던 럼스펠드의 종적은 그 자체가 미국 패권주의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럼스펠드의 출발은 화려했다. 프린스턴대학 시절 레슬링 선수였던 럼스펠드는 불과 30살에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는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냈고, 43살에 최연소 국방장관에 발탁된다. 앞서 리처드 닉슨 정부에서 딕 체니 부통령을 백악관에 발탁한 이도 럼스펠드였다. 그는 포드 행정부 국방장관 시절 차차기 대선 주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럼스펠드는 2001년 펜타곤에 입성하면서 ‘관료주의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9·11 테러 하루 전날 그는 국방부에서 ‘타운홀 모임’을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오늘의 주제는 미국 안보에 심각한 위협을 끼치는 적”이라며 “그것은 바로 국방부의 관료주의”라고 의욕을 보였다. 하지만 9·11은 세계는 물론 그의 운명도 바꿔버렸다. 9·11 이전 그의 화두였던 군의 변화(transformation)는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으로 바뀌었다. 몇 주 만에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해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렸고, 2년 뒤에는 3주간의 신속작전으로 이라크를 장악했다. 2003년 4월 사담 후세인이 축출될 때까지만 해도 그의 선택은 옳은 듯했다. 아프간전에선 경무장한 특전사가 활약했고, 이라크 침공 때도 일선 장군들이 요청한 수에 턱없이 모자라는 병력으로 후세인을 제압했다.
손쉽게 끝난 이라크 침공은 역으로 그를 궁지로 내몰았다. 테러의 온상이 된 ‘혼돈의 땅’에서 적은 수의 최첨단 병력이 가진 한계는 명백해 보였다. 그의 장담과는 달리 이라크에서 미군 사망자는 늘어났고, 종파간 갈등은 내전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라크 안정을 위해 50만명의 미군 파병이 필요하다는 군 지도부의 요청을 ‘구태의연한 사고’라며 묵살했다.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과 퇴역 장성, 심지어는 군 신문에서까지 퇴진 요구 주장이 나왔다. 이라크 미군 증파에 대한 럼스펠드의 반대는 이라크에서의 ‘국가 건설’이 중동 민주화의 관건이라고 본 네오콘(신보수주의자)과의 불화로 이어졌다. 네오콘 핵심 이론가인 빌 크리스톨 <위클리 스탠더드> 편집장은 그의 해임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아부 그라이브와 관타나모 수용소의 포로 학대 사건도 사퇴 압력을 키웠다. 그의 지도력 행사 방식에도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역대 국방장관 가운데 3성, 4성 장군 등의 발탁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고 자신의 소신과 일치하는 인물들을 대거 요직에 배치했다. 하지만 그의 옆에서 직언을 할 수 있는 참모는 사라졌다. 그가 내세운 ‘변화’ 의제는 여전히 미래 시제다. 그는 냉전 이후 미군의 해외 주둔군에 대해 면밀히 검토한 뒤 한국과 유럽에서의 미군 감축 결정을 내렸다. 군 전략가들은 럼스펠드 아래서 군 구조나 예산지출 방식 등이 그의 소망대로 급격한 개혁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파견군에 대한 강조나 군에서 통합적인 사고의 중요성을 일깨운 점은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9·11 뒤 이라크전 주도하다 제 발등 찍어 2000년 미국 대선 당시 조지 부시 공화당 후보는 유세에서 군 개혁을 위해 강력한 인물을 국방장관에 임명하겠다고 공언했다. 앨 고어 민주당 후보와의 ‘대접전’ 끝에 당선된 부시는 그 강력한 인물이 바로 도널드 럼스펠드라고 공개했다. 부시 행정부 대외정책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강력한’ 국방장관 럼스펠드가 퇴장한다. 5년10개월 동안 부시 정부의 국방장관을 역임하며 미국의 세계전략을 쥐락펴락했던 럼스펠드의 종적은 그 자체가 미국 패권주의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럼스펠드의 출발은 화려했다. 프린스턴대학 시절 레슬링 선수였던 럼스펠드는 불과 30살에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는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냈고, 43살에 최연소 국방장관에 발탁된다. 앞서 리처드 닉슨 정부에서 딕 체니 부통령을 백악관에 발탁한 이도 럼스펠드였다. 그는 포드 행정부 국방장관 시절 차차기 대선 주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럼스펠드는 2001년 펜타곤에 입성하면서 ‘관료주의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9·11 테러 하루 전날 그는 국방부에서 ‘타운홀 모임’을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오늘의 주제는 미국 안보에 심각한 위협을 끼치는 적”이라며 “그것은 바로 국방부의 관료주의”라고 의욕을 보였다. 하지만 9·11은 세계는 물론 그의 운명도 바꿔버렸다. 9·11 이전 그의 화두였던 군의 변화(transformation)는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으로 바뀌었다. 몇 주 만에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해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렸고, 2년 뒤에는 3주간의 신속작전으로 이라크를 장악했다. 2003년 4월 사담 후세인이 축출될 때까지만 해도 그의 선택은 옳은 듯했다. 아프간전에선 경무장한 특전사가 활약했고, 이라크 침공 때도 일선 장군들이 요청한 수에 턱없이 모자라는 병력으로 후세인을 제압했다.
손쉽게 끝난 이라크 침공은 역으로 그를 궁지로 내몰았다. 테러의 온상이 된 ‘혼돈의 땅’에서 적은 수의 최첨단 병력이 가진 한계는 명백해 보였다. 그의 장담과는 달리 이라크에서 미군 사망자는 늘어났고, 종파간 갈등은 내전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라크 안정을 위해 50만명의 미군 파병이 필요하다는 군 지도부의 요청을 ‘구태의연한 사고’라며 묵살했다.
부시 행정부 내 네오콘(신보수주의자)과 후견인의 부침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과 퇴역 장성, 심지어는 군 신문에서까지 퇴진 요구 주장이 나왔다. 이라크 미군 증파에 대한 럼스펠드의 반대는 이라크에서의 ‘국가 건설’이 중동 민주화의 관건이라고 본 네오콘(신보수주의자)과의 불화로 이어졌다. 네오콘 핵심 이론가인 빌 크리스톨 <위클리 스탠더드> 편집장은 그의 해임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아부 그라이브와 관타나모 수용소의 포로 학대 사건도 사퇴 압력을 키웠다. 그의 지도력 행사 방식에도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역대 국방장관 가운데 3성, 4성 장군 등의 발탁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고 자신의 소신과 일치하는 인물들을 대거 요직에 배치했다. 하지만 그의 옆에서 직언을 할 수 있는 참모는 사라졌다. 그가 내세운 ‘변화’ 의제는 여전히 미래 시제다. 그는 냉전 이후 미군의 해외 주둔군에 대해 면밀히 검토한 뒤 한국과 유럽에서의 미군 감축 결정을 내렸다. 군 전략가들은 럼스펠드 아래서 군 구조나 예산지출 방식 등이 그의 소망대로 급격한 개혁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파견군에 대한 강조나 군에서 통합적인 사고의 중요성을 일깨운 점은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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