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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우리는 자신과 화해할 수 있을까?

등록 2007-03-25 17:39

괴물은 우리가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여야할 대상인 동시에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우리 안의 무의식적 두려움을 끄집어내고,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한겨레〉 자료사진
괴물은 우리가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여야할 대상인 동시에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우리 안의 무의식적 두려움을 끄집어내고,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용석의 대중문화로 철학하기
/ 봉준호의 ‘괴물’

우리는 괴물 이야기를 좋아한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악몽을 생생하게 재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를 공포와 분노로 가득 채워 그 짜릿한 전율로 온 몸에 묘한 생기를 불러일으킨다. 괴물의 등장은 우리에게 영웅이 되라고 요구하며, 우리를 단결하게 만든다.

생태 저술가 데이비드 쾀멘은 괴물과 인간 사이의 투쟁의 배경에는 수십만 년 동안 쌓인 인간의 생태적 경험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알파 포식자’에 대한 유전인자적 기억이다. 알파 포식자는 먹이 사슬의 최상위에 있는 육식동물을 가리킨다.(그래서 알파벳의 우두머리 문자로 표시한다.) 사자와 호랑이 같은 거대한 고양이과 동물들, 갈색곰, 악어, 왕도마뱀, 비단구렁이 등이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

쾀멘에 따르면, 그들은 호모 사피엔스를 진화시킨 생태학적 기반의 일부를 이루었고, 인간의 정체성을 만들어낸 심리적 배경의 일부가 되었으며, 인간이 그들에 대처하기 위해 발달시킨 정신 체계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알파 포식자들의 존재는 잔혹한 생태 현실이었다. 그런 현실에 대한 기억은 태곳적 동굴 벽화나 고대의 신화보다 더 아득하게 먼 시절에 생성된 신호 체계로서 우리의 유전자에 프로그램 돼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들이 인간에게 끼친 영향은 단순한 생존투쟁이라는 차원을 초월해 신화, 예술, 서사문학, 종교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는 것이다. 길가메시와 훔바바, 베어울프와 그렌델, 페르세우스와 바다 괴물, 성 조지와 용의 대결 등 그 목록은 엄청 길다. 이 괴물들은 이야기의 주인공들 손에 죽음으로써 그들을 영웅으로 만들며, 그들 앞에서 사람들을 서로 단결하게 한다.

괴물은 인간 두려움 투영된 자아
우리 자아의 버림받은 쌍둥이다
물리치기보단 직시하고 화해해야


봉준호 감독의 <괴물>은, 괴물과 인간의 투쟁사가 전해준 전형적인 요소들을 대부분 그대로 담고 있다. 쾀멘도 지적했듯이 괴물의 포식성은 이런 이야기들이 흥미를 끌 수 있는 핵심적인 요소다. 환경 오염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한강의 괴물 또한 엄청난 포식성을 보여준다. 사람을 통째로 삼키며 포획한 ‘먹이’를 비밀 장소에 가둬두었다가 필요할 때 또 포식한다. 괴물이 잡아먹고 소화시킨 사람들의 해골과 뼈들을 마구 토해내는 혐오스런 장면에서 그 잔혹한 포식성은 극치에 이른다.

귀여운 딸 현서를 잡아간 괴물 앞에서 박강두의 가족은 굳게 뭉친다. 영웅적 행동 또한 마다 않는다. 현서의 할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야! 니들 빠지고 이참에 내가 저놈하고 아주 끝장을 봐야겠다”며 홀로 괴물과 맞선다. 평소 푼수 같은 행동을 일삼던 박강두도, 화염에 휩싸여 괴로워하는 괴물에게 쇠파이프로 최후의 일격을 가할 때는, 긴 창으로 용을 퇴치했던 성 조지 못지 않은 결연함과 단호함을 보인다. 괴물은 이렇게 또 제거된다. 이것은 괴물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생태학적 기원의 입장에서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또 다른 이유에서도 괴물 이야기를 좋아한다.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는 철학적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철학자 리처드 커니는, 괴물이 우리 안에 이미 내재돼 있는 모습의 투사임을 보여주면서, 인간의 정체성 그 이면에 감춰져 있는 타자성의 진실을 추적한다. 우리는 거의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 무의식적 두려움들을 타자에게 투사한다는 것이다.

괴물이 인간 내면의 투사라면, 괴물의 이야기는 인간의 정체를 밝히는 소중한 통로다. 그래서 커니는 “괴물들은 우리 안의 지옥을 끄집어내고,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괴물들은 아주 탁월한 타자이다. 그들 없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며, 그들이 있어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다고 믿었던 존재가 아님을 깨달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괴물은 자아 성찰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자아의 버림받았던 쌍둥이 형제로서 타자인 것이다.

괴물이 우리의 자아라는 입장은,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의 <용의 신화> 해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용은 우리 자신이 자아에 속박돼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고, 우리 자신을 꽉 죄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자아이다.” 결국 용은 우리가 화해하지 못한 또 다른 우리다.

캠벨은 더 나아가 괴물과 인간의 모험담에서 두 가지 유형을 구별해낸다. 첫째, 괴물이 인간을 삼키는 경우다. <구약성서>에서 요나가 거대한 물고기 배 속에 들어가듯이, 이렇게 삼켜지는 과정은 자아의 변화를 위한 시련을 상징한다.(괴물에게 삼켜진 인간은 부활하듯 토해진다.) 둘째는 인간이 괴물의 일부를 삼키는 경우다. <니벨룽겐의 노래>에서 지크프리트가 용을 죽이고 그 심장을 먹음으로써 지혜롭게 되는 것처럼, 이는 자아가 더 높은 차원의 생기를 얻는 것을 상징한다.

커니와 캠벨은 우리에게 자아 성찰의 중요한 통로를 제시한다. 하지만 수많은 괴물 이야기에서, 괴물들은 인간의 서사에 봉사하고 버려진다. 괴물은 영웅적 순간의 만족감을 제공하고, 인간 공동체의 단결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는 처연히 사라진다. 봉준호의 <괴물>도 이런 한계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위한 홍보 문구가 유난히 가족의 끈끈함을 강조한 ‘한강, 가족 그리고 괴물’이다. <괴물>의 해외상영용 제목은 ‘호스트(Host)’이다. 곧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보유한 숙주 생명체라는 뜻으로 붙인 것이다.

김용석/영산대 교수
김용석/영산대 교수
하지만 철학적 관점에서 본 괴물은 자아의 숙주다. 즉 우리의 자아를 품고 있는 타자인 것이다. 영화 속에서 우리는 단결해 우리의 자아를 죽인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직시하고 우리 자신과 화해할 기회를 놓친 것이다. 수많은 괴물 이야기들이 괴물의 포식성을 드러내고 괴물을 희생양 삼아 인간끼리의 단결로 끝맺음할 때마다, 우리는 자아를 직시하고 자아와 화해할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누군가 흉측한 괴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오히려 또 다른 우리, 곧 타자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 성공한다면, 그때 우리는 자아와 진정으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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