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볼의 위력에 매료된 에디는 그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날아다니는 ‘스팀성’을 만들려고 애쓴다. 인간은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위험한 것을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는 존재이며, 이것이 인간이 가진 본질적 양면성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용석의 대중문화로 철학하기 / 오토모 가츠히로 <스팀 보이>
애니메이션 작품에서 장엄함을 느낀다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영상의 장엄함, 음향의 장엄함, 의미의 장엄함, 그리고 인간의 삶이라는 모순의 세계가 지니는 저 장중한 무게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오토모 가츠히로의 <스팀 보이>는 말 그대로 장편(러닝타임 126분)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오토모 감독은, 2004년 베네치아 영화제 폐막작이기도 한 이 작품의 프롤로그에서 엔딩 크레딧까지 작심하고 생각의 화두들을 심어 놓았다. 그것은 대사뿐만 아니라 채색과 명암의 세밀한 변화에도 담겨 있다. 그가 관객과 함께 사유하고자 하는 것은 과학과 기술, 그리고 발명을 둘러싼 인간의 삶과 꿈이다.
18세기 후반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발명은 산업혁명의 원동력이었다. 그로부터 약 1세기 뒤인 19세기 후반이 이야기의 배경이다. 영국의 과학자이자 발명가인 로이드 스팀은 아들 에디와 함께 알래스카의 비밀 공장에서 실험을 거듭한 끝에 초고압의 증기를 고밀도 상태로 봉인하는 데 성공한다. 축구공 만한 작은 부피 안에 경이적인 에너지를 품고 있는 ‘스팀 볼’이 그것이다.
당시 로이드는 상식을 뛰어넘는 발상만이 창조의 원동력이라는 신념을 갖고 과학 기술 발전을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었다. 반면 에디는 아버지에 견줘 과학적 탐구와 실험에서 덜 열정적이고 소심한 성격이었다. 최초의 스팀 볼 한 개를 완성시키던 날 있었던 폭발과 화재로 에디는 큰 부상을 입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다. 그런데 이를 계기로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그때까지와는 정반대의 신념을 갖게 된다. 로이드는 과학의 위험성을 깨닫고, 과학 기술 발전의 폭주에 제동을 거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는다. 반면 스팀 볼의 위력을 몸소 체험한 에디는 미국 거대 기업의 후원을 받아 두 개의 스팀 볼을 더 개발한 뒤 상상을 초월하는 과학 기술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그것은 비행할 수 있는 ‘스팀 성(城)’의 건설이다. 아들은 아버지가 갖고 있는 세 번째 스팀 볼을 빼앗아 자신의 계획을 완성하려 하고, 아버지는 아들의 계획 자체를 무산시키려 한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 또 하나의 혈육인 에디의 아들 레이는 갈등한다.
에디는, 스팀 성의 힘은 궁극적으로 인간 활동의 모든 분야에 이용될 것이라고 아들 레이를 설득한다. “길고 힘든 노동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자연의 재해에도 대항할 수 있어. 우리는 이 강대한 과학의 힘을 모든 세상에 보급할 거란다! 지금까지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했던 극지대를 탐험하고 고공과 심해로 진출할 거야!” 반면 할아버지는 “과학은 우주의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야. 인간의 어리석은 행동을 돕기 위한 게 아니야!”라고 맞받아 친다. 국제적 무기 거래로 부를 축적한 거대 기업의 재정 지원을 받아 건설되는 스팀 성은 가공할 무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원시 ‘불’과 같이 현대 ‘과학’도 사용하는 인간의 ‘이중성’ 투영 인문학적 성찰의 중요성 강조 에디는 런던 만국박람회를 기회로 스팀 볼의 힘으로 비행하는 거대한 스팀 성의 위용을 선보이려 하지만, 로이드와 그의 뜻을 따르는 레이의 방해로 성은 폭발 직전에 이른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아들을 설득한다. “포기해라, 에디, 이 성은 이미 폭발 직전이다! 우리의 꿈은 이제 무너진 거야.” 이에 아들은 답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 이 성을 발동시킨 시점에서 제 꿈은 실현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스팀 성을 파괴해봤자 이미 늦었다는 겁니다.…세상 사람들은 이미 이걸 봐버렸습니다.…한 번 이 압도적인 모습을 본 이상, 비록 스팀 성을 파괴한다 해도 다시 누군가 이것과 똑같은 걸 만들려 하겠죠. 이 모습이야말로 ‘궁극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입니다.” <스팀 보이>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인간을 위한 것이면서도 인간을 해칠 수 있다는 과학이 지닌 모순적 성격, 즉 ‘과학은 양날의 칼’이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받기 쉽다. 오토모 감독 역시 다분히 이런 메시지를 의도하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과학 논쟁에서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양날의 칼’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문명을 이루며 살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무엇보다도 불의 발견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신화에서도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씨를 가져다 주었기 때문에 제우스로부터 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 분명 불의 사용은 원시 인류가 획기적인 문명 발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불이란 어떤 특성을 지녔는가? 그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지만, 그 활용도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불을 사용하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물어보자. 인간은, 다른 동물들은 가까이 갈 엄두도 못내는,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위험한 것을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적 양면성이다. 인간은 저 먼 옛날부터 가장 위험한 것을 가장 효용성이 높은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은 위험한 것이 곧 쓸모 있다는 것을 체화한 존재다. 그러므로 효용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인간만큼 ‘양날의 칼’이라는 은유에 어울리는 존재도 없을 것이다.
로이드와 에드워드가 발명한 스팀 볼은 무엇인가? 그것은 초고압의 증기를 고밀도로 응축해서 품고 있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기구다. 그럼으로써 그 어느 것보다 효용성이 높은 도구다. 그 작은 볼 세 개가 연계해서 힘을 발휘하면 거대한 성채도 하늘로 날게 하지 않는가. 이러한 발명들에는 인간의 정신이, 더 나아가 인간의 정체성 그 자체가 투영되어 있다. 이제 문명 비판과 과학·기술 비판이 왜 인문적 성찰을 거쳐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자 없는 과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발명가 없는 발명품도 존재하지 않는다.
에드워드는 스팀 볼의 힘으로 부상하는 스팀 성의 모습이야말로 ‘궁극의 아름다움’이라고 했다. 이것 역시 불과의 비유적 사유를 자극한다. 저 옛날 원시 인류도 활활 타오르는 불의 모습에서 궁극의 아름다움을 보지 않았을까?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원시 ‘불’과 같이 현대 ‘과학’도 사용하는 인간의 ‘이중성’ 투영 인문학적 성찰의 중요성 강조 에디는 런던 만국박람회를 기회로 스팀 볼의 힘으로 비행하는 거대한 스팀 성의 위용을 선보이려 하지만, 로이드와 그의 뜻을 따르는 레이의 방해로 성은 폭발 직전에 이른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아들을 설득한다. “포기해라, 에디, 이 성은 이미 폭발 직전이다! 우리의 꿈은 이제 무너진 거야.” 이에 아들은 답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 이 성을 발동시킨 시점에서 제 꿈은 실현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스팀 성을 파괴해봤자 이미 늦었다는 겁니다.…세상 사람들은 이미 이걸 봐버렸습니다.…한 번 이 압도적인 모습을 본 이상, 비록 스팀 성을 파괴한다 해도 다시 누군가 이것과 똑같은 걸 만들려 하겠죠. 이 모습이야말로 ‘궁극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입니다.” <스팀 보이>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인간을 위한 것이면서도 인간을 해칠 수 있다는 과학이 지닌 모순적 성격, 즉 ‘과학은 양날의 칼’이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받기 쉽다. 오토모 감독 역시 다분히 이런 메시지를 의도하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과학 논쟁에서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양날의 칼’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문명을 이루며 살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무엇보다도 불의 발견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신화에서도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씨를 가져다 주었기 때문에 제우스로부터 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 분명 불의 사용은 원시 인류가 획기적인 문명 발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불이란 어떤 특성을 지녔는가? 그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지만, 그 활용도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불을 사용하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물어보자. 인간은, 다른 동물들은 가까이 갈 엄두도 못내는,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위험한 것을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적 양면성이다. 인간은 저 먼 옛날부터 가장 위험한 것을 가장 효용성이 높은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은 위험한 것이 곧 쓸모 있다는 것을 체화한 존재다. 그러므로 효용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인간만큼 ‘양날의 칼’이라는 은유에 어울리는 존재도 없을 것이다.
김용석/영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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