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웻지의 애니메이션 <로봇>은 유기체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용석의 대중문화로 철학하기 / 크리스 웻지 <로봇>
아이나 어른이나 이야기 속의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 주인공은 대부분 사람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주인공이 로봇일 경우도 있으니까. 나도 어릴 적에 우주소년 ‘아톰’처럼 되었으면 하고 꿈꾼 적이 있다. 나보다 더 젊은 세대들은 ‘로보트 태권브이’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험을 했으리라.
닮고 싶은 우상으로서 로봇은 사람보다 더 매력적일 수 있다. 우선 각각의 로봇은 모두 ‘개성 만점’이기 때문이다. 로봇은, 사람과 달리 종(種)의 생물적 특성을 모두 갖출 필요가 없다. 유전적으로 물려받아야 할 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이다. 각각의 로봇은 그 자체로 독보적인 존재다. 그러나 그 어느 것보다 로봇 주인공이 매력적인 이유는,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일 것이다. 아톰은 영원한 아톰이다. 태권브이도 자라거나 늙거나 병들지 않고 언제나 한결 같다. 불변은 신뢰의 원천이다. 또한 영생의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생로병사에 휘둘리지 않는 존재로서 로봇은 영원히 신뢰받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만화든, 영화든, 애니메이션이든, 지금까지 수많은 로봇 이야기들은 이런 로봇의 특성을 소재로 해왔다.
그런데 크리스 웻지의 애니메이션 <로봇>은 두 가지 점에서 앞선 작품들과 다르다. 그 하나는 사람들의 세계에 등장하는 로봇을 설정한 게 아니라 로봇들만이 사는 세상을 그려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로봇의 생존 조건을 ‘로봇의 본질’이라는 점에서 재조명한 것이다. 그 본질이란 로봇이 무기체라는 사실이다. 즉 사람이나 동물처럼 자생력 있는 유기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스스로 번식·성장하지 못하는
무기물 ‘로봇의 본질’ 잘 드러내
자생 가능한 유기체 의미 강조 유기체는 번식이라는 생명 현상으로 종을 유지한다. 하지만 무기물로 돼 있는 로봇은 번식할 수 없다. 그래서 웻지의 작품에서는 부부 로봇이 ‘태어날 아기’ 로봇의 부품을 공장에 주문한다. 부품이 집에 도착하면 열심히 조립해서 아이를 ‘해산’한다. 물론 출산의 고통도 있다. 조립이 어려워 땀을 흘리고 애를 먹기 때문이다. 반면 편한 점도 있다. 아기가 울기를 그치지 않으면, 애써 달래지 않고 볼륨 버튼으로 울음소리를 줄이면 된다. 새로 태어난 로봇은 ‘성장’한다. 유기체처럼 자생적으로 커 가는 게 아니라, 해가 지나면 그 나이에 맞게 부품을 갈아 끼움으로써 성장의 효과를 낸다. 로봇들의 세계에도 빈부의 차이가 있어서, 부자 로봇들은 새 부품을 주문해서 갈아 끼우지만, 시골 마을의 식당에서 식기세척 로봇으로 일하는 카퍼바틈씨 부부는 아들 로드니를 키우기 위해 사촌 형제들의 부품을 물려받아 활용한다. 그래도 로드니는 무럭무럭 자란다. 가난한 집안이지만 가족 사이의 화목도 있고, 인간애 못지 않은 로봇의 사랑도 있다. 그런데 진짜 큰 문제가 발생한다. 그때까지 로봇들에게 부품을 독점 공급해오던 빅웰드 회사가 기존 부품 공급을 중단하고, 새로이 로봇 자체를 업그레이드하는 제품만을 생산 공급한다는 것이다. 로봇은 무기체다. 그러므로 부품이 오래돼서 마모되거나 손상되면 교체해야 한다. 이는 로봇이 존재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그리고 부품이 없으면 아이도 낳을 수 없고, 아이를 키울 수도 없잖은가. 부품 조달을 할 수 없는 로봇들은 이제 폐기처분돼야 할 운명에 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 로드니는 빅웰드사에 대항해 로봇들을 이끌고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한다. 이는 부품 공급이라는 물질적 조건이 곧 생존의 조건인 무기체의 문제를 그대로 드러낸다.
<로봇>은 무기체를 의인화하지만, 무기체의 본질적 한계를 잘 보여준다. 또한 무기체의 한계라는 거울에 비춰 ‘유기체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유기체는 그 생명이 유한하다. 태어나서 성장하며 때론 병들기도 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노쇠해지고 결국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로봇의 부속처럼 몸의 일부를 외부에서 가져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성장하기 위해서도 그럴 필요가 없다. 스스로 자라고, 외부의 개입 없이도 스스로 늙어가며, 세월이 흘러 나이가 많이 들면, 스스로 죽음의 순간을 향해 간다. ‘스스로’라는 말은 유기체의 본질을 드러낸다. 이것은 곧 자생, 자율, 자유의 의미로 연결된다. 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모든 생명체가 스스로 살려고 애쓰는 성질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생명의 원리를 ‘자유’라고 파악한다. 그 원리는 가장 원시적인 수준의 아메바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기체의 존재 방식에서 작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기체의 물질대사도 기초적인 형태의 자유다. 그러나 사람과 달리, 로봇들은 먹고 소화시키고 배설하지 않는다. 물질대사를 하지 않는 것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로봇들은 아침 식사로 커피를 마시는 게 아니라 커피 색깔의 뜨거운 기름을 몸 곳곳에 붓는다. ‘기계 몸’에 윤활유를 보충하는 게 그들의 식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배설하지도 않고, 방귀도 뀌지 않는다. 그런데 이 작품의 한 장면에서 로봇들은 장난으로 방귀 뀌기 경쟁을 한다. 손바닥을 겨드랑이에 밀착했다가 떼는 방법으로 각자 특이한 방귀 소리를 내면서 즐거워한다. 그런 가운데 하숙집 주인 패니 아줌마는 ‘진짜로’ 땅이 진동할 정도의 엄청난 방귀를 뀌고 만다. 어찌된 일일까? 로봇의 조건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 아닌가. 하지만 환상과 상상력을 작품에 깔고 있는 애니메이션에서는 ‘애교’로 봐 넘기자. 유기체가 되고 싶은 로봇의 꿈을 담고 있는 건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방귀 뀌기 경쟁은 일종의 메타포다. 하지만 무기체의 한계와 동시에 자율적 의지를 발동하는 유기체의 속성을 아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유기체인 사람은 첨단의 기술로 제작한 무기체인 로봇에 견줘 모자란 점도 많겠지만, 자생, 자율 그리고 자유라는 차원에서 훨씬 더 풍족하고 다양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더 나아가 자유가 인간 정체성의 본질이라는 오래된 지혜를 되새기게 된다. 로봇이 번성하는 시대에 인간에 대한 성찰은 더욱 요구되며, 그것이 또한 로봇을 진지하게 이해하는 길이 될 것이다.
김용석/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무기물 ‘로봇의 본질’ 잘 드러내
자생 가능한 유기체 의미 강조 유기체는 번식이라는 생명 현상으로 종을 유지한다. 하지만 무기물로 돼 있는 로봇은 번식할 수 없다. 그래서 웻지의 작품에서는 부부 로봇이 ‘태어날 아기’ 로봇의 부품을 공장에 주문한다. 부품이 집에 도착하면 열심히 조립해서 아이를 ‘해산’한다. 물론 출산의 고통도 있다. 조립이 어려워 땀을 흘리고 애를 먹기 때문이다. 반면 편한 점도 있다. 아기가 울기를 그치지 않으면, 애써 달래지 않고 볼륨 버튼으로 울음소리를 줄이면 된다. 새로 태어난 로봇은 ‘성장’한다. 유기체처럼 자생적으로 커 가는 게 아니라, 해가 지나면 그 나이에 맞게 부품을 갈아 끼움으로써 성장의 효과를 낸다. 로봇들의 세계에도 빈부의 차이가 있어서, 부자 로봇들은 새 부품을 주문해서 갈아 끼우지만, 시골 마을의 식당에서 식기세척 로봇으로 일하는 카퍼바틈씨 부부는 아들 로드니를 키우기 위해 사촌 형제들의 부품을 물려받아 활용한다. 그래도 로드니는 무럭무럭 자란다. 가난한 집안이지만 가족 사이의 화목도 있고, 인간애 못지 않은 로봇의 사랑도 있다. 그런데 진짜 큰 문제가 발생한다. 그때까지 로봇들에게 부품을 독점 공급해오던 빅웰드 회사가 기존 부품 공급을 중단하고, 새로이 로봇 자체를 업그레이드하는 제품만을 생산 공급한다는 것이다. 로봇은 무기체다. 그러므로 부품이 오래돼서 마모되거나 손상되면 교체해야 한다. 이는 로봇이 존재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그리고 부품이 없으면 아이도 낳을 수 없고, 아이를 키울 수도 없잖은가. 부품 조달을 할 수 없는 로봇들은 이제 폐기처분돼야 할 운명에 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 로드니는 빅웰드사에 대항해 로봇들을 이끌고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한다. 이는 부품 공급이라는 물질적 조건이 곧 생존의 조건인 무기체의 문제를 그대로 드러낸다.
<로봇>은 무기체를 의인화하지만, 무기체의 본질적 한계를 잘 보여준다. 또한 무기체의 한계라는 거울에 비춰 ‘유기체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유기체는 그 생명이 유한하다. 태어나서 성장하며 때론 병들기도 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노쇠해지고 결국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로봇의 부속처럼 몸의 일부를 외부에서 가져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성장하기 위해서도 그럴 필요가 없다. 스스로 자라고, 외부의 개입 없이도 스스로 늙어가며, 세월이 흘러 나이가 많이 들면, 스스로 죽음의 순간을 향해 간다. ‘스스로’라는 말은 유기체의 본질을 드러낸다. 이것은 곧 자생, 자율, 자유의 의미로 연결된다. 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모든 생명체가 스스로 살려고 애쓰는 성질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생명의 원리를 ‘자유’라고 파악한다. 그 원리는 가장 원시적인 수준의 아메바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기체의 존재 방식에서 작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기체의 물질대사도 기초적인 형태의 자유다. 그러나 사람과 달리, 로봇들은 먹고 소화시키고 배설하지 않는다. 물질대사를 하지 않는 것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로봇들은 아침 식사로 커피를 마시는 게 아니라 커피 색깔의 뜨거운 기름을 몸 곳곳에 붓는다. ‘기계 몸’에 윤활유를 보충하는 게 그들의 식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배설하지도 않고, 방귀도 뀌지 않는다. 그런데 이 작품의 한 장면에서 로봇들은 장난으로 방귀 뀌기 경쟁을 한다. 손바닥을 겨드랑이에 밀착했다가 떼는 방법으로 각자 특이한 방귀 소리를 내면서 즐거워한다. 그런 가운데 하숙집 주인 패니 아줌마는 ‘진짜로’ 땅이 진동할 정도의 엄청난 방귀를 뀌고 만다. 어찌된 일일까? 로봇의 조건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 아닌가. 하지만 환상과 상상력을 작품에 깔고 있는 애니메이션에서는 ‘애교’로 봐 넘기자. 유기체가 되고 싶은 로봇의 꿈을 담고 있는 건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김용석/영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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