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뚱하고 못생긴 한나는 전신성형을 받은 뒤 아름답고 날씬한 제니가 된다. 그리고 자신이 한나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용서받음으로써 잃었던 자아 정체성도 되찾는다. 영화는 주인공이 이처럼 육체와 영혼을 모두 성형해 완벽한 존재로 ‘완성’돼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용석의 대중문화로 철학하기 / 김용화의 <미녀는 괴로워>
“성형외과 의사는 생명을 다루지 않지요.” 이것은 몸무게 0.1t의 추녀 강한나가 성형외과병원을 찾아가 원장 이공학을 ‘협박’하며 하는 말이자, 영화 <미녀는 괴로워>의 철학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하는 키워드다.
성형의는 생명을 다루지 않는다. 기계를 다룬다. 좀 절충적으로 표현하면 ‘기계몸’을 다룬다. 이 말에 독자는 끔찍한 성형수술을 떠올릴지 모른다. 자르고, 뽑아내고, 쑤셔넣고, 짜맞추고, 갈아내고, 덧붙이는 작업들로 이루어진 ‘잔혹한’ 수술이 사람 몸을 마치 기계 다루듯이 하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썼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좀 더 ‘고상한’ 의미에서 성형의가 기계몸을 다룬다고 한 것이다. 성형수술은 궁극적으로 ‘작품의 완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기계몸의 개념은, 성형수술에 대한 섣부른 윤리 논쟁에 앞서, 성형의 의미를 좀 더 깊고 넓게 파악할 수 있게 하는 통로일지 모른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러나 기계는 완벽하다. 그런데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은 완벽하게 작동하는 기계 장치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다시 말해, 그 자체로 완성된 피조물을 창조하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은 왜 이런 기계를 만들려고 노력하는가?
성형은 완전성에 대한 인간의 열망
수술로 완벽한 몸을 갖게 된 ‘제니’
‘한나’임을 고백해 영혼의 완성 이뤄 철학적 관심으로 가득한 역사학자 브루스 매즐리시도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기계를 만들게 했는가?”라는 물음에 답하고자 한다. 그는 “불완전한 인간의 완전성에 대한 열망”을 가장 근원적인 이유로 꼽는다. 이 점은 인간의 몸을 통해서도 관찰할 수 있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때론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자신의 육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갖는데, “짐승의 육체에서 벗어나려는 희망은 천사뿐 아니라 기계로도 향한다. 기계가 등장하자, 인간은 기계에게서 육신을 벗어나는 느낌을 얻었다”는 것이다. 천사가 기독교인에게 완전성의 표지였듯이, “기계는 세속적인 사람에게 완전성의 표지”가 된다는 것이다. 이제 매즐리시의 입장을 좀 더 밀고 나가보자. 인간은, 완벽한 기계 장치를 만들려는 노력에서 더 나아가, 한때 천사가 되기를 열망했듯이 인간 자신이 완벽한 기계몸으로 재탄생하려는 열망을 갖는다. 완전함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다. 처음부터 완벽한 요소들로 구성하는 것이 그 하나고, 불완전성을 유발하는 요소들을 고쳐 가면서 완성의 길로 나가는 것이 다른 하나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는 인형이다. 인형은 완성된 기계몸으로 태어난다. 후자의 대표적인 예는 인간이다. 인간은 자연인으로 태어나지만 기계몸으로 완성되기 위해 자신의 결손 부분을 고쳐나가고자 한다. 그런 방법들 가운데 하나가 성형수술이다. 성형(成形)은 완성(完成)을 위한 것이다. 어떤 부분성형이든 그것은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이제 한 번 성형수술을 받은 사람이 계속 성형을 욕망하거나 실제로 지속적으로 수술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은 이유를 이해하리라).
인류 문명사에는 ‘완성의 신화’라는 것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형태로 교묘하게 작동해 오고 있다. 그 다양한 형태들은 서로 전혀 다른 것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것은 철학 사상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다. 저 유명한 플라톤의 이데아는 완전성 신화의 철학적 버전이다. 완벽한 본(本)으로서 이데아에 비추어 이 세상의 불완전한 존재들에게 완성을 위해 영혼을 가꾸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그러니 누가 ‘완성의 신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이제 김용화 감독의 영화로 돌아가 완성의 신화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보자. 이 작품에서 완성의 신화는 이중적으로 작동한다. 쉽게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겹주인공 한나-제니의 변신이다. 자연인 한나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토털 성형을 거쳐 기계몸 제니로 재탄생한다. 이 충격적인 변신은 성형이 완성을 위한 것이라는 걸 한 번에 보여준다. 이중적 작동의 다른 하나는 잘 보이지 않을지 모른다. 그것은 인물에 집중돼 있지 않고, 스토리텔링에 잠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스토리 자체가 완성의 신화가 된다. 잠재해 있던 신화는 영화 전개의 각 단계를 거치면서 서서히 부상한다. 아미는 매력적인 외모와 황홀한 춤솜씨를 갖추고 있지만 노래를 못하는 이른바 립싱크 가수다. 천상의 목소리에 가창력까지 갖춘 한나는 무대 뒤에서 아미를 위해 대창을 한다. 아미의 콘서트는 이런 분업을 통해 인간 감각의 최고의 것들을 종합해냄으로써 ‘완벽한 작품’이 된다. 아미의 경우는 완성의 신화에서 프롤로그에 해당된다. 그것은 주인공 한나-제니가 본격적으로 쓰게 될 신화의 의미를 암시한다. 한나의 성형수술은 서사구조의 차원에서 보면 본편이 아니라 의미 있는 간주곡 정도에 해당된다. 신화의 본편과 대단원은 한나의 영혼을 잃었다가 되찾은 ‘영육이 완벽한 기계몸’ 제니가 모두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니가 쓰는 신화는 결국 한나의 신화다. 제니는 콘서트에서 자신이 한나임을, 그리고 콘서트장에 인형을 들고 찾아온 치매 노인이 아버지임을 고백함으로써 자아를 되찾는다. 결국 진실을 밝힘으로써 자유롭게 된다. 한나의 정체성을 되찾은 제니는 영혼과 육체의 양 차원에서 모두 완벽한 성형을 거쳐 인격체로서 완성된다. 플라톤과 이공학이 악수하는 순간이다. 이에 더해 짝사랑하던 남자의 마음까지 얻게 되고, 가수로서도 성공한다. 한나에서 제니로의 역전에 이은 제니에서 한나로의 재역전이 신화를 완성시켜주는 것이다. 이보다 더 온 몸에 소름 돋게 하는 신화를 쓸 수 있을까? 스토리 그 자체가 완성의 신화인 것이다. 그러니 누가 또 완성의 신화에서 자유롭겠는가? 이 영화를 현대판 신데렐라 이야기로 해석하거나(연관은 있지만 좀 더 복합적인 해석이 필요하며, 신데렐라는 원래 미녀라는 걸 잊지 말라!) 외모지상주의의 주제로 한정하는 것은 너무 피상적이다. 다만 후자에 대해 부언한다면, 성형수술에 대한 이해는 인간 본성과 인류 문명사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있을 때 가능하며, 성형수술에 대한 비판은 그런 이해를 전제로 할 때 유의미하다는 것이다.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수술로 완벽한 몸을 갖게 된 ‘제니’
‘한나’임을 고백해 영혼의 완성 이뤄 철학적 관심으로 가득한 역사학자 브루스 매즐리시도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기계를 만들게 했는가?”라는 물음에 답하고자 한다. 그는 “불완전한 인간의 완전성에 대한 열망”을 가장 근원적인 이유로 꼽는다. 이 점은 인간의 몸을 통해서도 관찰할 수 있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때론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자신의 육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갖는데, “짐승의 육체에서 벗어나려는 희망은 천사뿐 아니라 기계로도 향한다. 기계가 등장하자, 인간은 기계에게서 육신을 벗어나는 느낌을 얻었다”는 것이다. 천사가 기독교인에게 완전성의 표지였듯이, “기계는 세속적인 사람에게 완전성의 표지”가 된다는 것이다. 이제 매즐리시의 입장을 좀 더 밀고 나가보자. 인간은, 완벽한 기계 장치를 만들려는 노력에서 더 나아가, 한때 천사가 되기를 열망했듯이 인간 자신이 완벽한 기계몸으로 재탄생하려는 열망을 갖는다. 완전함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다. 처음부터 완벽한 요소들로 구성하는 것이 그 하나고, 불완전성을 유발하는 요소들을 고쳐 가면서 완성의 길로 나가는 것이 다른 하나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는 인형이다. 인형은 완성된 기계몸으로 태어난다. 후자의 대표적인 예는 인간이다. 인간은 자연인으로 태어나지만 기계몸으로 완성되기 위해 자신의 결손 부분을 고쳐나가고자 한다. 그런 방법들 가운데 하나가 성형수술이다. 성형(成形)은 완성(完成)을 위한 것이다. 어떤 부분성형이든 그것은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이제 한 번 성형수술을 받은 사람이 계속 성형을 욕망하거나 실제로 지속적으로 수술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은 이유를 이해하리라).
인류 문명사에는 ‘완성의 신화’라는 것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형태로 교묘하게 작동해 오고 있다. 그 다양한 형태들은 서로 전혀 다른 것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것은 철학 사상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다. 저 유명한 플라톤의 이데아는 완전성 신화의 철학적 버전이다. 완벽한 본(本)으로서 이데아에 비추어 이 세상의 불완전한 존재들에게 완성을 위해 영혼을 가꾸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그러니 누가 ‘완성의 신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이제 김용화 감독의 영화로 돌아가 완성의 신화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보자. 이 작품에서 완성의 신화는 이중적으로 작동한다. 쉽게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겹주인공 한나-제니의 변신이다. 자연인 한나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토털 성형을 거쳐 기계몸 제니로 재탄생한다. 이 충격적인 변신은 성형이 완성을 위한 것이라는 걸 한 번에 보여준다. 이중적 작동의 다른 하나는 잘 보이지 않을지 모른다. 그것은 인물에 집중돼 있지 않고, 스토리텔링에 잠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스토리 자체가 완성의 신화가 된다. 잠재해 있던 신화는 영화 전개의 각 단계를 거치면서 서서히 부상한다. 아미는 매력적인 외모와 황홀한 춤솜씨를 갖추고 있지만 노래를 못하는 이른바 립싱크 가수다. 천상의 목소리에 가창력까지 갖춘 한나는 무대 뒤에서 아미를 위해 대창을 한다. 아미의 콘서트는 이런 분업을 통해 인간 감각의 최고의 것들을 종합해냄으로써 ‘완벽한 작품’이 된다. 아미의 경우는 완성의 신화에서 프롤로그에 해당된다. 그것은 주인공 한나-제니가 본격적으로 쓰게 될 신화의 의미를 암시한다. 한나의 성형수술은 서사구조의 차원에서 보면 본편이 아니라 의미 있는 간주곡 정도에 해당된다. 신화의 본편과 대단원은 한나의 영혼을 잃었다가 되찾은 ‘영육이 완벽한 기계몸’ 제니가 모두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니가 쓰는 신화는 결국 한나의 신화다. 제니는 콘서트에서 자신이 한나임을, 그리고 콘서트장에 인형을 들고 찾아온 치매 노인이 아버지임을 고백함으로써 자아를 되찾는다. 결국 진실을 밝힘으로써 자유롭게 된다. 한나의 정체성을 되찾은 제니는 영혼과 육체의 양 차원에서 모두 완벽한 성형을 거쳐 인격체로서 완성된다. 플라톤과 이공학이 악수하는 순간이다. 이에 더해 짝사랑하던 남자의 마음까지 얻게 되고, 가수로서도 성공한다. 한나에서 제니로의 역전에 이은 제니에서 한나로의 재역전이 신화를 완성시켜주는 것이다. 이보다 더 온 몸에 소름 돋게 하는 신화를 쓸 수 있을까? 스토리 그 자체가 완성의 신화인 것이다. 그러니 누가 또 완성의 신화에서 자유롭겠는가? 이 영화를 현대판 신데렐라 이야기로 해석하거나(연관은 있지만 좀 더 복합적인 해석이 필요하며, 신데렐라는 원래 미녀라는 걸 잊지 말라!) 외모지상주의의 주제로 한정하는 것은 너무 피상적이다. 다만 후자에 대해 부언한다면, 성형수술에 대한 이해는 인간 본성과 인류 문명사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있을 때 가능하며, 성형수술에 대한 비판은 그런 이해를 전제로 할 때 유의미하다는 것이다.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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