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막골 사람들의 삶은 그곳을 우연히 ‘방문’하게 됐던 사람들에게나, 이 동화 같은 이야기를 영상으로 감상하는 관객에게나 모두 현실을 반성하게 하는 거울이다. 동막골이라는 이상향의 거울 너머에 비추어진 것은 초라한 우리의 현실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낯선이 반겨주는 열린 공동체
탈국가 통해 ‘사람’으로 회귀
이상향은 ‘인간애’ 기반함 증명
탈국가 통해 ‘사람’으로 회귀
이상향은 ‘인간애’ 기반함 증명
김용석의 대중문화로 철학하기/ 박광현의 <웰컴투 동막골>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토피아의 어원에 따르면 이렇게 답하는 것이 맞다.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은 16세기 초 토머스 모어가 만든 것으로, ‘없는(ou) 장소(topos)’, 곧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역설적인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토피아를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이상향’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또한 존재한다. 장소로서는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상상 속 이야기라는 것을 넘어서 지금부터 논할 또 다른 방식들로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박광현 감독의 <웰컴투 동막골>은 유토피아가 우선 ‘현실을 위한 거울’로서 존재하고, 또한 ‘인간애’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야기의 배경은 1950년 늦가을, 한국전쟁이 치열하던 때다. 미군 조종사 스미스는 전투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부상을 입고 동막골 사람들에게 구조된다. 자군 병력에서 이탈해 길을 잃은 국군 표현철과 문상상은 약초를 캐던 동막골 사람을 만나 이곳에 들어오게 되고, 리수화를 비롯한 인민군 세 명 역시 길을 잃고 헤매다 우연히 마을로 오게 된다. 서로 적군인 그들은 총부리를 겨누고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대치하게 된다.
군인들이 팽팽하게 대치한 상태로 밤을 꼬박 새던 중, 수류탄이 곳간으로 굴러 들어가 폭발하는 바람에 동막골 사람들이 겨울을 나려고 모아둔 식량을 모두 날려 버린다. 군인들은 어쩔 수 없이 임시 화해를 하고 마을 사람들을 위해 감자를 캐는 등 겨울 양식 마련을 위해 일을 하게 된다. 이러는 가운데 그곳 사람들의 순박하고 평화로운 삶에 자신들의 처지를 비춰 보면서 ‘사람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반추하게 된다. 이는 군인들과 마을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축제 한마당을 펼친 날 저녁 스미스의 말에도 잘 담겨 있다. “그래, 이게 진짜 사는 거야!”
깊은 산골의 고립된 마을이지만, 동막골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는 낯선 사람들을 기꺼이 받아 주는 열린 공동체다. 워낙 평화롭게 살다보니 무기가 뭔지도 모른다. 얼굴에 장총을 들이대고 위협을 했던 군인들을 향해 동막골 청년이 시큰둥하게 내뱉은 한 마디는 살육의 전쟁터를 거쳐온 그들의 혼을 빼놔 멍하게 만든다. “뭔 사람이 거 인사를 그따우로 해요? 낯짝에 작대기를 들이대고….” 동막골에 막 발을 들여놓은 순간 자기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란 표현철의 표정은 경이로움을 넘어서는 그 무엇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청년은 또 맥없는 어투로 말한다. “여가 우리 부락 동막골이래요. 저 아이들처럼 막 살아라 해서 붙인 이름이라는데, 그 내막은 내 잘 몰라요.” 그들에겐 이런 동화 같은 삶이 이유 없이 너무 당연한 것이다.
동막골 사람들의 삶은 그곳을 우연히 ‘방문’하게 됐던 사람들에게나, 이 동화 같은 이야기를 영상으로 감상하는 관객에게나 모두 현실을 반성하게 하는 거울이다. 동막골이라는 이상향의 거울 너머에 비추어진 것은 초라한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동막골 이야기도 지금까지의 전형적인 유토피아처럼 현실을 비추어주는 거울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동막골을 위해 특별히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유토피아는 그 어디에도 없으나, 그 ‘없는 땅’에서 나는 약초는 우리의 현실을 치유한다.
그래도 여기서 그친다면 아직 심심하다. 작품을 좀 더 파고 들어가야 유토피아 정신의 묘미를 맛볼 수 있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토피아는 항상 공동체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로부터 모어의 이상향을 거쳐 19세기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구상에 이르기까지 이 점은 한결 같았다. <희망의 원리>라는 대작으로 유토피아 이론을 집대성한 에른스트 블로흐도, “모든 게 공동 소유이다”라는 말은 유토피아의 가장 고결한 표어였으며, “모든 게 공동체적이다”라는 원칙은 유토피아 사상의 ‘전제 조건’으로서 한결같이 내세웠던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웰컴투 동막골>은 역설적으로, 유토피아는 ‘탈(脫)공동체적’일 때 가능하다는 아주 특이한 관점을 제공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탈국가적’ 경험을 통해 새로운 유토피아는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섯 명의 군인들은 모두 자의든 타의든 그들 각자가 속한 국가를 위해 전쟁터에 갔다. 그랬기 때문에 적국의 병사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수류탄으로 위협하며 졸음을 참으면서까지 극단의 대치를 했던 것이다. 그것은 디스토피아의 극치다.
하지만 동막골에서의 짧은 삶을 통해 그들은 국가의 짐을 벗어버린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각자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각자 ‘한 사람’으로 돌아왔을 때, 새로운 협동은 가능했던 것이다. 새로운 협동의 전초전은 바로 거대한 멧돼지 잡기였다. 그들 각자는 마치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멧돼지의 폭력에 저항한다. 이런 행동에는 그 어떤 공동체적 틀의 영향도 없다. 다만 한 사람을 위한 또 한 사람의 ‘인간애’만이 그런 행동의 추진력이다. 이 순간 그들은,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이다’(Homo homimi lupus)라는 인간 집단의 비관적 원칙에서 벗어나 ‘인간은 인간에 대해 인간적이다’(Homo homini homo)라는,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희망적 원리의 실현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인간애로 새로이 건설할 수 있는 유토피아를 위해 위대한 도전에 나선다. 동막골 근처에 추락한 미군기가 적군의 폭격에 의한 것이라고 오인한 연합군이 마을에 대규모 폭격을 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그들은 이에 저항하기 위해 굳게 뭉친다. 그들에게 ‘사람으로서 산다는 것의 의미’를 깨우쳐준 동막골 ‘사람들’을 위해 자신들의 희생을 무릅쓰고 공중 폭격을 다른 곳으로 유도한다. 폭격은 동막골에서 멀리 떨어진 눈 덮인 고원 지대에 가해진다. 자기들 머리 위로 떨어지는 폭탄을 확인하고서 현철과 수화는 마주보며 미소짓는다. 새로운 유토피아는 폭탄이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그 백색의 고원에서 탄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용석/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김용석/영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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