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교육

초등학생까지 짓누르는 ‘시험’의 그림자

등록 2006-12-24 20:30

주순영/삼척 진주초등학교 교사
주순영/삼척 진주초등학교 교사
선생님이 말하는 교실 안팎 /

학기말 시험을 치렀다. 예전과 달리 점수를 주요 기록으로 남기지 않고, 교사가 그저 참고 자료로 쓸 뿐이다. 그러나 아이들과 학부모는 그렇게 단순히 여기지 않는다.

여느 날처럼 아이들이 낸 일기장이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져 있다. 33명 가운데 30명, 주말을 지내고 온 아이들 일기엔 온통 시험 얘기 뿐이다. 목욕탕에 갔는데 온탕에서도, 냉탕에서도, 때를 밀 때도 온통 시험에 대한 걱정을 떨치지 못했다는 동혁이. 잘 쳐야한다는 부담을 갖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동무들과 피시방으로 시내로 여기저기 싸돌아 다녔다는 남규.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서도 총정리 문제집을 펼쳐들고 있어야만 했다는 은주. 텔레비전 드라마 한편을 보면서도 부모님 눈치와 마음의 부담을 떨치지 못했다는 영은이. 동네 아파트에 나와서 노는 아이 한명 없이 조용했다는 소미. 시험에 나오는 문제를 선생님이 학교에서 다 가르쳐줬으면 좋겠다고 쓴 승훈이(시험을 잘 치기 위해 공부를 하는 거니, 아니면 공부를 잘 하기 위해 시험을 치는 거니?). 아이들은 스스로 초등학교 마지막 시험이니까 잘 봐야 한다는 강박감을 갖고 있는 듯 했다.

부모들은 한술 더 떠 아이들에게 온갖 경품을 미끼로 던져 놓았다. 평균 몇 점을 넘으면, 반에서 몇 등을 하면, 경쟁자 누구를 이기면 “손전화를 사 준다”는 약속에서부터 “용돈을 올려주겠다”, “엠피3를 사주겠다”, “컴퓨터 하는 시간을 늘려주겠다”, 심지어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겠다”는 허황된 약속까지. 반대로 성적이 떨어지면 외출 금지, 텔레비전 금지, 컴퓨터 금지, 용돈 깎기, 학원 다시 가기 따위의 여러 ‘협박’이 던져졌다. 자, 이렇게 되니 아이들은 엄청난 시험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이 까칠해지고 우울해지면서 왜 사는지까지 고민하게 되는 거다.

점심시간, 보건실에 잠깐 들렀더니 보건 선생님이 말한다. “참, 초등학교 시험이 뭔지 오늘 아침부터 토하고 체하고 머리 아프고 배 아프다는 애들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몰라요. 다 시험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아요. 1학년에서 6학년까지 아주 골고루 많았어요.”

이틀에 걸친 시험이 엊그제 끝나고, 아이들과 ‘문장 완성 검사’를 했다.

-어리석게도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시험 점수다.)
-다른 가정과 비교해서 우리 집안은 (성적 위주인 것 같다.)
-언젠가 나는 (우리 반에서 공부 제일 잘하는 아무개를 이기고 싶다.)
-내가 잊고 싶은 두려움은 (이번에 친 시험 점수다.)
-무엇보다 좋지 않게 여기는 것은 (시험이다.)
-대개 어머니들이란 (잘 해주다가 성적 안나오면 화낸다.)
-우리 가족이 나에 대해서 (공부 잘하는 것만 밝힌다.)
-나의 가장 큰 결점은 (공부를 못한다는 것이다.)


어떤 물음에도 아이들은 성적 및 공부와 관련지어 문장을 이어 썼다. 시험을 잘 친 아이는 잘 친대로, 못 친 아이는 못 친대로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를 갖고 있었다. 시험 날짜를 알려준 그 순간부터 닷새 내내 일기에 시험 얘기만 쓴 아이도 있었다. 연수는 일기장에 시험이라는 무거운 쇠고랑을 끊고 ‘나의 자유’에 날개를 달아 하늘을 훨훨 나는 그림을 그렸다.

대한민국 강원도의 작은 도시,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에게 ‘시험’의 굴레가 이렇다.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삶의 기운을 불어 넣어주고 싶은데 방법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빈 교실에서 하늘을 본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처럼 무거운 하늘이다. 내 마음 같다. 주순영/강원 삼척 진주초등학교 wnejejr@hanmail.com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