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21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2009 서울국제식품산업전’에 참여한 ‘가야곡 주조’의 남상란 대표(왼쪽)와 그의 둘째아들이자 마케팅실장을 맡고 있는 이준연씨가 술 빚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가야곡 왕주는 가야곡 주조의 대표 상품이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한겨레특집|우리술] ‘가야곡 왕주’ 명인 남상란씨와 아들 이준연씨
이준연(38)씨가 전통주 사업에 발을 담근 건 1997년 12월이었다. 우리나라에 외환위기가 찾아왔던 그때 이씨는 경영학 공부를 하러 미국에 가 있었다. “어머니께서 ‘명인’으로 지정된 게 계기가 됐습니다. 할아버지대부터 양조장을 운영해 어릴 적부터 술 빚는 일이 익숙하기도 했고….” 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가야곡 주조’(www.gayagok.net) 남상란(62) 대표가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기능 보유자(제13호 명인)가 되고 보니 너무 바빠지고 혼자 감당하기 힘들어서 (유학 생활 접고) 오라고 했던 거지요. 술 사업 크게 안 하려고 했는데, 명인 지정을 받자 일이 많아져서 자연스레 (아들이) 같이 하게 된 겁니다.” 남 대표 모자 인터뷰는 ‘2009 서울국제식품산업전’ 기간 중인 지난 11월21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 행사장에서 이뤄졌으며 그 뒤 전화로 몇 차례 보강 인터뷰를 거쳤다. 백제~조선 명성황후 가문 이어온 전통주
모친 남씨가 유학중인 아들 불러 비법전수
아들 이씨 막걸리 프랜차이즈사업도 구상
“나파밸리·이자카야에 왕주 깃발 꽂을것” 남 대표는 1994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식품명인제도’에 따라 지정돼 활동중인 30명의 명인 가운데 한 명이다. 전통주 명인은 남 대표를 비롯해 16명뿐이다. 남 대표 모자가 명맥을 잇고 있는 ‘가야곡 왕주’는 전통주 제조업체인 ‘가야곡 주조’의 대표 상품이며, 유네스코(UNESCO)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종묘대제(조선왕조 역대 임금께 올리는 전통 제례)의 ‘공식 제주(祭酒)’ 자리에 올라 있기도 하다. 왕주의 본래 이름은 ‘어주’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말 쌀로도 술을 빚을 수 있도록 규제가 풀리면서 명성황후의 친정인 민씨 집안에서 곡주와 약주를 접목한 독특한 술을 만들어 왕실에 진상돼 어주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 민씨 집안의 일원이 남 대표의 외할머니(민재득)였고, 어머니(도화희)를 거쳐 남 대표로 전수됐다. “딸이 있었다면, 당연히 딸에게 물려줬을 텐데, (슬하에) 3형제뿐이라 어쩔 수 없이 아들(둘째인 이준연씨)에게 전수하는 것입니다(웃음).” 가야곡 주조의 마케팅실장직을 맡고 있는 이씨의 명함에는 ‘기능전수자’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어주 만들기 노하우를 일찌감치 터득한 남 대표는 21살에 결혼을 하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시집이 충남 논산의 막걸리 양조장 집안이었다. 남 대표의 표현대로 ‘참으로 질긴 술 인연’이었다. 한때 번창하던 시집의 막걸리 양조장은 1970년대 들어 곤경에 빠졌다. 맥주와 소주가 주류 시장을 파고들기 시작한데다 정부에서는 주식인 쌀 부족 사태를 막는다며 밀가루로만 막걸리를 만들라고 제한하던 때였다. “밀가루로 막걸리를 만들게 되니 제대로 맛을 낼 수 없었고, 소비자들로부터 외면을 받게 된 겁니다. (농민들이) 새참으로 열말, 스무말씩 받아 먹고 했는데, 소주·맥주에 (손님을) 다 뺏겼지요, 뭐.”(남 대표) 정부 규제 탓에 막걸리 장사가 어려워지자 남 대표는 어려운 고비를 넘기기 위한 목적으로 고급술을 만들어볼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대여섯살 때부터 외가에서 외할머니께서 술 빚으시는 걸 봤고 그 기억을 살려낸 것입니다. 술 이름을 어주보다 쉬운 ‘왕주’로 바꾼 게 그때였습니다.” 남 대표의 집안은 1990년 논산 가야곡면 육곡리에 있던 약주공장을 인수해 왕주 생산에 본격 나서게 된다. 술 이름에 ‘가야곡’이란 지명이 붙은 계기였다. 맏아들을 두고도 둘째를 왕주의 전수자로 선택한 데 대해 남 대표는 “첫째는 착한 선생님 스타일”이라 장사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사업하려면 장사꾼 기질이 있어야 합니다. 착하기만 해서는 (사업을) 못 합니다.” 다행히 둘째는 사업가 기질이고, 사업을 잘하는 것 같다고 남 대표는 자랑했다. 가야곡 주조는 올 들어 많은 변화를 겪고 있으며 그 중심에 이 실장이 서 있다. 가야곡 주조는 올해 4월 들어 주식회사 체제로 바뀌었다. 이 실장은 “외부 자금을 끌어들여 사업을 더 키워보고자 하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돈을 댄 쪽은 지역민들이라고 한다. 이 실장은 사업에 뛰어든 뒤 가장 어려웠던 때를 2003~2004년으로 기억했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체결(2003년 2월) 뒤 와인 가격이 싸졌고 이에 따른 와인 바람으로 비슷한 도수의 전통주가 적잖은 타격을 입었다. 이 실장은 “요즘 와인 바람이 주춤해진 틈에 전통주가 활기를 띠는 것을 봐도 전통주와 와인은 완전히 대체 관계인 것 같다”고 말했다. “와인 바람이 불 당시 술병 디자인을 새롭게 하고, 도자기·유리병 선물세트로 만들어보기도 했는데, 솔직히 역부족이더군요.”
‘왕의 술’ 그 맛이 황공하오
가야곡 왕주는 백제인의 얼 담긴 곡주에 약초 더해 100일 익힌 술 충남 논산 가야곡면 지역의 전통술이다. 찹쌀, 누룩, 야생국화, 구기자, 참솔잎을 넣고 100일 동안 익혀 은근하게 약초 내음이 난다. 가야곡 왕주를 빚고 있는 ‘가야곡 주조’에 따르면 왕주는 백제시대 때부터 전해 내려온 술로 백제인의 얼과 한이 담긴 전통의 술이다. 본래 곡주였는데, 조선 중엽 곡류로 술 담그는 것이 규제되자 산에서 캔 약초를 이용해 술을 담그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말 곡주 규제가 완화되고 나서 명성황후의 친정인 민씨 집안에서 곡주와 조선 중엽 성행했던 약술을 접목시켜 빚은 것을 왕실에 진상했다고 해서 가야곡 왕주는 ‘궁중술’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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