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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희한한 진보의 시대가 흘러간다

등록 2006-01-19 19:39수정 2006-01-20 15:33

희대의 사건으로 일상이 실종되는 틈을 타
또하나의 ‘국익’을 빌미로 통과된 파병연장안
정말이지 더는 세금을 내고 싶지 않다
간접세라도 단 한푼 파병에 쓰고 싶지 않다
세설

우울한 세밑과 새해 첫머리였다. 황우석 사건으로 연일 떠들썩한 가운데 이 희대의 사건 안팎에 과잉된 국가주의적/자본주의적 희/비극성이 전염시켜놓은 비현실감으로 하루하루의 일상이 실종되는 듯한 느낌마저 들곤 했으니까. 티브이건 라디오건 신문이건 거의 모든 매체들에서 하나의 사건을 향해 쏟아져 나온 말들이 젖은 장화 속처럼 찔꺽이며 진실공방을 벌이는 동안 우리 같은 장삼이사들도 모이기만 하면 어느 편인가를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거나 지탄의 손가락을 들어 보여야 하는 피곤한 날들이었다. 누구나 할 말이 있었고 어떤 말도 진실은커녕 사실에조차 가 닿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뒷덜미가 휑한 날들. 화젯거리 뉴스에 밀려 서둘러 주변부로 밀려나 잊혀지는 사건들도 많아졌다. 이 어수선함 속에서 ‘복 많이 받으라’는 이 계절의 덕담도 왠지 데면데면해져 버렸다.

죽어간 농부들의 탄식이 귓전인 듯 생생하게 언땅을 배회하고 있지만 한 개인이건 나라건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 농업의 미래는 대책 없어 보일 정도로 방치되어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오늘도 불안하게 거리를 떠돌고 거동이 불편한 50대 아들을 홀로 돌보던 가난한 80대 노인은 헌옷가지를 태워 추위를 피해 보려다 불타 죽기도 했다. 덕담을 주고받는 세밑에, 이라크 파병연장 동의안이 날쌔게 처리되는 것을 무력하게 바라보아야 했고 문득 이라크의 아이들과는 어떤 덕담을 나눌 수 있을까 부끄러워해야 했다. 파렴치한 전범국의 동맹군 국민이 된 치욕은 한겹 더 두터워졌고 속죄의 가능성으로부터는 한발 더 멀어졌다. 물막이 공사만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새만금은 결국 사업 추진 판결이 났고, 2000년대식 개발지상주의의 첨병인 고속철 문제와 뭇 생명의 공생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던져주었던 천성산은 개발독재시대에 그러했던 국책사업의 관행으로부터 한발짝도 진보하지 못한 채 죽어간다.

대한민국 현대사에 있어 가장 개혁적이고 참여적인 정부임을 자처하는 정권이 들어선 지 꽤 되었지만 정부를 포함한 위정자들에게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반전/평화/생태적 비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뼈아픈 확인을 하며 또 한 해가 갔다. 화려한 말잔치 속에 ‘국익론’이면 부도덕한 전쟁의 동맹군이 되는 것이 타당해지는 희한한 진보의 시대가 흘러간다. 좀 엉뚱한 고백이지만, 나는 정말이지 더 이상 세금을 내고 싶지 않다. 거의 모든 물건들에 간접세의 형태로 지불하는 세금 중 단 한푼이라도 이라크 파병을 위한 예산으로 사용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 나라 도처에서 불필요하게 파헤쳐지는 산하와 그 무수한 도로 공사의 소음들과 살아있는 개펄을 강제로 메워 죽이는 새만금 공사 같은 끔찍한 재앙에 내게서 걷어간 세금이 포함되어 있을지 몰라 불안하다. 당면한 민생 현안에 수수방관인 채 정치적 계산으로 속내 복잡한 국회의원들에게는 내가 낸 세금의 한푼이라도 월급으로 줄 생각이 전혀 없다. 공동선의 가치에 기여하기는커녕 눈먼 뭉치돈으로 전락하기 일쑤인 세금들 속에 내가 낸 돈이 있을까봐 겁난다.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물건들에 따라붙는 간접세를 회수해, 적절한 값에 물건을 사고 나머지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곳에 기부했으면 좋겠다. 강제징수가 아니라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는 일에 자발적으로 돈을 쓰고 싶은 욕망. 이 역시 내가 내는 세금이 내가 수긍할 수 있는 곳에 사용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신뢰란 이렇게 중요하다.

왜 정치판에만 가면 괜찮던 사람들이 죄다 저렇게 되지? 라는 오래된 우문은 이미 스스로 답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새해 첫머리. 어수선한 세밑을 지나며 몹시 우울해하던 한 벗과의 술자리에서 우리는 이런 덕담을 나누었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그람시가 껴안아야 했던 고뇌와 절망의 무게를 애써 가벼운 쪽으로 밀어올리며 오랜 벗과 나눈 술자리 덕담이 덕담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나라가 편안해야 개인의 삶도 부채의식 없이 편안할 수 있는 것이니, 정치판의 실세들에게는 지방 향교에서 한문을 가르치는 아버지가 즐기는 논어의 한 구절을 덕담으로 인용해 봐도 좋겠다. “자공이 정치에 관해 물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정치란 경제, 군사, 그리고 백성의 신뢰이다. 자공이 묻기를- 만약 이 세가지 중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하겠습니까. -군사를 버려라. -만약 그 나머지 중에 하나를 버리지 않을 수 없다면 무엇을 버려야 하겠습니까. -경제를 버려라. 예부터 백성이 죽는 일을 겪지 않은 나라가 없었지만, 백성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나라가 설 수 없는 것이다.”

김선우/시인
김선우/시인
내가 기억하는 최악의 덕담은 “부우자 되세요오~”다. 어느 해인가 한 광고에 등장해 히트를 친 이 말이 급기야 세밑과 새해 첫머리의 덕담으로 자주 이용될 때마다 뒷자리가 슬펐다. 부자 되는 일을 마다할 거야 없지만, 부자가 되는 것의 결과가 흔히 무언가 더 많이 소유할 수 있는 소비의 능력에 바쳐진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자신의 부가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알고 함께 나누고 누릴 수 있는 정말 ‘멋진’ 부자들을 가져 보지 못한 사회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하긴 부자가 ‘멋져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으면 성경에도 낙타와 바늘구멍의 비유로 애도했을까. 하여간 부자를 욕망한다면 기왕이면 멋진 부자를 욕망하면 좋겠고, ‘덜 갖고 덜 소비하고 더 많이 존재하고자 하는’ 반자본주의적인 욕망도 함께 번져 가면 좋겠다. 이번 구정엔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말고도 복 많이 ‘짓자’는 덕담이 설왕설래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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