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생의 탁발자인 것을…
한 존재 살기 위해선 반드시 뭔가 빌려야 하고
산들이 뚫리고 개펄이 망가지면
인간의 마을도 결코 성할 수 없는데
우리의 오만을 대속하는 지율스님은 어디에…
세설
12월에는, 무슨 일인가에 열중하다가도 불현듯 멍해질 때가 종종 있다. 아, 벌써 12월이구나,에서 출발하는 상념이 많아지기 때문일 게다. 그렇게 멍하니 먼 하늘을 바라보게 될 때, 첫눈과 종소리를 생각하곤 한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설렘은 어쩌면 이다지도 빛 바래지 않는 두근거림인지. 눈이 많은 고장의 사람들도 첫눈만큼은 설레며 반기는 것을 보면, 모든 사람의 기억창고에는 ‘첫방’이 있을 것 같다. 첫사랑, 첫돌, 첫아기, 첫출산 같은 처음도 그렇지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유년의 과거 속에서 처음 만져본 흙의 느낌, 처음 바라본 하늘의 느낌, 처음 보게된 꽃의 느낌, 이런 것들이 한 인간의 무의식 깊은 곳 ‘첫방’ 속에 오롯이 들어있을 것 같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가지 못할 연약한 목숨으로 지상에 막 부려진 한 생명체인 내가 첫걸음마를 걸은 바로 그 순간의 기억도 ‘첫방’ 속에 있을 것이다. 대지에 대한 첫감각 같은 것. 그런 첫것들이 일상 속에서 부대끼며 때로 비틀거릴 때, 우리를 일으키고 부축해주는 힘인지도 모른다. 대지를 처음 밟던 첫감각으로 일어나 앞을 보라고. 처음 본 꽃에 이끌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꽃을 만지고 냄새 맡던 그 첫감각으로 일상의 남루함 속에서도 아름다운 끌림들을 만들어 가라고.
올해의 첫눈은 풍염하고 아름다웠다. 첫눈 소식에 들떠 길 위로 나선 나는 조그만 지방 도시 외곽의 산자락 속에서 첫눈을 받아 먹었다. 눈도 너무 잦으면 나무들도 고되긴 마찬가지지만 첫눈을 얹는 겨울나무들은 사람들처럼 촉촉했다. 흰눈을 동그마니 얹은 소나무 밑에 가만히 주저앉아 오랫동안 범종소리를 들었다. 두어 살의 내가 처음 범종소리를 듣던 날 흰눈이 저처럼 내리지 않았을까. 그날이 마침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본 눈 오는 날이었는 지도 모른다. 어느 조그만 절집에 불공을 드리러 간 엄마 등에 업혀 새까만 눈을 끔뻑거리며 흰눈 속의 종소리를 듣고있는 어린 아기인 나에게 안녕? 누군가 인사를 해주었다. 하염없이 눈이 내리고… 안녕? 또 누군가 소나무 밑으로 걸어 들어오며 내게 인사를 하였다. 커다랗고 맑은 눈이 개울물처럼 반짝거리는, 약간 마른 듯한 여자아이.
그 여자아이는 산속 여기저기에 귀를 대고 다녔다. 이끼 앉은 바위며 나무둥치며 풀더미에 바싹 귀를 대고 무언가 듣고 있다가 배시시 웃었다. 산고양이에게 들킨 아기도롱뇽을 구해 물푸레나무 잎사귀 위에 올려놓아주고, 산고양이에게는 도토리며 산수유 열매를 따주며 “미안.” 하였다. 아이에겐 산 속의 작고 여린 것들이 다 어머니고 아기였다. 약한 것들은 약한대로 강한 것들은 강한대로, 저마다의 시간에 최선을 다해야만 겨우겨우 살아갈 수 있는 생의 탁발자들이다. 한 존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언가를 빌려야 한다. 탁발해야 한다. 먹고 입고 깃드는 것이 다 그렇다. 뭇생명의 공동체인 산 속에는 혹독하고 엄정한 산의 법이 있고 동시에 공생의 지혜가 있다. 산은 뭇생명들의 어울림이 만들어내는 생명의 에너지로 산 밖의 것들을 또한 기른다. 우리는 숨 쉬는 공기의 가장 청정한 몇 모금을 언제나 산에 빚지고 있으며 마시는 물 또한 그렇다.
이 조그만 나라의 처처에서 산들이 구멍 뚫리고 무너지며 개펄이 망가지고 물길이 닫히는 것을 얼마나 종종 보아왔는지. 저마다의 뭇생명 공동체들이 회복 불가능하게 망가져갈 때 인간의 마을도 결코 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무지를 무어라 이름해야 할까. 전지구적인 이상기후의 징후가 점점 더 가시화되고 있는 이때에도 우리는 정말이지 너무나 무감하다. 두렵고 두렵다. 바싹 야윈 두손을 모아 기도하는 여자-아이를 본다. 우리의 무감과 무지와 오만을 속죄하는 구도자를 본다. 그의 야윈 몸피가 벼랑 끝에 걸린 한 점 바람으로 아주 간신히 이 생에 머뭇거리고 있음을 느낀다. 손을 내밀어도 잡을 수 없을지 모른다. 너무 늦은 것이 아니기를 간절히 소망하지만 이미 늦었는 지도 모른다. 늦었다고 그이가 타박하지는 않겠지만 정말로 늦었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빚과 크나큰 참회를 가슴에 품어야 할지 모른다. 안녕? 첫눈이군요… 네. 스님. 첫눈이예요.
그랬다. 산 속에서 첫눈을 받아 먹으며 나는 지율스님을 떠올렸다. 간절했고, 아팠다. 안녕? 산 속의 여린 것들에게 일일이 눈 맞추고 인사하면서 첫눈 속의 천성산을 날 듯이 걷고 있어야 할 지율스님은 지금 천성산에 없다. 그이가 자신의 몸과 바꾸려는 것들은 여전히 눈물겹게 아름답지만, 세상은 그 여린 것들의 아름다움이 결국 우리를 지켜줄 마지막 생명줄임을 여전히 모른다. 모른 체 한다.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환경영향평가라는 기본 절차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사업을 진행하려 한 것이 천성산 갈등의 핵심이다. 정부는 면피용 약속을 해왔지만 결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목숨을 내놓은 지율스님의 100일 단식 끝에 얻어낸 천성산 민관공동조사에도 불구하고 관측 조사단의 말 바꾸기 행태는 여전하고, 천박한 언술로 왜곡된 사실이 유포되고, 국책사업 지연에 따른 몇십조원의 혈세 낭비 운운의 산술적 통계수치에 양은냄비 속 같은 여론은 물신의 유령들을 끌고 몰려다닌다. 지율스님에 대한 기사를 클릭했다가 댓글들을 보고 너무나 끔찍했던 기억이 내게도 이처럼 선명한데, 그이는 인간의 말에 맞아 먼저 아팠으리라.
말로 지은 죄들을 다 어찌 감당하려고 약속의 말은 비굴하게 버려지고 익명 공간에서의 우리의 말들은 갈수록 끔찍해져 가는 걸까.
첫눈 오는 나무 밑에서 세상 가득해져 오는 범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 순간이 올해도 내게 허락되었다. 감사하다. 종소리에는 빈부귀천이 없어 종소리를 받아안는 지극한 마음으로 다만 족하다. 종소리로 쏟아지는 저 여리고 습한 물의 꽃들을 받아먹으며 불현듯 나무 밑으로 걸어오는 지율스님을 뵈었다. 실제로 뵌 적 없는 지율스님의 바싹 마른 두손을 잡고 참회가 깊어가는 겨울 오후다.
김선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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