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한 젓가락에도 오롯이 녹아 있는
대지의 인내와 농민의 시간들
먹거리 앞에서 좀더 겸손해진다면
서로가 서로를 귀하게 보살피게 될텐데
세설
김장을 했다. 대관령에 첫눈 소식이 있던 소설 무렵이었다. 김장을 하러 모이는 소설 무렵의 고향 느낌은 조금쯤 각별하다. 긴 겨울나기에 들어서는 첫 번째 추억의 문으로 어린 날의 김장 날이 있었기 때문일까. 가난했지만 일곱 아이들이 잘 자라준 건 밥 힘, 김치 힘, 고추장 된장 힘이라고 어머니는 믿고 계신 듯하고 나도 별 이의가 없다. 김치 한가지만으로도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기에 부족함이 없던 시절이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마칠 때만 해도 매년 이백포기씩 김장을 하곤 했지만 지금은 절반 이상 양이 줄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김장은 1박 2일이 꼬박 걸리는 큰 일이다.
고추를 하나하나 깨끗이 닦아 말려 고춧가루를 만들고 각종 젓갈과 무, 갓, 미나리, 파, 생강, 마늘 등의 김장 속을 틈틈이 준비하는 데 들이는 노력까지 생각하면 김장을 위해 들이는 품은 시간 단위로 환산할 수 있는 범위를 훌쩍 넘어선다. 김치며 장, 젓갈 등의 우리 음식에 스며있는 시간이란 게 대개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김치는 다양한 종류의 먹거리들이 더불어 살 비벼 섞여야 이루어지는 특별한 음식이다. 김치 한 젓가락을 집어 입 속에 넣을 때, 모래알보다 작은 씨앗 하나에서 싹 틔우고 꽃 피워 꽉 차게 자라준 각종 식물들이 거느린 대지의 시간들과 최소 여섯 달을 삭힌 젓갈류가 잘박거리며 풍기는 바다의 시간들이 우리 몸속으로 함께 들어오는 느낌. 잘 익은 김치를 찢어 아이들이나 노인들의 밥숟가락 위에 올려줄 때 가끔 나도 모르게 입이 헤 벌어지며 오감이 골고루 흐뭇해질 때가 있는 것처럼, 음식이란 공경과 함께 대해야 하는 우리 삶의 밑자리다. 먹어야 생존할 수 있는 존재인 한, 먹거리는 생명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배추를 절이고 시간 맞춰 뒤집어주고 씻는 과정엔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 해에 쓰이는 배추와 소금의 성질에 따라 조금씩 시간이 달라지지만, 어떻든 배추가 스스로 자기 몸의 수분을 조절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재료 스스로의 변화를 기다리지 못하고 서둘러 숨을 눌러놓은 배추는 틀림없이 맛이 떨어진다. 김장 하는 일은 배추를 절이는 초입부터 능동적인 기다림의 과정을 가르치며 일종의 ‘먹거리에 대한 예의’를 요구한다. 언제든 필요하면 간편하게 돈 주고 사먹을 수 있는 먹거리 ‘상품’에 익숙해진 도시인들은 우리가 먹는 것이 살아있는 것에서 온다는 것을 자주 잊는다. 식탁에 밥과 김치가 오르기 위해 한 해의 농사가 필요하다는 자명한 사실을 잊는다. 돈만 있으면 언제든 값을 비교해 사먹을 수 있는 상품이 되어버린 농산물들이 상품가치 이전에 그보다 더 근원적인 생명에 관여한다는 것을 자꾸 잊는다.
배추 속을 버무리며 굴 쌈을 먹는 떠들썩함 한쪽에선 티브이 속의 농민 시위 장면들이 슬픈 음화처럼 흘러갔다. 칠순의 부모님이 자주 한숨을 쉬셨다. 그분들은 쌀 비준 동의안이 뭔지, 비준 동의안이 처리되고 나면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구체적인 세목을 모르신다. 하지만 격렬한 농민 시위를 보며 한마디씩 하신다. 우리가 밥 힘으로 사는 사람들인데 우리 쌀을 못 지키면 어쩌자는 거냐 하신다. 우리 농민들 다 죽이고 수입 쌀값 왕창 올라버리면 그 땐 어쩌려는지 모르겠다고 한숨이시다. 나이 든 부모님은 미국을 비롯한 패권국 중심의 각종 국제협약들이 강요하는 이기적 폭력성과 무시무시하게 ‘세계화된’ 신자유주의 시장 논리가 전세계의 빈익빈부익부를 어떻게 가속화시키고 있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신다. 그럼에도 그분들의 안타까움은 핵심에 닿아있다. 핵심으로 이끄는 힘은 단순하다. 사람에 대한 진심 어린 연민과 생명이 무엇으로 유지되는지, 먹거리에 대한 공경을 몸으로 아신다는 것. 낟알에 불을 붙이는 농부들을 보며 두 노인네가 기어코는 글썽이신다. 에구, 저 자식 같은 것을! 저 마음이 오죽할꼬!
김장 무렵, 쌀 협상 비준 안이 강행 처리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줄곧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말을 떠올렸다. 피 같은 나락을 불태우고 단식과 자살을 하면서까지 막으려 했던 쌀 비준 문제에 대한 농민의 입장과 요구가 무엇인지 어찌하여 최소한의 ‘민주적’ 의사수렴 절차의 ‘예의’조차 지켜주지 못하는지, 농민의 의견을 먼저 성실히 들어야 하는 것이 이 문제의 일차적 당사자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 예의가 아닌지 따져 물어도 실은 공허하다. 여전히 농민들의 절망은 브라운관과 신문지상에 파편적인 이미지와 울분으로 떠돌고 있고, 농민들과 함께 진지한 협의기구 한번 만들어보지 않은 채 비준 동의안을 밀어붙인 정부와 국회의 오만함에 대해 더 이상 절망하고 싶지도 않다.
대신 나는 정치하는 사람들이 매년 김장 김치를 손수 담가볼 것을 진심으로 권하고 싶다.
기다림과 견딤과 느림 속에서 생명의 풀기를 얻은 먹을거리들이 어떤 경로를 거쳐 우리의 몸을 섬기게 되는지, 우리가 먹을거리 앞에서 얼마나 겸손해져야 하는지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우리 사회가 좀더 단순하게 행복해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귀하게 보살핌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내친 김에, ‘김장 귀성’ 같은 것은 어떨까. 명절 후유증을 두려워하면서도 추석과 설에 너도나도 꽉 막힌 도로 위로 밀린 빚 갚듯 한꺼번에 나설 것이 아니라, 입동에서 소설 무렵 전후의 이십여일 정도에 자유롭게 ‘김장 휴가’를 받을 수 있다면! 초겨울의 시작 무렵이니 부모님 보일러도 살펴 드리고, 1박 2일이 꼬박 걸리는 일을 식구끼리 천천히 즐기면서 ‘먹거리에 대한 예의’도 배우고, 김장독에 일년치 건강식을 잘 묻어두고 근처의 이웃들과 나누기도 하면서 겨울나기의 첫 추억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김선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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