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아, 아 사람아! 세설
한쪽엔 굶다가 개에 물려죽은 소년이 있고
한쪽엔 천문학적 불로소득 누리는 자 있고
가난한 사람 돕는 이는 가난한 사람들
사람이 사람인 이유 어디에 있을까
세설
아홉 살 소년이 혼자서 비닐 하우스에서 살다가 개에게 물려 죽었다고 한다. 21세기 한복판, 휘황한 소비의 물결이 화려하고 장려하게 그 위용을 자랑하는 세상에서, 마치 짐승처럼…. TV를 켜면, 신처럼 아름다운 사람들이 신처럼 아름다운 옷을 입고 천국처럼 아름다운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아이는 굶다가 개에게 물어뜯겨 죽었다. 개가 아이를 질질 끌고 다닌 흔적도 있다고 한다. 그래도 되는 것일까.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어도 되는 것일까. 아이는 이혼한 부모에게 버림받고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맡겨졌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는 먼 곳에서 농사짓느라고 아이를 돌보지 못했다고 한다. 주말에 할머니가 들러 밥을 해놓고 가면, 아이는 혼자서 밥을 챙겨먹고 개밥도 주면서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그 개가 소년을 물어 죽였다는 것이다.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두려운 참혹한 일이다. 이럴 때 나라라는 건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일까.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최소한의 안전장치조차 확보해줄 수 없는 나라라면, 그것을 나라라고 불러야 할까? 참담하고 끔찍하다.
양극화의 골은 나날이 깊이 파이고 있다. 이 비극은 한국 사회가 이제 더 이상 가난한 나라가 아니며, 세계 10위 권의 경제대국이라는 사실 앞에서 더욱 비참하게 느껴진다. 부자들은 점점 더 부자가 되어 가고 있고,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더 가난해져 가고 있다. 그런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말조차 사치스럽게 들린다. 절대적 빈곤층은 여전히 두껍게 존재한다. 어떻게 해도 가난의 사슬을 빠져나올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제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사슬의 고리는 점점 더 안으로 깊이 깊이 조여들어 간다. 그들에게 사방은 마치 안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철문과 같다. 문은 자꾸 안으로 밀려 들어온다. 도망갈 기회도 없고, 도망갈 기력도 없다.
그런가 하면, 한쪽에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부동산 투기를 해서 천문학적으로 불어난 돈이 돈을 벌고 또 벌고, 점점 더 번다. 그러나 부자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가 터졌을 때, 우리 착한 국민들은 너도나도 금붙이들을 모아 급한 불을 끄는 데 썼다. 그때 부자 동네의 참여율이 가장 적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어쩌면 평소의 그런 냉혹한 마음 때문에 부자가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정작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뿐이다. 재벌들은 몇 백 억씩 정치권에 뇌물로 갖다 바칠 돈은 있어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돈은 없다. 대형 교회들은 일 주일에 몇 십억씩 연보를 받으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인색하기 그지없다. 신자들에게는 십일조를 강권하는 대형 교회들이 가난한 이웃을 위해 쓰는 돈은 신자들이 바친 돈의 채 몇%도 되지 않는다. 부자들은 세금이 조금만 올라가도 정부를 저주하고 좌파로 몰아붙인다. 보수 언론들은 부자들의 그런 심리를 계속 부추긴다.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그가 지성을 가지고 있고, 도구와 말을 사용할 줄 알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그가 사익에 앞서 공익을 추구할 줄 아는 존재, 즉 윤리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윤리적 능력은 종의 유지를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한 능력이다. 윤리적 가치 판단을 경시하는 힘센 자들만이 살아남는다면, 경쟁은 점점 더 격화될 것이고,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지구는 완전히 먹고 먹히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오늘의 정복자는 내일의 노예가 될 것이다. 세계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안한 싸움터가 되어버릴 것이다. 따라서, 함께 잘 살기 위한 노력은 부자들에게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하다. 많이 가진 사람들은 당연히 사회에 더많은 기여를 해야 한다. 공동체 전체가 불안 요인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약한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줄 최소한의 발판이라도 만들어 두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그야 말로 오블리제(강요)되어야 한다. 그 룰을 따르지 않는 부자들한테는 노블레스를 누릴 자격을 제도적으로 박탈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대단히 이기적인 동물이다. 아무리 당위적 명제를 내걸고 호소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다. 따라서 양극화 해소는 도덕심에 호소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며, 어떤 특별히 윤리적인 개인들의 탁월한 개인적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사회제도의 변화로써만 해결할 수 있다. 따라서 공동체의 최고 직능 단위인 국가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보장 제도들을 정비해야만 한다. 그것은 국가가 존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 관해서 사회적 합의가 강하게 뒷받침되지 않으면, 정부는 힘차게 제도화를 추진할 수 없다. 더군다나 정책 문제를 사사건건 이념 논쟁으로 몰고 가는 사회 분위기 안에서는 더더욱 어렵다.
현재 우리 나라의 사회보장 제도는 거의 세계 최하위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을 당장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점차적으로라도 올려나가려면, 엄청난 재원이 필요하다. 따라서 국민들이 어느 정도는 세금에 관해 마음을 열어두어야 한다. 사회보장 제도가 발달되어 있는 서구 각국의 세금 비율은 우리 나라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다. 어느 정도 세금이 올라가는 한이 있더라도, 사회가 안정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장치를 만들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주지 않으면 양극화 문제는 영원히 해결이 불가능하다. 결국 언제라도 또 다른 어린 아이가 비닐하우스에서 개에게 물려죽는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그가 지성을 가지고 있고, 도구와 말을 사용할 줄 알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그가 사익에 앞서 공익을 추구할 줄 아는 존재, 즉 윤리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윤리적 능력은 종의 유지를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한 능력이다. 윤리적 가치 판단을 경시하는 힘센 자들만이 살아남는다면, 경쟁은 점점 더 격화될 것이고,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지구는 완전히 먹고 먹히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오늘의 정복자는 내일의 노예가 될 것이다. 세계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안한 싸움터가 되어버릴 것이다. 따라서, 함께 잘 살기 위한 노력은 부자들에게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하다. 많이 가진 사람들은 당연히 사회에 더많은 기여를 해야 한다. 공동체 전체가 불안 요인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약한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줄 최소한의 발판이라도 만들어 두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그야 말로 오블리제(강요)되어야 한다. 그 룰을 따르지 않는 부자들한테는 노블레스를 누릴 자격을 제도적으로 박탈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대단히 이기적인 동물이다. 아무리 당위적 명제를 내걸고 호소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다. 따라서 양극화 해소는 도덕심에 호소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며, 어떤 특별히 윤리적인 개인들의 탁월한 개인적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사회제도의 변화로써만 해결할 수 있다. 따라서 공동체의 최고 직능 단위인 국가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보장 제도들을 정비해야만 한다. 그것은 국가가 존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 관해서 사회적 합의가 강하게 뒷받침되지 않으면, 정부는 힘차게 제도화를 추진할 수 없다. 더군다나 정책 문제를 사사건건 이념 논쟁으로 몰고 가는 사회 분위기 안에서는 더더욱 어렵다.
김정란/상지대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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