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조작의 진실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원천기술 존재유무 급하게 단정지으려는 언론
몇개월 시간 주면 되는데 왜 급하게 구나
내가 황빠로 보인다면 자신은 황까가 아닌지?
세설
1.
여태 줄거리는 생략. 최근 상황만 보자. 논문조작 이슈로 출발한 본 사태, “줄기세포 없다”는 절규 한 방에 의제, 대반전된다. 오. 이 역설. 너는 죽고 나는 꼭 살겠다는 이 필살의 폭로가, 철썩 같이 믿었던 것이 완전 부정될 때 붕괴되는 자신의 내적질서를 유지하려는 사람들 방어기제를 자극, 오히려 일거에 국면을 전환시킨다. 조작은 했더라도, 원천기술만 있어다오.
이 사태를 바라보던 대척의 두 시각, 이 새로운 전선서 다시 격돌한다. 그럼에도 절대퇴출 vs 그렇다면 기회제공. 전자, 대체로 이성적 논리적이다. 신뢰를 생명으로 하는 과학계에서 이제 그는 끝났다. 퇴출의 본질은 논문조작. 황우석은 대체가능하다니까. 후자, 사태 초기 애국주의로 질타되었던 감정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혐의 짙다. 대체로 온정적 감상적이다. 내동이 치기엔 아까와 너무 속상해. 씨바.
2.
이 사태 본질, 논문조작, 맞다. 설혹 음모론 사실로 판명 나더라도 황 교수 책임, 줄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황우석 사태는 과학적 오류의 문제를 넘어선지 오래다. 이건 언론사태다. 모든 언론들이 제각각 써댄 상상의 대본으로 포탈메인 화면에 의해 실시간 연출되고 있는 21세기형 언론 쌩쇼. 지금 언론, 미쳤다. 그 외 모든 표현, 적확하지 않다. 미쳤다. 단위기간 내 이렇게 많은 ‘사실무근’이란 단어를 매체에서 접할 기회는 평생 다시 없을 것, 자신 있게 단언하는 바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내 배를 내가 좀, 째겠다. 더불어 그 사실무근들이 아무리 기다려도 어찌된 연유로 기사화되었었는지에 대한 단 하나의 해명기사도 앞으로 볼 일 없을 것, 역시 단언하는 바다. 기자들의 취재 수순, 그것이 알고 싶다. 아니 꼭 알아야겠다. 3. 소설과 기사의 양식 경계를 단숨에 붕괴시킨 이 인문학적 성취는, 전인민의 신춘문예 추리소설부문 집단등단을 목표로 한 국가단위의 교육시뮬레이션 훈련이 아니라면, 미친 게 확실하다. 아무 것도 확실치 않으나 무엇이나 써댄다. 이건 기사작성이 아니라 저술활동이다. 팩트는 겨우 한 줄인 정보총량으로 영롱이고, 스너피고 마구마구 걸고 나자빠진다. 그 덕에 사람들은 갈팡질팡, 모든 프로세스는 뒤죽박죽. 가장 먼저 사기꾼으로 불린다. 논문이 철회된다. 그리고 조사가 시작된다. “일부 인정했다”는 뭘 일부 인정했는지, 내용 없는 중간발표에 황 교수 사직한다. 그리고서야 원천기술 인정범위 논한다. 그런데, 아직 조작에 관한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순서가 대체 이게 뭔가. 논의의 절차와 판단의 순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왜곡되고 말았다. 이 혼란, 스스로 감당할 범주를 벗어나 007 살인면허 자체 발급한 언론 탓, 절대적이다. 잘, 모르겠거든, 제발, 닥치고 있자. 4. 피디수첩 취재윤리 논란, 호들갑이었다. 사회고발프로 속성 자체가 폭력적이다. 윽박지름과 몰래카메라로 만들어진다는 거,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사학비리 재단이사장도, 사이비 종교 교주도, 비리 공무원도, 그들 개인에겐 취재의 함정과 카메라의 폭력성 있어 왔다. 하지만 그렇게 얻어지는 공적이득이 사적피해를 충분히 상쇄 한다 여긴 우리, 그 폭력 사실상 묵인 방조해왔다. 왜 이번에만 예왼가. 주인공이 달랐다. 취재윤리논란은 주인공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았던 모두의 바람과 핑계와 명분이었다. 상식은 때로 그렇게 감상적이다. 그 상식의 저항을 뚫고 임무 수행한 피디수첩, 박수 받을 만하다. 그럼에도 피디수첩에 할 말 있다. 첫 방송, 취지, 옳다. 그러나, 생명윤리가 진정 걱정됐다면 황 박사가 거짓말쟁이임을 입증해내는 사회고발이 아니라, 우리네 연구 환경과 조건의 어떤 점이 미비해 거짓말 할 수밖에 없었나를 밝히는 다큐멘터리였어야 했다. 사람들 격한 반응, 애국주의 탓만 할 게 아니다. 모두가 믿던 걸 하루저녁에 전복시키는 데 팩트만으로 충분한가. 화법이 싸가지 없으면 내용 전에 열부터 받는 게 커뮤니케이션이다. 사람들은 팩트 이전에 그 문법에 설득되지 못한 거다. 똑같은 내용, 안타까워하며 차분히 짚는 디스커버리 다큐멘터리였다면, 달랐다. 피디수첩이 취한 최초의 자세 달랐다면, 그 이후 모든 것이 달랐다. 물론, 황 교수에 대한 대중의 열광이 가진 쇼비니즘 색채, 짙다. 그러나. 대중의 감정이입을 멍청한 착각이고 위험한 파시즘이라고만 단정하는 게으르기까지 한 관성적 비판과, 영웅적 캐릭터로부터 위무 받고 대리만족 느끼던 대중을 간단히 애국주의로 괄호 치는, 그 야박하고 오만한 이성주의가 난 훨씬 더 재수 없다. 그렇게 이성적인 그들이 황우석을 목매단 순서는 도대체 얼마나 합리적인가. 그리고 황우석 아니어도 된단다. 거기까진 좋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뤄낸 일마저 아무 것 아닌 것처럼 말하는 거, 정말로 재수 없다. 5. 원천기술 인정 여부 논란, 언론이 머리 쓸 일 아니다. 입대지 마라. 조작된 논문 끝장낸 삘 받아서 더 가고 싶겠지만, 이젠 삘로 말할 순서 아니다. 원천기술이 있다 없다 한 마디, 지금 급하게 안 해도 된다. 그 기술 존재유무의 확인, 몇 개월 시간 주면 간단하다. 그걸 왜 있다 없다 지금 단정해야 하나. 하나의 단정마다 새로운 국면이다. 이제 제발 순서 지키자. 이 말이 황빠로 들린다면, 자신이 황까는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6.
대한민국, 집단의처증 상태다. 그래도 모두들 자긴 객관적이란다. 하긴 원래 의처증이 더 논리적이다. 한 팔 들어 겨드랑이 긁었더니 손 흔들었다는 게 의처증이다. 하필 그 순간 그 자리에서 신체 특정 부위가 근지러울 확률을 소수점 세 자리까지 계산하면서. 의처증일 땐, 그 순간 아무리 명백해 보이는 증거들도 잠시 물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여겨야 한다. 자신의 빛나는 논리력과 밀려드는 상상력을 멈추고, 직관에 맡긴 채 당분간 아무 말 않는 게 낫다. 흥신소 나섰으니, 이제 그만 닥치자.
이 사태 본질, 논문조작, 맞다. 설혹 음모론 사실로 판명 나더라도 황 교수 책임, 줄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황우석 사태는 과학적 오류의 문제를 넘어선지 오래다. 이건 언론사태다. 모든 언론들이 제각각 써댄 상상의 대본으로 포탈메인 화면에 의해 실시간 연출되고 있는 21세기형 언론 쌩쇼. 지금 언론, 미쳤다. 그 외 모든 표현, 적확하지 않다. 미쳤다. 단위기간 내 이렇게 많은 ‘사실무근’이란 단어를 매체에서 접할 기회는 평생 다시 없을 것, 자신 있게 단언하는 바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내 배를 내가 좀, 째겠다. 더불어 그 사실무근들이 아무리 기다려도 어찌된 연유로 기사화되었었는지에 대한 단 하나의 해명기사도 앞으로 볼 일 없을 것, 역시 단언하는 바다. 기자들의 취재 수순, 그것이 알고 싶다. 아니 꼭 알아야겠다. 3. 소설과 기사의 양식 경계를 단숨에 붕괴시킨 이 인문학적 성취는, 전인민의 신춘문예 추리소설부문 집단등단을 목표로 한 국가단위의 교육시뮬레이션 훈련이 아니라면, 미친 게 확실하다. 아무 것도 확실치 않으나 무엇이나 써댄다. 이건 기사작성이 아니라 저술활동이다. 팩트는 겨우 한 줄인 정보총량으로 영롱이고, 스너피고 마구마구 걸고 나자빠진다. 그 덕에 사람들은 갈팡질팡, 모든 프로세스는 뒤죽박죽. 가장 먼저 사기꾼으로 불린다. 논문이 철회된다. 그리고 조사가 시작된다. “일부 인정했다”는 뭘 일부 인정했는지, 내용 없는 중간발표에 황 교수 사직한다. 그리고서야 원천기술 인정범위 논한다. 그런데, 아직 조작에 관한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순서가 대체 이게 뭔가. 논의의 절차와 판단의 순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왜곡되고 말았다. 이 혼란, 스스로 감당할 범주를 벗어나 007 살인면허 자체 발급한 언론 탓, 절대적이다. 잘, 모르겠거든, 제발, 닥치고 있자. 4. 피디수첩 취재윤리 논란, 호들갑이었다. 사회고발프로 속성 자체가 폭력적이다. 윽박지름과 몰래카메라로 만들어진다는 거,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사학비리 재단이사장도, 사이비 종교 교주도, 비리 공무원도, 그들 개인에겐 취재의 함정과 카메라의 폭력성 있어 왔다. 하지만 그렇게 얻어지는 공적이득이 사적피해를 충분히 상쇄 한다 여긴 우리, 그 폭력 사실상 묵인 방조해왔다. 왜 이번에만 예왼가. 주인공이 달랐다. 취재윤리논란은 주인공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았던 모두의 바람과 핑계와 명분이었다. 상식은 때로 그렇게 감상적이다. 그 상식의 저항을 뚫고 임무 수행한 피디수첩, 박수 받을 만하다. 그럼에도 피디수첩에 할 말 있다. 첫 방송, 취지, 옳다. 그러나, 생명윤리가 진정 걱정됐다면 황 박사가 거짓말쟁이임을 입증해내는 사회고발이 아니라, 우리네 연구 환경과 조건의 어떤 점이 미비해 거짓말 할 수밖에 없었나를 밝히는 다큐멘터리였어야 했다. 사람들 격한 반응, 애국주의 탓만 할 게 아니다. 모두가 믿던 걸 하루저녁에 전복시키는 데 팩트만으로 충분한가. 화법이 싸가지 없으면 내용 전에 열부터 받는 게 커뮤니케이션이다. 사람들은 팩트 이전에 그 문법에 설득되지 못한 거다. 똑같은 내용, 안타까워하며 차분히 짚는 디스커버리 다큐멘터리였다면, 달랐다. 피디수첩이 취한 최초의 자세 달랐다면, 그 이후 모든 것이 달랐다. 물론, 황 교수에 대한 대중의 열광이 가진 쇼비니즘 색채, 짙다. 그러나. 대중의 감정이입을 멍청한 착각이고 위험한 파시즘이라고만 단정하는 게으르기까지 한 관성적 비판과, 영웅적 캐릭터로부터 위무 받고 대리만족 느끼던 대중을 간단히 애국주의로 괄호 치는, 그 야박하고 오만한 이성주의가 난 훨씬 더 재수 없다. 그렇게 이성적인 그들이 황우석을 목매단 순서는 도대체 얼마나 합리적인가. 그리고 황우석 아니어도 된단다. 거기까진 좋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뤄낸 일마저 아무 것 아닌 것처럼 말하는 거, 정말로 재수 없다. 5. 원천기술 인정 여부 논란, 언론이 머리 쓸 일 아니다. 입대지 마라. 조작된 논문 끝장낸 삘 받아서 더 가고 싶겠지만, 이젠 삘로 말할 순서 아니다. 원천기술이 있다 없다 한 마디, 지금 급하게 안 해도 된다. 그 기술 존재유무의 확인, 몇 개월 시간 주면 간단하다. 그걸 왜 있다 없다 지금 단정해야 하나. 하나의 단정마다 새로운 국면이다. 이제 제발 순서 지키자. 이 말이 황빠로 들린다면, 자신이 황까는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김어준/딴지일보 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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