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신디 시핸에게
한국에도 연대하는 어머니가 있다는 걸 알길
‘반전시위-공산주의’라는 말에 상처입지 말길
침략국 시민으로 당신이 고통스럽듯이
파병국의 시민인 저도 착찹합니다
세설
<죽음의 푸가>의 시인 파울 첼란의 <나무 없는 나뭇잎 하나>라는 시가 떠오른 아침입니다. 시에는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시의 전문은 이렇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그것이/ 너무 많이 이야기된 것이므로,/ 거의 일종의 죄악이라면,/ 그것은 어떤 시대인가?” 브레히트는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었지요. “나무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세상에 널려 있는 참혹함에 대한 침묵이므로, 거의 일종의 죄악이라면, 그것은 어떤 시대인가!”
어머니 신디 시핸! 제 큰언니뻘되는 나이지만 당신을 어머니라 부르겠습니다. 제 언니도 두 아들을 군대에 보낸 후 자주 눈물 글썽였습니다. 휴가 나온 군인들만 봐도 다 내 아들 같다고 눈물이 맺히고, 뉴스에서 군대 소식만 나와도 가슴을 쓸어내리는 대한민국의 보통 주부지요.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다행히 언니의 두 아들은 무사히 제대를 했지만, 당신의 아들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군에서 무사히 돌아오지 못하는 청년들이 너무나 많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요. 불행하게도, 총칼로 무장한 군대가 인간사회에 존속하는 한 끊임없을 일이겠지요. 전쟁터에서 자식을 잃은 어머니인 당신이 미국 내 반전평화운동의 새로운 아이콘이 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당신이 느낄 아픔을 생각합니다. 자식과 남편을 잃은 수천수만명의 이라크 어머니들과 당신이 어머니의 이름으로 함께 아프다는 것을, 침략전쟁을 도발한 나라의 시민이어서 당신이 느낄 착잡함과 고통이 더 복잡할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어머니의 이름은, 생명을 살리는 쪽에 몸을 대고 있기 때문이지요.
부시의 크로포드 목장 앞에서 당신이 1인 시위를 벌일 때, 어쿠스틱 기타 하나를 들고 당신과 연대하기 위해 나타난 존 바에즈 소식도 들었습니다. 내가 노래를 바치는 곳은 ‘지금 공격받는 곳’이라고 그이는 말한 적이 있지요. 예순이 넘은 반백의 짧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존 바에즈가 노래할 때, 아메리카 대륙의 남쪽에서는 일흔 나이의 메르세데스 소사가 연대의 노래를 함께 읊조렸을 것입니다. 존 바에즈도 메르세데스 소사도 를 당신과 함께 부르며 전쟁의 광기로 물든 고통스러운 현실을 넘어설 힘을 소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 대한민국에서도 당신과 연대하는 많은 어머니들이 있습니다. 힘내야 합니다.
‘반전시위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를 지원하는 것이다’라고 권력의 중심부에 있는 미국내 보수세력들은 여전히 발언합니다. 신디! 이런 포악한 말들에 상처입지 마세요. 평화를 갈망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이런 시대착오는 이미 공명의 힘을 잃었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미국에 종속되어 있는 것을 안전과 영광의 증거쯤으로 생각하는 한국의 어떤 세력에게도 그대로 나타납니다만, 그것이 그들의 정체성이므로 어쩔 수 없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변화하려고 하지 않는 한 어찌해 볼 수 없는 일이지요. 사랑과 평화를 소망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힘으로 그들의 시대착오를 깨우쳐줄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이 아침, 침략군인 미국의 국민으로 당신이 느끼고 있을 착잡함을 침략군의 동맹군인 대한민국의 ‘국민’인 나 역시 통렬히 느끼고 있습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이 시작되었을 때, 대한민국의 국군 통수권자는 국익을 위해 파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미국을 도와 이라크에 파병을 하면서 얻은 국익이 무엇인지는 물론 해명된 바가 없습니다. 설령 국익이 있다 하더라도 무고한 사람들을 살육하는 명백한 침략전쟁에 동조해서는 안 되는 것이 진보를 열망하는 이가 가져야 할 자기성찰 능력입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 남을 짓밟아도 된다는 사고를 하는 한 인간의 땅에 평화가 오기는 힘들 것입니다.
미국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한 불의의 전쟁이었던 베트남전에서 대한민국은 기꺼이 미국의 종자가 되어주었지요. 베트남전의 악몽으로부터 40년이 지난, 스스로 진보와 개혁을 말하는 대통령과 정치권력은 이라크 파병을 강행했습니다. 늦었더라도 양심의 소리를 듣자는 철군요구에는, 평화재건이라는 위선에 찬 말로 추가파병을 강행하더니 이번에는 파병재연장을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갈수록 이라크전의 허구가 드러나고 있고 전 세계의 반전여론이 거세어지고 각국의 철군 결정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즈음에 군대를 이라크에 장기주둔시킬 거라고 합니다. 신디! 나는 절망과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작년 이맘 때, 자이툰 부대를 방문했던 대통령이 생각납니다. 거의 모든 신문의 톱을 장식했던 사진 한 장. 더러운 전쟁에 우리의 청년들을 무장군인으로 파병해놓고 그들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활짝 웃고 있는 우리가 뽑은 대통령을 보았습니다. 전범국가의 ‘국민’이 된 모독감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사진이었습니다. 미국은 이렇게 반응했지요. 고맙다고. 참 잘했다고.
신디! 당신이 아들을 잃은 땅에 파병된 우리 청년들은 그곳에서 이라크 평화재건을 돕고 있다고 믿고 있을 것입니다. 믿었으므로 갔을 것입니다. 베트남전 참전의 과거를 고통스럽게 속죄해야 했던 우리가 다시 우리의 청년들을 속죄해야 할 땅에 군인으로 내보냈습니다. 다시, 이라크의 어머니가 묻습니다. 한국은 도대체 왜 우리 땅에 군대를 보낸 건가요? 빵과 의료품과 삽은 군인이 아니어도 들고 올 수 있는 거잖아요. 평화는 내부에서 자라나는 것이지 외부에서 강제로 이식되는 것이 아니지요. 이미 늦었습니다만, 마지막 기회입니다. 정말이지 이제 그만, 이라크에서 철군해야 합니다. 어떤 이야기가, 그것이 너무 많이 이야기된 것이므로, 거의 일종의 죄악이라면, 그것은 어떤 시대입니까. 더 이상 속죄의 시간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김선우/시인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