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가족> 권태현 지음, 문이당 펴냄. 9500원
잠깐독서 /
실직, 신용불량, 파산, 가족 해체, 이혼, 노숙, 자살….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 이후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게 자리잡은 이 단어들은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넘보는 21세기 대한민국의 또 다른 자화상이다. 수출 주도의 경제 성장의 이면에서 내수는 꽁꽁 얼어붙고, 중소 자영업자들은 살얼음 위를 걷듯 불안한 나날을 이어가며, 봉급쟁이들은 언제 실업자 신세로 떨어질지 조마조마해하며 숨을 죽이고,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할 나이에 이른 청년들은 구직의 바늘구멍을 뚫고자 동분서주해야 하는 현실. 한순간 긴장의 끈이 끊어지면 끝도 보이지 않는 나락이 기다리고 있는 불안 사회. 권태현(49)씨의 장편소설 <길 위의 가족>은 생존의 공중그네에서 곤두박질치고 만 한 가장과 그의 가족들이 겪는 고통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 시우와 그 가족들의 상황은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할 정도로 전형적이다.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몰아치자 직장에서 밀려난 시우가 어려운 형편에도 사업을 벌이다가 실패하고, 살던 집까지 내준 채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各者圖生)의 처지로 몰린다. 아내와 자식들이 무능한 아비를 원망하는 가운데, 노숙자 신세가 된 채 회생을 위한 마지막 안간힘을 써 보던 가장은 비정한 세태에 최후의 일격을 맞고 결국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리기에 이른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위해서 나는 문장에 색깔을 입히지 않고 단순한 구성을 택했다.” 작가의 말처럼, 소설은 선의와 노력으로 현실에 임했던 한 가장과 그 가족들의 파멸을 시간 순으로, 냉정하게 그려 보인다. 주인공 시우 일족의 시련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는 가운데, 주변 인물들이 겪는 또 다른 고난과 슬픔이 수시로 삽입되면서 소설은 우리 시대의 음울한 풍경화를 직조해 낸다.
시종 파국을 향해 치닫던 소설은 마지막 장면에서 극적인 ‘반전’(?)을 마련해 놓는다. 죽음을 각오한 가장의 투신으로 가족이 서로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되찾는 것. 그러나 이 대목에서만 작가의 어조가 유독 감상으로 흐르는 점은 아쉽다. 가족들 사이의 애정의 회복에도 불구하고 바뀐 것은 없다는 점에서 현실은 손쉬운 해피엔딩을 허락하지 않는 까닭이다.
최재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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