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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세설] 오버 좀 하고 살자/김어준

등록 2006-03-16 22:12수정 2006-03-17 16:41

김어준/딴지일보 총수
김어준/딴지일보 총수
야구 이겼다고 미국 이겼다고 말하는 건 오버라고?
오버 맞고 촌스러운 것도 맞다
그러나 미국을 이기면 안 되는 존재라고
알고 지낸 시절 참으로 길었다
그러니 이제 미국 이겼다고 오버 좀 하자
1.

치퍼 존스를 2루 땅볼로 잡아내는 순간, 전혀 계획에 없던, 괴성을 지르고 말았다. 크아아. 신난다. 미국, 이겼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꼭 이 멘트 수정해주는 사람들 있다. 미국이 아니라 메이저리그 야구선수들에게 한국이 아니라 코리안리그 야구선수들이 이긴 거라고. 이 승리가 코리안리그가 메이저리그 보다 수준 높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니, 기분 좋은 것은 좋은 것이지만 이걸 한국이 미국 꺾었다는 식의 오바는 하지 말라고. 때론 내셔널리즘이 가진 촌스러움에 대한 논평이나 이 대회는 미국이 그들 스포츠산업인 야구를 전 세계에 마케팅하기 위한 상업기획에 불과하단 친절한 분석까지 곁들여서.

2.

1954년 제 5회 스위스 월드컵 결승전 후반 39분, 2차대전 패전 후 처음으로 월드컵에 참가한 독일 포워드 헬무트 란의 극적인 역전골이 터진다. 상대팀이었던 헝가리가 제 4회 월드컵 직후부터 바로 이 날의 결승전까지 만 4년간 31번의 A매치 경기에서 상대에게 경기 도중 점수가 뒤진 상태가 된 건 바로 이 결승전의 마지막 5분이 처음이었다. 그들은 4년간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던 무적의 팀이었다. 예선전에선 독일을 8대 3으로 이겼다. 전후 라인강의 기적을 견인한 지도자로 역대 최고의 정치인으로 꼽히며, 독일이 득점을 올리자 의회연설 도중 단상에서 환호했던 초대총리 아데나워는 국경까지 나와 독일에 선수들을 맞았다. 그 경기는 ‘나찌’ 원죄의식과 패배의식으로부터 탈출해 독일로 하여금 근대국민국가로서 최소한의 자부심을 회복하게 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알제리 출신 지단, 가나 출신 드사이, 세네갈 출신 비에이라, 뉴칼레도니아 출신 가랑뵈 등 식민지 출신의 흑인 혹은 혼혈선수들의 활약으로 프랑스가 1998년 제 16회 월드컵에서 최초로 우승하자 프랑스 지식인들은 인종과 계층의 뿌리 깊은 반목을 일거에 희석시킨 사회 대통합을 찬양한다. 프랑스혁명과 공화주의의 완성을 광장에서 목도했다며 각종 기사, 서적 출판, 세미나 개최 등을 통해 헌사가 쏟아진다. 증시를 40% 상승시키고 실업률을 2%나 줄였으며 대통령 지지도를 70%로 끌어올린 결승전은 정치, 경제, 사회적 맥락을 갖춘 일대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프랑스 감독이던 엠메 자케에게 백인선수들로만 이뤄진 팀을 만들어야 한다 요구했고, 월드컵 내내 “국가도 부를 줄 모르는” 식민지 출신의 선수들을 국가대표로 인정할 수 없다며 다민족정책을 반대하던 극우정치인 국민전선의 장마리 르펜으로 하여금 딱 한 번 그 정치적 입장을 유보하게 만든 것 역시 그의 정적이 아니라 월드컵 결승전이란 경기 하나였다.

3.

난 오노가 스케이트를 신고 빙판에 나서는 순간부터 이 친구가 코너를 돌다 지 혼자 나자빠지길 원했다. 안현수가 오노를 이겨줬으면 하는 마음이야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것만큼 보고 싶었던 건 그냥 자기 혼자 자빠지는 광경이었다. 안현수가 질까 불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쌤통의 장면을 보고 싶었던 게다. 난 그런 유치한 편파성이 즐겁다. 그런 경기를 중계할 땐, 우리 반칙도 잘했다는 식의 중계도 짜증나지만 승부를 떠난 선의의 경쟁만 운운하는 중계는 더 짜증난다. 흥분 좀 하면 어떤가. 좀 편파적이면 어떤가. 한참 그러다 스스로의 불공정함에 대한 일말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오노도 분명 실력 있는 선수라고 한 번은 말해두는 귀여운 자정능력을 지켜보는 게 훨씬 더 즐겁다. 그런 불공정이 타인에 대한 비합리적 공격성까지 띠지는 않도록 하면 되는 것이지 그 편파 자체를 훈계하는 건 공정한 게 아니라 찌질한 거다.

4.

이미지는 실물보다 크다. TV로 보아온 미국 메이저리그는 판타지다. 그들을 실물로 상대해 승리하며 우리 선수들이 느꼈을 자신감의 고양은 고스란히 그것을 TV로 지켜본 사람들의 감정에 이입된다. 그래서 신난다. 미국을 이긴 자체 보다 더 신나는 건 그 승리의 감정이 그걸 지켜본 모두에게 전이되어 집단으로 기억되는 거다. 여기서 미국 대표팀이 스토브리그 기간이다 보니 몸이 덜 풀려 그렇다느니, 미국선수들이 전력투구하지 않았다느니, 한국 스타일을 처음 접해서 그랬다느니, 야구팀이 아니라 미국을 이겼다 말하는 건 오바라느니 하는 소리도 언제나 존재한다. 그런 사람들, 안쓰럽다. 우리는 당연히 미국보다 작고 약한 것으로 정리 입력된, 권력에 대한 머리 속 내적질서가 교란돼 불안한 것까지야 이해가지만, 자기가 소속된 무리가 이긴 것에 조건 없이 일단은 흥분하는 동물적 본능이 잠식당한 것 같아 안쓰럽다.

물론 이렇게까지 흥분하는 거 미국에 대한 평소의 열등감 소산인 건 맞다. 또한 혼자서도 충분히 즐거워할 수 있을 것을 미국의 누구누구가 이렇게 대단하다고 말해주었다며 여전히 상대의 칭찬을 통해서 그 가치를 확인 받으려는 태도 역시 못났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야구팀이 미국을 이겼다고 말하는 거, 오버 맞다. 좀 촌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을 이길 수 없다 생각하는 걸 넘어 이기면 안 되는 존재인줄 알고 지냈던 시절 참으로 길었다. 그러니 이제 미국 이겼다고 오바 좀 하자.

야구 이겼다고 미국 넘어서나. 때론 그저 경기 하나가 일반인식의 일대전환을 가져오고 그것이 실제의 물적 질적 변화를 선도해낸다. 그러니 이 대목에서 혹여나 촌스런 애국주의에 대한 분석과 비판은 참아 달라. 지난 월드컵 애국주의와 파시즘에 대한 근엄한 질타를 접할 땐, 어렵게 만난 멋진 연인과 이제 겨우 연애 좀 시작해보겠다는데 연애 너무 집착하면 자칫 살인나는 수도 있다는 훈계부터 듣는 기분이었다.

5.

고백하자면 사실은 이 글 자체가 오바다. 월드컵 이후 이미 집단 자존감의 크기가 달라졌다. 그런데 난 미국 이야기만 나오면 흥분한다. 그래서 오바했다. 오바 좀 하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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