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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나를 퍼스트레이디로 부르지 말라”

등록 2006-02-09 20:43수정 2006-02-12 15:59

정육점 아줌마에서 퍼스트레이디 된 볼리비아 새 대통령 모랄레스 누이
스스로 미천하다고 말하는 그이의 얼굴에 드리워진 고단한 남미 원주민의 역사
세설

볼리비아의 새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의 행보를 흥미롭게, 얼마간 두근거리며 바라보고 있던 내게 에스테르 모랄레스의 사진 한 장은 결정적인 공명의 느낌을 던져 주었다. 작은 마을에서 쇠고기와 라마고기를 파는 원주민 여자. 그이의 얼굴엔 생활의 간난신고를 온몸으로 겪어 온 이의 고단한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그늘은 개인의 것이기도 하고, 수백년의 수난사를 통과하며 빚어진 아메리카 원주민 역사의 그늘이기도 할 것이다. 그늘과 동시에, 그 얼굴에는 빛도 있었다. 영화 <집시의 시간>에 나오는 집시할머니의 대지모신 같은 뚝심과 감정표현이 풍부한 눈빛이 있었고, 침탈의 현장에서 다른 생명을 자기 치마폭으로 감싸 보살펴 본 적 있는 이들이 가졌을 법한 담대함과 연민의 빛 같은 게 있었다.

“볼리비아 정육점 아줌마 ‘퍼스트 레이디’ 됐다.” 신문기사는 그렇게 에스테르 모랄레스를 소개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퍼스트 레이디란 말이 몹시 껄끄럽다. 무의식적/의식적인 말의 서열체계/폭력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이는 우리식 합성어인 영부인이 아니니 교체할 말이 마땅치 않아 그냥 쓴다. 그이는 대통령의 부인이 아니라 누나다.) 기사는 계속 전한다. 앞으로 어떤 퍼스트 레이디가 되고 싶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이가 답했다는 말.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미력이나마 모든 힘을 쏟겠다. 특히 2003년 반정부 시위 때 숨진 사람들의 유가족을 돕는 데 앞장설 계획이다” 그리고 “나의 직업이 미천하니 제발 퍼스트 레이디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고 주문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뿌리 깊은 서구 중심 사고와 교육의 영향으로 ‘후진적인’ 개발도상국들이 모여 있는 먼 곳쯤으로 치부되기 일쑤인 남미에서 나는 종종 환하고 역동적인 힘을 느낀다. 세계 도처에 끊이지 않는 전쟁과 분쟁이 인간사회의 퇴행적 역동성을 증거한다면 체 게바라 이후 사파티스타에 이르기까지 남미가 가진 현재형의 혁명적 기운에는 희망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다층적인 역동성이 있다. ‘반미’를 노골적으로 표방하는 가난한 사회주의 나라이면서 농업혁명을 통한 식량 자급자족과 다양한 유기농업의 놀라운 모델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쿠바, 정치적 혼돈과 대립의 악순환 속에서도 ‘가비오따스’라는 독창적이고도 놀라운 생태공동체가 존재하는 콜롬비아, 도시혁명의 산뜻하고 유쾌한 실험 모델인 꾸리찌바가 존재하는 브라질, 아메리카 원주민의 지혜를 자율적인 열정으로 현대적 혁명과 접목시키고 있는 멕시코 민족해방군 사파티스타. 미국과 신자유주의의 맹위에 맞서 봉기한 사파티스타 전사들은 너무도 당당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정글은 500년간 우리 삶의 터전이었다. 우리는 정글을 맥도널드, 고속도로, 호텔 따위와 바꾸고 싶지 않다.”

이런 힘, 이런 자존심, 이런 열정과 꿈꾸기. 아랍세계와는 또다른 측면에서 반미-탈미의 움직임을 구체화시키고 있는 남미 여러 나라들의 행보 속에서 최초의 원주민 대통령이 된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그가 자신의 대통령 월급을 절반으로 깎았다는 얘기나, 해외순방외교의 현장에 원주민 의상인 알록달록한 알파카 스웨터를 입고 다닌 얘기, 의상의 파격에 대해 각국의 비난이 쏟아졌지만 대통령 취임식 때조차 정장을 입지 않은 얘기 등을 들으며 나는 유쾌했다. ‘정장’이라고 ‘제도화된’ 서구 중심의 의상문화에 대해 ‘도대체 니들이 강요하는 ‘정장’이 뭔데? 나는 그냥 우리 조상들이 입던 옷 입을래’라고 심드렁하게 되묻는 듯한 뚝심에 슬그머니 미소가 나왔다.

자본과 시장권력에의 흡수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점에서 불완전하긴 하지만 남미의 좌파(성향) 나라들이 미국에 대해 현실적인 저항력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세계 어디에서든 전쟁을 도발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미국의 오만한 질주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다양한 통로들이 만들어지지 못한다면 세계평화의 소망은 공허한 슬로건에 불과해질 뿐이다. 미국의 힘 앞에 자의-타의의 굴욕적인 비위 맞추기를 하고, 한 발 더 나아가 미국에 종속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우리의 뿌리 깊은 공포감은 어디에서 기원하는 걸까. 농업 문제에서 최근의 스크린쿼터 문제에 이르기까지 일방적인 힘의 관행에 번번이 무릎 꿇으면서도 왜 우리는 스스로의 굴욕을 합리화하기에 먼저 급급한 걸까. 평택 미군기지 이전 문제에 대해 군대 대신 평화를, 무기 대신 농사를 짓겠다는 자기 나라 농민들의 땅과 집을 강제수용하겠다고 나서는 정부가 기막히다.

나는 미천하니 퍼스트 레이디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고 했다는 볼리비아 여자를 보고 있다. 스스로의 미천함을 숨기느라 여념 없거나 자신을 제외한 누군가의 미천함을 폭로하기에 급급한 정치판에 들어서며 스스로 미천하다고 말하는 여자.
김선우/시인
김선우/시인
사진 속의 그이는 진심으로 자신을 미천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스스로 미천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진심으로 자신과 같은 존재들인 미천한 이들을 돕고 싶다고 말할 때, 공명의 힘은 크다. 권력을 염두에 둔 이들의 한시적이고 가식적인 포즈가 아니라 진심이 느껴진다. 스스로 미천하다고 말하는 그이의 얼굴에 드리워진 고단한 그늘 앞에서 부끄러워진다. “살아있는 생명을 함부로 해치며 살아있는 생명체에 대해 연민의 마음이 없는 사람, 이런 사람을 일컬어 비천한 사람이라고 한다//도시나 마을을 포위하거나 공격하여 선량한 백성을 괴롭히는 권력자를 일컬어 비천한 사람이라고 한다//…인간은 결코 그의 신분에 의해서 비천해지거나 고귀해지지 않는다. 인간을 비천하고 고귀하게 만드는 것은 신분이 아니라 그 자신의 행위다.”(<숫타니파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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