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범이 2006년 3월16일(한국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시 에인절 스타디움에서 열린 세계야구클래식(WBC) 일본과 경기에서 결승타를 날린 뒤 환호하며 1루로 뛰고 있다. 애너하임/연합뉴스
10일 저녁 7시 2023세계야구클래식(WBC) 1라운드 B조 조별리그 경기에서 38번째 ‘한일전’이 치러진다. “일본에 지면 대한해협을 헤엄쳐 귀국하라”는 우스갯소리 속에 담긴 비장함이 보여주듯 두 나라의 대결에는 늘 단순한 승패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통산 상대 전적은 19승18패(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이후 프로 선수 참가 기준). 프로야구 역사와 인프라 격차까지 고려하면 놀라운 기록이다.
최근 일본에 3연패를 했고, 이번 대회에서 호주에 일격을 당하며
벼랑으로 몰린 상황에서 ‘이강철호’는 반전의 서사를 쓸 수 있을까. 격전을 앞두고 다난했던 ‘한일전’ 도전과 응전의 역사 속 하이라이트 장면을 돌아본다.
야구대표팀 사상 최초로 올림픽 동메달을 획득한 한국 야구대표팀이 2000년 9월27일 시드니 올림픽파크 야구장에서 열린 시상식을 마치고 메달을 들어보이며 즐거워하고 있다. 시드니/연합뉴스
올림픽에 처음으로 프로야구 선수 출전이 허용되면서 각국 정예 멤버가 맞붙었다. 당시에도 한국은 여덟 개 팀이 풀리그를 벌이는 예선에서 호주에 3-5 역전패를 당하는 등 2승3패 불안한 성적으로 일본을 만났다. 난타전 끝에 첫 ‘올림픽 한일전’에서 7-6 승리를 거둔 한국은 예선 라운드 3위로 준결승에 올랐다. 이후 준결승에서 미국에 패하며(1-2) 동메달의 주인을 두고 일본과 재회했다.
‘한일전’을 관통하는 마법의 다섯 글자 ‘약속의 8회’가 시작된 경기다. 구대성과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빡빡한 선발 맞대결로 두 팀은 7회까지 득점 없이 팽팽하게 맞섰다. 8회말 일본은 내야수들의 연이은 수비 실책으로 흔들렸고, ‘국민타자’ 이승엽이 2사 2·3루 풀카운트에서 2타점 적시타를 때려내며 승기를 가져왔다. 최종 결과 한국의 3-1 승. 구대성은 11개 삼진을 잡아내며 완봉승을 일궜다.
박찬호가 2006년 3월5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세계야구클래식 일본과 경기에서 승리한 뒤 환호하고 있다. 도쿄/연합뉴스
2006년 초대 세계야구클래식에서 한국과 일본은 세 번 붙었다. 첫 경기는 도쿄돔에서 열린 본선 1라운드 최종전. 일본 야구의 슈퍼스타 스즈키 이치로의 발언 “싸우는 상대가 앞으로 30년은 일본에 손대지 말아야겠다 느끼도록 이기고 싶다”고 한 말이 한국야구를 저격한 ‘트래시토크’로 왜곡·유통되면서 경기 전 분위기는 험악하게 달아올랐다. 과장된 ‘이치로 망언’은 오히려 한국의 승리욕에 연료가 됐다.
경기 초반 2실점으로 끌려가던 한국은 다시 8회에 역사를 썼다. 1-2 상황에서 이종범이 안타로 출루했고, 이날 3타석 3삼진으로 조용했던 이승엽이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마무리 이시이 히로토시를 상대로 우월 투런포를 작렬하며 경기를 뒤집었다. 9회 마무리 등판한 ‘코리안 특급’ 박찬호가 이치로를 상대로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며 극적인 승리를 완성했다. 한국은 이 승리에 ‘도쿄대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국은 열흘 뒤 미국으로 무대를 옮겨 본선 2라운드에서 다시 일본을 만났고 이번에도 8회 주장 이종범의 2타점 적시타와 ‘돌부처’ 오승환의 세이브에 힘입어 승리했다. 앞서 세계 최강 미국까지 무너뜨렸던 대표팀은 캘리포니아 에인절스타디움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아 이 환희를 기렸다. 다만 준결승에서 펼쳐진 세 번째 한일전에서는 0-6으로 패하며 대회 3위로 마무리했다. 일본은 초대 대회 우승.
이승엽이 2008년 8월22일 베이징 우커송야구장에서 열린 올림픽 야구 4강전 일본과 경기에서 8회말 1사 1루때 역전 투런홈런을 치고 있다. 베이징/연합뉴스
한국야구가 세계 정상에 우뚝 섰던 2008년, ‘한일전’에도 예외는 없었다. 미국, 쿠바를 비롯해 광복절 다음 날 치른 일본전(5-3)까지 예선 7경기 전승으로 준결승에 오른 한국은 이번에도 일본과 재회했다. 이 경기 역시 ‘이승엽 주연’의 8회가 절정이었다. 한국이 파죽지세 연승을 달리는 동안 타율 0.136(26타수3안타)으로 부진했던 이승엽은 이 경기 4회 병살타까지 기록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타석에 섰다.
2-2로 맞선 8회말 1사1루, 이승엽은 상대 투수 이와세 히토키의 시속 138㎞ 몸쪽 낮은 속구를 당겨 비거리 110m 아치를 그리며 2점 역전홈런을 때려냈다. ‘국민타자’는 경기 뒤 눈물을 글썽이며 “후배들이 ‘오늘은 잘 될 거다’라고 얘기해주는데
너무 미안했다”라고 했다. 이날 선발로 나선 ‘막내’ 김광현은 8이닝 6피안타 5탈삼진 2실점(1차책)으로
마운드를 이끌었다. 이른바 ‘
일본 킬러’의 탄생이었다.
일본 야구에 ‘
최악의 날’을 안기고 결승에 오른 한국은 쿠바마저 제압하며 ‘
퍼펙트 우승’을 달성, 한국야구의 화양연화를 만들었다.
봉중근이 2009년 3월24일(한국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 제2회 세계야구클래식 결승전 일본과 경기에서 역투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2009 세계야구클래식은 ‘야구 월드컵’이 아니라 ‘한·일 시리즈’에 가까웠다. 무려 다섯 번의 ‘한일전’이 벌어졌다. 시작은 처참했다. 1년 전 베이징에서 두 번의 일본전을 지배했던 김광현이 선발로 나섰으나 1⅓이닝 만에 8실점을 하며 물러났고 한국은 2-14 콜드게임 패배를 당했다. 절치부심한 한국은 사흘 뒤 다시 일본을 만났고 봉중근의 5⅓이닝 무실점 호투 속에 1-0 승리로 콜드게임 충격을 씻어냈다.
무대를 미국으로 옮겨 본선 2라운드에서 대회 세 번째 ‘한일전’이 성사됐다. 한국은 다르빗슈 유와 선발 대결에서 봉중근이 완승(5⅓이닝 1실점)을 거뒀고 윤석민-김광현-임창용 불펜이 철벽 세이브를 선보이며 4-1로 승리, 준결승 진출을 확정 지었다. 4강 티켓이 정해진 상황에서 벌어진 1·2위 결정전은 일본의 6-2 승리로 돌아갔다. 한국과 일본은 준결승에서 각각 베네수엘라와 미국을 꺾었고 결승에서 다섯 번째 ‘한일전’이 벌어졌다.
3-3 동점 상황에서 돌입한 연장 10회, 한국은 임창용이 이치로에게 정면 승부를 했다가 결승 2루타를 얻어맞으며 우승 문턱에서 일본에 패했다. 세계야구클래식 준우승. 이 대회 ‘한일전’ 성적은 5경기 2승3패.
오타니 쇼헤이가 2015년 11월19일 일본 도쿄 도쿄돔에서 열린 WBSC 프리미어12 한국과 경기에서 역투하고 있다. 도쿄/AP 연합뉴스
2015 WBSC 프리미어12 ‘오타니 쇼크’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이 야심 차게 출범한 또 다른 ‘야구 월드컵’ 프리미어12 초대 대회에서 한국은 일본과 두 번 붙었다. 개막전에서는 0-5로 완패했고, 11일 뒤 도쿄돔에서 열린 준결승은 4-3으로 이겼다. 한국은 결승에서 미국마저 8-0으로 완파하며 프리미어12
초대 챔피언에 등극했다. 예선에서 한국에 ‘유이’한 패배를 안겼던 일본과 미국에 연이어 설욕하며 일궈낸 짜릿한 우승이었다.
그러나 이 대회 두 번의 ‘한일전’ 주인공은 오타니 쇼헤이였다. 당시 21살 나이로 개막전에 선발 등판한 오타니는
시속 161㎞에 육박하는 강속구와 시속 147㎞의 괴물 포크볼을 배합하며 한국 타자들을 줄줄이 돌려세웠다. 개막전 기록은 6이닝 2피안타 2볼넷 10탈삼진 무실점. 91개의 공으로 만들어낸 완전무결한 투구였다.
준결승에서도 한국은 오타니를 상대로는 점수를 내지 못했다. 오타니가 7이닝 동안 한국 타선과 22번 대결하며 11탈삼진 1피안타 무실점으로 승기를 굳히고 내려간 뒤, 한국은 9회초 정근우의 2루타를 시작으로 4득점 ‘빅이닝’을 만들어 역전승을 거뒀다. 이날 유일하게 오타니 상대로 안타를 친 정근우는 이후 “(오타니가) 결정구로 던지는 포크볼은 지금까지
볼 수 없던 공”이라고 말했다.
박강수 기자
turn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