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문득 생각난…
대학생이던 9년 전 여름. 유럽 배낭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내 손에 남은 것이라곤 별로 없었고, 남에게 줄 것도 하나 없었다.(배낭은 스페인의 한 기차역에서 도둑맞았고, 돌아오는 일본 공항에서는 공항세를 낼 돈조차 없었다.) 그런데 만약, 내가 그 스무 곳이 넘는 유럽의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전문 디자인책을 한 권씩만 사왔더라면, 디자이너로서 지금의 내 모습은 180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물론 그때는 비싸고 무거운 책을 사는 건 생각도 못했고, 그저 많은 것을 경험하는 게 훨씬 중요했다. 쉽게 말해 찍고 돌기, 좌충우돌, 나라 수 세는 무대뽀 배낭여행이었으니까.
서른이 된 지금, 주말을 이용해 짧은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이제 맘에 드는 책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살 것이고 좋은 공연 앞에서는 절대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돈을 쓴다면 내 월급통장은 금세 바닥나겠지만, 여행지에선 평소와는 조금 다른 금전감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삶의 경험도 사야 하는 자본주의의 매몰참이 때론 아득하게 느껴지지만, 10년 뒤 내 서재가 각국의 디자인책들로 채워질 거라 생각하면 어린애마냥 들뜬다. 그때는 세상에 줄 것이 넘쳐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10년 뒤에야 알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여행의 가치다.
이임정 기자 im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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