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에버랜드 사건 재판에 대비해 26층에 검찰 조사실 등을 꾸며놓고 법무팀 소속 검찰 출신 변호사를 동원해 미리 짜맞춘 시나리오대로 질문과 답변을 연습했다고 김용철 변호사가 밝힌 서울 중구 태평로빌딩(사진 가운데). 이 건물은 최고층이 27층이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곧 공개한다” 큰소리 뒤 일주일 지나도록 감감
“법적 검토 안 끝나” 군색…검찰·금감원도 미적
“법적 검토 안 끝나” 군색…검찰·금감원도 미적
삼성그룹이 김용철 변호사(전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가 공개한 ‘비자금용 차명계좌’의 운영자와 돈 주인의 실체를 일주일 넘게 공개하지 않고 있다. 문제 계좌가 드러난 직후 “조만간 돈의 주인과 성격을 밝히겠다”고 공언한 것과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법적으로 검토할 문제가 많다”며 몸을 사리는 모습이다. 시민사회단체에서는 “삼성이 군색한 해명으로 뒷감당이 어려워지자 시간끌기를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삼성그룹 전략기획실 고위 임원은 4일 “차명계좌와 연루된 이들의 신분과 돈의 출처를 공개하려면, 구체적인 거래 과정과 내역 등 여러모로 확인할 게 많다”며 “법적으로도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자체 조사와 법적 검토가 끝나지 않아 현재로선 계좌 주인과 돈 주인의 신분을 밝히기 힘들다는 것이다.
삼성의 이런 태도는 김 변호사가 계좌를 공개한 일주일 전과는 크게 달라진 것이다. 삼성은 지난달 29일 문제 계좌는 ‘그룹 재무담당 한 임원이 제3자 돈을 굴린 것’이라고 해명하면서, “조만간 이들의 신분과 거래 내역을 밝힐 수 있다”고 공언한 바 있다. 나아가 “어차피 검찰로 가면 돈의 주인과 성격은 다 밝혀질 일”이라며, “필요하다면 김 변호사를 검찰에 고발하고 관련 내부자를 징계할 수도 있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다가 며칠 만에 “당사자 동의 없이 개인간 금융거래를 공개할 수 있는지, 우리가 고소·고발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 검토하고 있다”며 한발 물러선 것이다. 내부 징계도 “나중 문제”라며 비켜갔다. 핵심 임원의 ‘불법 행위’를 일찌감치 확인해 놓고도 신분 공개와 후속 조처를 머뭇거리고 있는 셈이다.
김 변호사의 ‘일방적인 폭로’에 삼성이 아무런 법적 대응을 하지 않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이와 관련해 한 대기업의 전략담당 임원은 “이 사건이 검찰로 넘어가면 전략기획실과 핵심 경영진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 등 삼성으로선 원치 않는 상황을 몰고 올 수도 있다”며 “기업 입장에서는 검찰을 내 손으로 끌어들이는 결정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와 관련해 그룹의 한 임원은 “5일 김 변호사가 기자회견을 열면 우리도 이에 대한 공식 대응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의 핵심은 검찰과 금융감독당국이 차명계좌의 실체와 위법성을 가리는 데 소극적이라는 점이다. 비리 물증이 나왔는데도 검찰은 여전히 “수사 착수 여부를 검토 중”이며, 금융감독원은 “해당 은행의 사실관계 확인이 우선”이라며 버티고 있다. 검찰 수사나 금융당국의 검사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사안을 두고 서로 ‘핑퐁 게임’을 벌이는 형국이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은 “삼성이 비상식적인 논리로 폭로 내용을 부인하다 보니 무리한 해명과 말바꾸기가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며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있는 만큼 당국의 수사와 검사가 빨리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회승 기자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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