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재 법조팀장
편집국에서
다른 신문들과 마찬가지로 저희도 매일 오전 10시께면 그날의 신문 제작을 위한 편집회의를 엽니다.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부문의 예정사항과 함께 각 신문들을 간단히 평가하고 우리가 잘한 점, 못한 점을 요약해 회의자료를 만듭니다. 이른바 다른 신문에 ‘물먹은 기사’들을 적시하기도 하고, 우리가 좀더 분발해야 할 대목에 대한 지적도 들어 있습니다.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삼성 비자금 의혹 폭로 기사가 나간 10월30일 아침 한겨레 편집회의 자료의 서두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삼성이 정말 대단한 건가, 한겨레가 무모한 건가, 아니면 다른 신문들이 한심한 건가?’
애초 사제단의 폭로가 있기 전 저희 내부에서는 나름으로 다른 신문들이 이 기사를 어느 정도 쓸 것인지를 점쳐보기도 했습니다. 그동안의 보도 성향을 볼 때 대다수 신문들이 ‘무시전략’으로 나갈 게 뻔하지만 그래도 몇몇 신문들은 어느 정도 눈에 띄게 다룰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측은 보기좋게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이른바 조·중·동 세 신문은 사회면에 2~3단짜리 간단한 기사로 처리했고, 아무도 1면에 실은 신문은 없었습니다. 1면을 포함해 다섯 면을 관련기사로 ‘도배’한 저희들이 오히려 머쓱할 정도였습니다. ‘한겨레가 무모한 것인지 …’란 자문은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번 사건이 그 정도의 기사대접을 받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합니다. 지금까지 삼성을 둘러싼 이런저런 의혹 제기가 있었지만, 이번처럼 ‘구체적인 팩트’로 뒷받침된 경우는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삼성 핵심부서에서 근무했던 폭로자의 신분도 그렇고, 비자금으로 추정되는 괴자금이 들어 있는 계좌번호까지 제시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변양균씨와 신정아씨가 주고받은 ‘연서’의 은밀한 표현까지 시시콜콜 보도했던 신문들로서는 정말 신나는 상황이 아닐까요? “만약 전직 청와대 비서관이 ‘내 계좌에 청와대 비자금 50억원이 들어 있다’고 폭로했다면 다른 신문들은 어떻게 했겠나. 거의 10쪽에 걸쳐 대서특필했을 것이다.” 이날 아침 편집국에 걸려온 한 독자의 정곡을 찌르는 지적은 평범한 일반시민들의 ‘편집 감각’이 오히려 신문기자들보다 한수 위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한겨레>가 이번 사안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이유는 결코 삼성을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재벌에 대한 증오심을 가졌기 때문은 더더욱 아닙니다. 한겨레도 삼성이 우리 사회에 끼치는 순기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업이라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끼기는 대다수 국민들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 더욱 삼성의 문제를 신랄하게 지적하는 것입니다. “삼성의 역기능이 임계점에 달했다”는 경고는 김용철 변호사뿐 아니라 학계를 비롯한 여러 분야 전문가들로부터도 나오고 있습니다. 만약 과거의 잘못이 있다면 삼성이 과감히 그 고리를 끊고 새로운 도약의 출발점으로 삼았으면 하는 충정이 기사 속에 배어 있음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제단의 기자회견에 앞서 시중에는 저희 신문을 음해하는 갖가지 소문이 나돌기도 했습니다. 한겨레가 김 변호사의 폭로 문제를 놓고 삼성과 협상을 벌이고 있다거나, 광고 부담 때문에 기사화를 망설이고 있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소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창간 이후 20년 동안 지켜온 ‘성역 없는 보도’란 한겨레 정신은 달라진 바가 없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끊임없는 격려와 지적을 바랍니다.
이춘재 법조팀장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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