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석 소아정신과 전문의·행복한아이연구소장
서천석의 행복 비타민 /
진료실을 찾은 한 엄마의 얼굴이 무척 초조하다. “우리 아이가 요 며칠 잠을 설쳐요.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도대체 그 어린 것이 무슨 고민을 잠도 깊이 못 자면서 할까요?” 엄마의 표정에는 걱정이 잔뜩 묻어나는데 그 옆에 있는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은 난감한 기색이다. 잠시 뒤 엄마가 나가고서도 아이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기를 꺼렸다. 한참만에 나온 아이의 대답은 엉뚱하게도 축구팀을 어떻게 만들까 여러 가지로 고민하느라 잠을 못 이뤘다고 한다. 한번 진 게임을 만회하려면 멤버를 바꿔야 하는데 다른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점이 이 아이의 잠 못 이루는 고민이었다. 물론 축구를 하느라 가끔 집에 늦게 오는 아들을 보기 싫어하는 엄마에게 진실을 알릴 수는 없었다. 그저 원래 이 나이 때에는 많은 고민을 하기 마련이니 모른 채 넘어가시라고 조언했다.
아이들도 다양한 생각을 하며 갖가지 고민을 한다. 부모들 역시 어렸을 때는 마찬가지였을 터이다. 어른이 되어서 생각하면 별 거 아닌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무척 심각했다. 반면 순진해 보이지만 인생사의 정곡을 찌르는 고민도 있어 나중에 돌이켜볼 때 오히려 그 시기가 부러워지기도 한다. 이런 고민들이 모여서 마음이 성숙해지고 인격을 형성한다.
그럼에도 아이들의 고민을 편하게 바라보지 못하는 부모가 적지 않다. 아이들이 심각하면 뭔가 불안해지고, 혹시 엉뚱한 길로 빠지지 않을까 염려한다. ‘애들이 고민할 것이 뭐가 있어서, 지금 할 일이 태산인데 왜 이런 쓸모없는 생각에 시간을 낭비해.’ 이렇게 말하는 부모들의 마음속에는 자신의 손바닥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아이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이런 부모는 아이들을 손바닥 속의 영웅으로 만들고 만다.
아이들은 세계와 부딪히며 자기만의 사고를 형성한다. 이러한 사고가 모여서 그 아이의 인격이 된다. 독서·논술 사교육은 인위적인 조건을 제시한 뒤 남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훈련시킨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것은 실제 상황에서 닥친 문제에 대해 깊게 고민하고 해결 방향을 찾아나간 경험이다. 이러한 경험을 갖지 못한 아이는 늘 문제를 다른 사람의 생각에 근거해 풀려고 하는 생명력 없는 아이가 된다.
누구나 인생의 어느 시기에는 다양한 고민 속에서 잠을 못 이루기도 하고, 생각에 빠져서 생활이 흐트러지기도 한다. 부모가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같이 고민할 필요는 없다. 아이들에게 그런 고민의 시간이 있으려니 하고 눈감아주면 된다. 부모도 다 거친 시기이니 자신의 아이들도 자라고 있구나 생각하며 흐뭇해하면 된다. 물론 아이의 고민이 너무 오래 가면 그때는 이야기를 시도해야 한다. 고민은 고민한 자에게 괴로움도 주지만 마음의 성장이란 선물을 주기 마련이다. 부모가 할 일은 아이와의 가까운 끈을 유지하여 아이가 정말 힘들 때 부모를 외면하지는 않도록 하는 것이다.
서천석 소아정신과 전문의·행복한아이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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