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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공동체끼리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

등록 2007-02-04 21:48수정 2007-02-04 21:56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다. 인간이 모여 공동체를 이룬다. 그런데 공동체끼리도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 <원더풀 데이즈>는 인류가 한 번도 실현하지 못했던 ‘공동체 차원의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한겨레> 자료사진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다. 인간이 모여 공동체를 이룬다. 그런데 공동체끼리도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 <원더풀 데이즈>는 인류가 한 번도 실현하지 못했던 ‘공동체 차원의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용석 교수의 대중문화로 철학하기 / 김문생의 〈원더풀 데이즈〉

2003년 개봉을 앞두고 김문생 감독은 <원더풀 데이즈>는 어떤 이야기인가라는 질문에, “사랑 이야기, 애절한 사랑 이야기”라고 답했다. 물론 이 작품에는 사랑 이야기가 있다. 어릴 적 소꿉 친구였으나, 커서는 어쩔 수 없이 서로 쫓고 쫓기는 적이 된 수하와 제이의 사랑 이야기. 여기에 제이를 짝사랑하는 시몬이 끼어들어 운명의 삼각 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이 작품을 좀 더 깊게 들여다본다면, 사랑의 주제는 남녀 사이의 애정을 넘어서 좀 더 복합적인 차원에서 전개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원더풀 데이즈>에서는 개인의 사랑과 공동체 차원에서 사랑의 문제가 중첩되고 있다. 이 작품의 플롯뿐만 아니라 이미지에서도 이 중첩 구조는 드러나는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다. 인간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룬다. 그런데 공동체끼리도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

때는 2142년, 환경 오염으로 지구에는 대재앙이 들이닥치고, 재앙을 예측했던 사람들은 오염 물질을 먹고 자라는 도시 에코반을 만든다. 그들 입장에서 에코반은 인류 문명을 지키기 위한 또 하나의 방주다. 시간이 흐르고 난민들이 에코반에 몰려오지만, 이 미래의 방주는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난민들은 어쩔 수 없이 에코반 주위의 유전 지대인 마르에 정착한다.

가이아(Gaia) 이론에 의하면 지구는 생명체처럼 자기 정화 능력이 있다. 인류가 지구 환경을 오염시켜 재앙이 오지만, 오염 물질을 배출하는 문명이 거의 소멸되면서 지구는 지속적인 자정(自淨) 활동으로 환경을 복원시켜 간다. 에코반 주위의 환경도 이런 자정 활동으로 복원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에코반에게는 커다란 위기가 된다. 주변 환경에서 오염 물질이 계속 공급돼야만 에코반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에코반 사람들은 마르 지역을 파괴하고 불태워서 오염 물질을 늘리는 계획을 추진한다.

인간은 서로 사랑하는 존재
‘사랑이 공동체 구원한다’ 강조


에코반(Ecoban=Ecology+Urban)은 그 이름처럼 ‘생태 도시’다. 지구 전체가 오염된 상황에서는 일종의 유토피아와 같은 곳이다. 에코반 사람들은 고도의 과학·기술로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이상향을 건설한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주위에 있는 다른 인간 공동체를 괴롭히고 파괴해야 한다. 유토피아의 건설과 유지가 다른 공동체의 디스토피아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공동체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미래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인간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이기적이면서도 이타적으로 남을 배려할 수 있지만, 공동체를 이루면 전혀 그렇지 못하다. 이는 원시 부족에서든 현대 국가에서든 미래 공동체에서든 마찬가지다. 더구나 국가적 차원의 공동체는 내부적으로 강하게 뭉칠수록 외부적으로는 철저하게 배타적이 된다. 한 나라의 사람은 다른 나라 사람을 사랑할 수는 있지만, 자기 나라만큼 다른 나라를 사랑한다고 당당하게 고백하지 못한다. 이것은 집단이기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개인의 이기주의는 쉽게 비난받지만, 국가의 집단이기주의는 허용되는 것을 넘어서 찬양받기까지 한다.

이런 성찰은, 왜 지금까지 인류가 상상해왔던 이상향이 거의 고립된 지역에 건설된 공동체인지, 그 해답의 열쇠가 될 수도 있다. 토머스 모어가 상상한 ‘유토피아’는 고리 모양의 섬이고, 프랜시스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도 거대한 섬이며,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도 타프로바네라는 섬에 있다. 이런 공동체는 당연히 주위의 다른 공동체를 희생시키며 이상향을 유지할 필요도 없고, 자신이 다른 공동체로부터 피해를 입을 일도 없다. 그러므로 이들은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이상적 공동체로서 정통한 가치를 획득한다. 주인공 수하도 이런 유토피아를 꿈꾼다. 그는 눈부시게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다는 지브롤터 섬의 지도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고립된 공동체는 말 그대로 이상향일 뿐이다.

수하는 원래 에코반 출신이지만, 어떤 사건에 연루돼 그곳에서 쫓겨나 마르 지역에 산다. 에코반의 정찰대원인 제이는 수하가 죽은 줄 알았지만, 마르의 전사로 활동하는 그를 다시 만나 깊은 사랑에 빠진다. 서로 사랑하지만 자신들이 지키는 공동체의 적으로서 맞서게 된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제이는 에코반 지도부의 계획에 회의를 느낀다. 정찰대장 시몬은 에코반을 지키는 임무에 투철하다. 더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제이와 수하의 재회가 그녀를 혼란에 빠트리는 것 때문에 괴로워한다. 이야기의 대단원에서 수하는 에코반의 중앙 통제 시스템인 델로스 타워를 폭파하려 한다. 시몬은 수하를 제거하려 한다. 제이는 시몬의 총을 맞고 쓰러진 수하 대신 폭약을 장치하려 한다. 시몬은 차마 그녀를 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순간 시몬과 제이는 에코반의 간부가 쏜 총에 맞아 쓰러진다.

수하, 제이, 시몬은 모두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다.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는 점점 무중력 상태가 되는 델로스 타워에서 춤을 추듯 공중에 떠다닌다. 부유하는 붉은 피, 이 애절하면서도 영혼을 압도하는 영상과 함께 세 사람은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는다.

김용석/영산대 교수
김용석/영산대 교수
인간이 뜨겁게 열정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몸에 붉은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집단을 결속하는 공동체의 가상 혈관에는 피가 흐르지 않는다. 이념이 흐른다. 냉혹한 이해타산의 숫자 무리가 흐른다. 하지만 붉은 피를 흘릴 수 있는 인간의 사랑이 결국 공동체를 구한다. 우리가 기원하는 멋진 세상의 건설과 ‘멋진 날들’의 도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만큼이나 공동체 차원에서의 사랑이 가능한지에 달려 있다. 공동체 사이의 뜨거운 사랑, 이것은 지난 수천 년 동안 인류가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원더풀 데이즈>는 21세기 내내 인류가 풀어야 할 사랑의 가장 깊고도 실현하기 어려운 차원을 복합적으로 제시하고 있는지 모른다.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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