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최근 범여권에서 ‘박원순 역할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시민사회 진영의 ‘간판 스타’ 중 한 명인 박원순 변호사가 난마처럼 얽힌 범여권의 후보 구도를 새로 짜는 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게 역할론의 요지다. 박 변호사 본인이 직접 후보로 나서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는 만큼, 사심 없이 범여권과 시민사회세력을 한데 묶어낼 수 있을 것이란 얘기다.

대표적인 ‘박원순 역할론’ 주창자인 정대화 상지대 교수는 “박 변호사가 시민운동에 오랫동안 몸담아 오면서 이런저런 기반이 상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본인이 후보로 나서지 않더라도 새로운 ‘판’을 짤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진보·개혁 세력의 대선 승리를 목표로 하고 있는 ‘창조한국 미래구상’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민생정치모임’의 최재천 의원은 최근의 시민사회 진영이 △노무현 대통령 지지 △범여권에 대한 비판적 지지 △민주노동당 지지로 삼분돼 있다며, “박 변호사가 진보개혁 세력의 대선 승리를 위해 시민사회를 통합시키고 중재해줬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최 의원은 열린우리당을 탈당해 ‘개혁적 통합신당’을 추진하고 있다.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요청한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참신성 있는 정치권 바깥의 후보들이 전격적으로 결합하는 후보 중심 신당을 세워야 한다. 박 변호사가 신당의 토대를 닦아준다면 정치권 밖의 잠재적 대선 주자들의 합류가 훨씬 쉬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범여권 일각에서는 박 변호사를 매개로, 친시민사회 성향의 인사를 대선 후보로 묶어 세우자는 주장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범여권 통합을 추진하는 여러 진영에서 동시에 ‘박원순 역할론’이 나오는 건, 현 상황으론 지지부진한 통합 논의에 돌파구를 마련하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다. 통합의 전기를 마련하려면 범여권의 잠재적 대선 주자로 꼽히는 손학규 전 경기지사,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 한명숙 전 총리 등을 한자리에 묶어야 하는데 이런 작업을 할 수 있는 적임자가 박 변호사란 것이다.

정치인이 직접 나설 때는 그 동기의 순수성이 의심받으면서 정 전 총장이나 문 사장 같은 이들이 참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문국현 사장은 최근 사석에서 정치 참여 가능성을 부인하면서도 “박 변호사는 (그런 역할을 할) 역량이 있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정작 박 변호사는 ‘역할론’에 상당히 회의적이다. 박 변호사는 15일 <한겨레>와의 전화통화에서 “대선 관련 일을 할 생각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대선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겠다고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런 걸 하려고 했는데, 내가 (대선 후보라는 식의) 온갖 얘기가 나오면서 어렵게 된 것 같다”며 “누군가 나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정치권 일각에서 그를 대선 후보로 거론하면서 오히려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는 얘기다.

그는 또 “나는 특정 정파를 위해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며 “내가 일을 하기에는 상황이 변해 버린 것 같다”고도 했다. 그는 대선을 앞두고 진보·개혁 세력이 지지부진한 데 대해 “다 잘 될 것이다. 일이라는 건 되려고 하면 되는 것이다”라고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박 변호사의 이런 태도로 보면, 그의 역할론은 아직 ‘기대’일 뿐 현실화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다만 앞으로 상황 전개에 따라, 진보·개혁 진영에 대한 그의 애정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게 범여권의 희망 섞인 평가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