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배구가 새해 초부터 시끄럽다. 2년 전 학폭(학교 폭력) 논란 이후 최대 이슈다. 이번에도 주인공은 여자부 흥국생명이다. 흥국생명은 학폭 논란의 중심에 있던 이재영·이다영 쌍둥이가 뛰었던 팀이자 올 시즌 한국에 복귀한 김연경 소속팀이다. 이번 시즌 리그 2위를 달리고 있는 이 팀은 현재 정식 감독이 없다. 감독대행을 포함해 1주일 만에 4명이 사령탑을 맡았다. 김연경은 “이런 팀에서 뛰는 게 부끄럽다”고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흥국생명에서 벌어진 일을 취재기자 시각으로 톺아봤다.
시즌 중반, 리그 2위 감독을 내치다
시작은 감독 경질이었다. <중앙일보>는 2일 흥국생명이 권순찬 감독과 결별한다고 했다. 눈을 의심하게 하는 보도였다. 권 감독은 지난해 4월 흥국생명
사령탑에 부임했다. 8년 동안 팀을 지휘했던 박미희 감독이 떠난 뒤 흥국생명이 선택한 새 사령탑이었다. 권 감독과 함께 백년대계를 쓸 듯했다. 그런데 권 감독이 정규리그 반환점(3라운드)을 돈 시점에
돌연 팀을 떠난다니. 겨우 부임 8개월 만이다. 흥국생명은 김여일 단장도 권 감독과 함께 사임한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결별 소식에 배구계가 들썩였다. 구단이 당일 아침 갑작스럽게 권 감독에게 경질을 통보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앞서 흥국생명은 권 감독을 선임하며 “선수들과의 소통, 과학적 분석과 체계적 훈련 등을 통해 흥국생명 배구단을 새롭게 바꿀 적임자”라고 했다. 구단이 이런 감독을 전격 경질했다면, 선임 때와 판단이 크게 달라진 부분이 있어야 했다.
성적 문제는 아니었다. 흥국생명은 리그 2위였다. 지난 시즌 최종 성적 6위보다 4단계가 뛰었다. 더욱이 불과 3일 전에 리그 선두
현대건설을 꺾으며 기세를 탔다. 1위와 승점 차이는 3점이었다. 선수들과 소통 문제도 아니었다. 오히려 선수들은 경질에 반발했다. 선수들은 경기 보이콧까지 고려했다. 상승세에 올라탄 팀이 감독 경질이라는
변수를 스스로 만든 셈인데, 마땅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배구 현장을 수십 년 동안 취재해온 선배 기자는 “이 결정을 누가 이해하겠느냐”라고 했다.
해명에 더 커진 논란…‘개입이지만 개입은 아니다’
흥국생명은 2일 보도자료를 내 “구단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부합하지 않아 부득이하게 권순찬 감독과 헤어지기로 결정했다”고 전했다. 다만 구단과 권 감독이 어떤 면에서 방향성이 달랐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부족한 설명은 의혹을 잠재우지 못했다. 더욱이 여러 언론을 통해 구단 윗선에서 선수 기용 등 경기 운영에 개입했다는 보도가 나오며 논란은 더욱 거세졌다.
사태가 커지기 시작했다. 흥국생명과 지에스(GS)칼텍스가 맞붙은 5일 인천 삼산체육관은 취재진으로 북적였다. 신용준 흥국생명 신임 단장은 경기 전
기자간담회를 자청했다. 신 단장은 “선수 기용 개입은 없었다”라며 “로테이션 문제를 두고 갈등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또 “(로테이션에 관해) 팬들도 요구가 많았다. (전임 단장이) 우승을 위해 조언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해명은 오히려 불길을 키웠다. 로테이션은 배구에서 서브 순서를 결정한다. 코트에 있는 6명이 시계 방향으로 한 자리씩 이동하고, 가장 오른쪽에 있는 선수가 서브한다. 자리 배치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야구에서 타순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간 권 감독은 팀 주포인 김연경과 옐레나를 모두 전위에 뒀는데, 구단은 김 단장이 둘을 전위와 후위에 나눠두자고 주장했다가 권 감독과 갈등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신 단장은 “개입은 아니다”라고 부인했지만, 결국 구단 윗선이 전술에 개입했다는 뜻이었다.
흥국생명 옐레나(왼쪽)와 김연경이 어깨동무하고 있다. 한국배구연맹 제공
유튜브가 감독보다 낫다는 흥국생명
“팬들도 전위 문제를 지적했다”는 신 단장 발언도 논란을 키웠다. 물론 팬은 프로스포츠를 이루는 근간이다. 하지만 각 종목엔 전문가가 있다. 팬 여론은 널리 듣되, 경기 운영은 전문가가 해야 한다. 그런데 흥국생명은 전술에 대한 팬 의견을 감독 경질 이유로 들었다. 기자들은 ‘팬 요구를 어떤 기준으로 측정하고 취합하느냐’고 물었다. 신 단장은 “유튜브에서도 팬들이 그런 얘기를 했다”라며 “주변 분들도 많이 얘기한다고 알고 있다”고 했다. 그는 ‘유튜브가 감독보다 낫다는 말이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했다. 논란이 커지자 팬을 방패막이로 썼고, 기자들이 추궁하자 무리수를 뒀다.
팬 여론을 이유로 들었지만, 막상 팬들은 생각이 달랐다. 이날 경기장에서 만난 팬들 의견을 요약하면 “상승세에 왜 감독을 경질하느냐. 선수들이 혼란에 빠질까 걱정스럽다”였다. 이날 인터뷰 요청을 평소보다 몇배로 많이 거절당했다. 언론 보도가 선수들에게 악영향을 줄까 걱정하는 ‘팬심’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일부 팬은 “행복배구”와 “팬들은 선수들을 응원하고 지지합니다”라는 글귀가 앞뒤로 적힌 클래퍼를 배포했다. 직접 논란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선수 지지를 통해 구단을 비판했다. 묘수였다.
더욱이 경기 뒤 승자 인터뷰에 나선 김연경과 김해란은
구단 윗선에서 선수 기용에 개입했다고 폭로했다. 구단 해명과 정반대였다. 김해란은 “선수들도 알고는 있었다”고 했다. 김연경은 “(윗선에서) 원하는 대로 하다가 경기를 진 경우도 있었다. 이야기하는 게 부끄럽다”고 했다. ‘이번 시즌에도 그런 패배가 있었냐’고 집요하게 묻자 김연경은 “이번 시즌에도 있었다”고 했다. 그는 “이거 청문회 아니죠?”라고 덧붙였다. 김연경표 농담은 여전했지만, 다른 때와 달리 눈동자가 떨리고 얼굴이 어두웠다. 해야 할 질문이었지만 미안했다.
한 관중이 5일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서 열린 2022∼2023 V리그 여자부 흥국생명과 지에스칼텍스의 4라운드 첫 경기 때 선수들을 지지하는 문구가 적힌 클래퍼를 들고 있다. 연합뉴스
흥국생명 김해란(왼쪽)과 김연경이 5일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야기하고 있다. 이준희 기자
재발방지 약속했지만…여론은 싸늘
선수들까지 반박에 나서자 구단은
사과했다. 임형준 구단주와 신용준 신임 단장은 10일 “배구팬들과 선수단에게 진심으로 사죄드린다”고 했다. 이들은 “최근의 사태는 배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경기운영 개입이라는 그릇된 방향으로 표현된 결과로써 결코 용납될 수 없고, 되풀이되어서도 안 될 일”이라고 했다. “앞으로 경기운영에 대한 구단의 개입을 철저히 봉쇄하고 감독의 고유 권한을 전적으로 존중할 것”이라고 했다.
폭풍우는 지나갔지만, 순항하던 흥국생명은 이미 난파선이었다. 2일 권 감독 경질 뒤 감독대행을 맡은 이영수 수석코치는 지에스칼텍스전 뒤 자진해서 사임했다. 6일 김기중 전 코치를 새 감독으로 선임했지만, 선수단 불신과 여론 부담에 밀려 구단 사과문이 나온 10일
감독직을 포기했다. 현재 흥국생명은 김대경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고 있다. 감독 선임이 절실하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된 자리를 맡을 사람이 있을지조차 미지수다.
선수들 투혼 덕에 성적을 유지하고 있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다.
여론은 싸늘하다. 구단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사실 흥국생명은 지독한 감독 잔혹사로 유명했다. 2006년 리그 1위를 달리던 고 황현주 감독을 시즌 도중 해임한 게 신호탄이었다. 구단은 후임을 맡은 김철용 감독을 2006∼2007시즌 내보내고, 다시 황 감독을 데려왔지만 2008∼2009시즌 그를 또 경질했다. 이승현(2008 ∼2009시즌 ) , 어창선 (2009 ∼2010시즌 ) , 차해원 (2012 ∼2013시즌 ) 감독도 모두 시즌 중 팀을 떠났다 . 임기를 채운 건 1년 단기계약 반다이라 마모루 (2010 ∼2011시즌 ) , 류화석 (2013 ∼2014시즌 ) 감독과 유일하게 장기집권한 박미희 감독뿐이다 .
배구계에선 모기업 태광그룹 윗선이 선수 기용 문제에 간섭하고, 입맛에 맞지 않는 감독은 교체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신 단장은 기자들과 첫 만남 때 “저희 흥국생명 사람들치고 배구에 관심 없는 사람이 없지 않으냐”고 했다. 많은 관심이 풍부한 지원에서 그친다면 다행이다. 문제는 탄탄하지 않은 프로스포츠 기반과 기업을 사주 개인 소유로 여기는 한국 사회 풍토가 맞물려 부조리극을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허민 전 키움 히어로즈 이사회 의장의 야구단 사유화가 대표적이다.
허민 전 키움 히어로즈 이사회 의장이 2019년 2월17일 미국 애리조나주 피오리아 스포츠 컴플렉스에 꾸려진 키움 히어로즈 스프링캠프에서 청백전 투수로 나서서 공을 던지고 있다. 피오리아/연합뉴스
더는 김연경이 부끄럽지 않도록
“부끄럽다.” 김연경이 했던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는 “팬들이 우리를 미워할까 봐 걱정스럽다”고도 했다. 올림픽 메달을 놓쳤을 때도, 눈물은 흘릴지언정 당당했던 그였다. 정정당당하게 최선을 다했기에, 팬들 마음이 떠날까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김연경이 감독이 아닌 구단 윗선 뜻에 따라 코트에 설 때 느꼈을 비참함이란…. 왜 김연경이 한국에 돌아와서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할까. 착잡했다.
김연경이 2021년 8월8일 일본 도쿄 아리아케 경기장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여자배구 세르비아와 동메달 결정전에서 0-3으로 패한 뒤 표승주와 포옹하고 있다. 도쿄/연합뉴스
김연경은 연초 장염 증세가 있었지만, 논란이 터진 뒤 첫 시합인 5일 경기에 출전했다. 그는 “아파서 훈련을 못 했기 때문에 오늘 경기 뛸지 안 뛸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이슈가 이슈인 만큼 제가 안 뛰면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같이 고생한 선수들이 있는데 목표가 어느 정도 가까워진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아쉬움이 남으면 안 될 거 같아서 같이 힘내서 했다”고 말했다. 무거운 책임감이다.
그 책임감을 내려놓으라고는 못 하겠다. 배구를 사랑하는 만큼 책임 또한 짊어졌을 테니. 그러나 김연경이 느낀 부끄러움은 제 자리를 찾아갈 시간이다. 구단을 자기 장난감처럼 다룬 자들에게. 문제가 생기자 팬을 방패로 삼았던 이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감시해야 하는 나에게.
givenhapp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