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네이버 노동조합 기자회견. 연합뉴스
1년 전 경기 성남시 분당구 네이버 본사 사옥 로비에는 이 회사 임직원들이 가져온 흰 국화꽃이 쌓였다. 지난해 5월25일 과도한 업무 압박 등을 호소하며 사망한 네이버 직원을 추모하기 위한 임시 분향소였다. ‘신의 직장’으로 불리던 대형 인터넷기업에서 터진 직장 내 괴롭힘 사건에 아이티(IT)는 물론 다른 업계 회사원들도 큰 충격을 받았다.
파장이 컸던 만큼 사건 이후 1년 동안 아이티 기업의 조직문화에 큰 변화가 일었다. 성과경쟁 등으로 파편화됐던 아이티 노동자들이 회사 문제와 처우에 제 목소리를 내고, 회사도 이를 경영 방침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국내서 손꼽히는 대기업이 된 아이티 회사들이 기업 규모에 걸맞는 조직문화를 갖춰야 한다는 게 구성원들의 주문이다.
“조직문화에 목소리 내야 내 동료 지켜”
5일 아이티 업계 노사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지난 1년 동안 네이버·카카오 등 인터넷 기업들에서 직원들이 회사 문제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밝히는 문화가 자리잡았다. 이전까지는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인 ‘블라인드’ 등에서 직원들이 제각각 불만을 내는 것 외에 ‘대외적인’ 문제제기가 드물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사내 게시판에 실명 의견을 내거나, 언론·시민사회 등을 통해 회사 문제를 공론화하는 이들이 늘었다.
직원 사망 사건 직후인 지난해 6월 네이버 임직원들이 정치권에 회사의 괴롭힘·격무 관행을 알리는
‘릴레이 이메일 청원’을 쓴 게 대표적이다. 당시 직원들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국회의원 16명과 네이버 부사장 출신의 윤영찬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정치인 20여명에게 이메일 청원서를 보냈다. 사건 책임자에 대한 조사와 형사처벌, 아이티 노동자들의 격무 구조 개선 등을 호소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에 성남이 지역구였던 김은혜 당시 국민의힘 의원, 윤영찬 의원 등이 답장을 써 “아이티 노동환경을 챙기겠다”는 뜻을 밝혔다.
직원 사망 당시 그룹의 인사 책임자였던 채선주 전 부사장의 사내이사 선임을 막으려는
‘반대표 인증운동’은 지난 3월 벌어졌다. 각자가 스톡그랜트 등으로 보유한 회사 주식으로 정기 주주총회에서 사내이사 선임 안건에 반대표를 던진 뒤, 익명으로 인증하는 방식이었다. 직원들의 ‘개인플레이’ 성향이 특히 강한 것으로 알려져온 네이버에서 ‘집단행동’이 이어지자, 업계에선 이례적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여기에 참여했던 네이버 한 직원은 <한겨레>에 “지난해 사건 이후, 조직문화가 건강하지 않으면 소중한 동료를 잃을 수 있다는 공감대가 생겼다”고 말했다.
카카오의 경우 지난 연말 류영준 당시 대표이사 내정자의 이른바 ‘주식 먹튀(먹고 튀기)’ 논란이 터지자 직원들이 회사 안팎에 이 문제를 고발하고 나섰다. 노동조합인 ‘크루유니언’이 사내망에 류 내정자의 사퇴를 촉구하는 게시물을 올리자, 임직원 수백명이 실명으로 지지를 표했다. 일부 직원들은 윤석열 당시 대선후보 캠프 등을 찾아가 임원의 주식 매도를 제한할 제도 개선을 호소하기도 했다.
“우리는 ‘팀 네이버’” 소통 나선 회사들
회사들의 태도도 바뀌는 추세다. 경영진이 적극적인 내부 소통을 약속하며 ‘민심 달래기’에 나서고 있다.
최수연 네이버 대표이사는 지난 3월 취임 이후 사내외 간담회에서 노동조합인 ‘공동성명’을 여러차례 “대화 파트너”로 소개했다. 조합을 임직원의 대표로 인정하고 조직문화·처우 개선 등의 과제를 한 테이블에서 논의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그는 지난달 기자간담회에서 “네이버에는 노동조합이라는 파트너가 있기에, 취임 후 노동조합을 대화 상대방으로 인정하는 것부터 (조직문화 개선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새 경영진이 지향하는 회사의 조직문화를 ‘팀 네이버’라는 말로 요약해 표현했다. 수직적인 의사결정 구조와 상호 경쟁 위주의 문화를 고쳐 구성원들의 소속감·팀웍을 높이겠다는 구상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네이버는 최근 공동성명과의 단체협약에서 직장내 괴롭힘 사건을 예방·조사하는 상시기구를 대표이사 직속으로
신설하기로 합의했다. 아이티 업계에서 이런 기구를 둔 곳은 카카오와 네이버뿐이다.
직원들의 반응은 긍정적인 편이다. 네이버의 한 직원은 “이전에는 임원들이 사내 간담회를 열고도 건의사항에 대해 ‘검토·고려·고민하겠다’는 말만 반복해 직원들의 실망이 컸다”며 “현 경영진은 난감한 질문도 거르지 않고 답하는 편이라 이전보다 소통에 능하다는 평”이라고 전했다. 오세윤 공동성명 지회장도 “회사가 노사간 단협을 통해 직장 괴롭힘 조처기구를 신설하고 주기적으로 조직문화를 진단하기로 한 점 등은 괄목할 만한 변화다. 회사가 앞으로도 노동조합과의 대화로 새로운 노사 관계를 열어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사내 최대 화두인 임금 정책에도 직원 여론이 크게 반영되는 모습이다. 그간 아이티 대기업들은 ‘근로 의욕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대체로 기본급 인상폭을 낮게 제한하고 급여에서 인센티브(성과급) 비중을 높여왔다. 근무 평정에 연동된 스톡옵션 등을 월급 대신 늘리려는 곳들도 많았다. 예컨대 지난해 네이버에서는 ‘주식 등이 아닌 기본급 인상으로 성과를 보상해달라’는 직원들의 요구에 이해진 네이버 창업주 겸 글로벌투자책임자(GIO)가 “일괄적인 연봉 인상이 건강한 방법인지 고민된다”고 밝혀 직원들의 반발을 산 바 있다. 카카오에서도 김범수 전 이사회 의장 겸 창업주가 직원들의 비슷한 요구에 대해 “나는 공산주의보다 자본주의가 맞다고 생각한다. 회사는 (성과를 균등하게 나누는) 엔(N)분의 1로 운영될 수 없다”고 답해 논란이 일었다.
반면 올해는
카카오·네이버·
라인 등이 노동조합과의 임금 협상에서 임직원 연봉 예산을 각각 두자릿수 비율 이상 올리기로 합의했다.
카카오페이는 개인마다 1000만원, 카카오와 라인은 최소 500만원 인상을 보장하는 등 소수 고성과자에게만 보상이 쏠리지 않도록 ‘최저 인상폭’도 뒀다. 네이버의 경우 애초 회사가 개인마다 양도제한조건부 주식(RSU) 200만원어치를 연봉 대신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기본급을 높여달라는 사내 여론을 받아들여 입장을 바꿨다. 최수연 네이버 대표는 기자간담회에서 “‘개발자·기획자 등 아이티 인재들에게는 자신의 몸값이 올랐다는 체감이 중요하다’는 노동조합의 입장을 받아들여 임금협상 합의에 도달했다”고 설명했다.
‘격무 일상’ 스타트업·중견사들도 바뀔까
아이티업계 노사가 해결해야 할 숙제도 여전히 남아 있다. ‘크런치모드’로 불리는 장시간 격무 관행이 대표적이다. ‘네카라’(네이버·카카오·라인플러스) 등 대기업들이 시작한 노사 소통이 스타트업·중견사나 게임업계로 이어질지도 관건이다.
지난해 12월 성남시가 판교테크노밸리 등 성남지역 아이티 회사 노동자 2300여명을 설문한 결과, 응답자의 51%가 ‘최근 1년간 야근·특근을 반복하는 크런치모드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이들이 크런치모드를 겪은 기간은 연 평균 34일이었다. 응답자 46%는 퇴근 뒤나 휴일에 회사 메신저 등으로 상사에게 업무지시를 받았다. 특히 증시 상장 등을 앞둬 실적 압박이 심한 스타트업에서는 주 50시간 이상의 격무가 여전하다는 게 아이티 노동자들의 말이다. 높은 업무강도로 유명한 핀테크회사 토스의 경우 업계에서 ‘토징어게임’(드라마 <오징어게임>과 토스의 합성어), ‘토양어선’(원양어선과 토스의 합성어)이라고 불릴 정도다.
카카오 크루유니언의 서승욱 지회장(화섬식품노동조합 아이티위원회)은 “연장근무 수당을 정액으로 계산하는
포괄임금제 등을 폐지해 사업주 입장에서도 임직원의 초과근무를 단축할 유인을 만들어야 한다”며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정하는 유연근무제 역시 노동시간을 줄이는 방향으로 적용돼야 한다”고 말했다.
천호성 기자
rieux@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