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은 정치적으로 예민한 경제 문제다. 국회에서 세법이 개정될 때마다 납세자들의 이익과 손실이 엇갈리는 터라 격렬한 다툼도 일어난다. 증세에는 ‘세금폭탄’이라는 무시무시한 표현이 늘 따라붙는다. 감세는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자, 2년 연속 ‘부자 감세’ 논란이 일고 있다.
통상 감세는 ‘보수의 정책’으로 간주되지만, 실상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미묘하다. 대규모 감세를 항상 보수 쪽이 추진한 것도 아니고, 보수가 항상 감세에 찬성했던 것도 아니다. 보수 내에서도 감세에 대해 이견이 발생해 서로 대립하기도 한다. 감세의 대표 사례로 쌍둥이처럼 언급되는 레이건과 대처의 조세 개혁은 비슷한 점보다 차이가 더 크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시장 반응과 여론도 매번 같지 않았다. ‘감세의 정치’가 흥미로운 까닭이다. 감세의 정치를 두 차례 나눠 살펴본다.
■ 다수당 민주당이 레이건 손을 들어주다
‘감세 정치’의 대표로 꼽히는 ‘레이건 사례’를 보자. 로널드 레이건(1911~2004)은 1980년 대통령 선거 유세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감세를 주장한 데 이어 취임하자마자 ‘경제회복세법’(Economic Recovery Tax Act of 1981, 레이건 1차 감세)을 입법했다. 근로소득세 최고세율을 70%에서 50%로, 최저세율은 14%에서 11%로 낮춘 게 이 법의 핵심이다. 양도소득세도 최고세율을 28%에서 20%로 인하했다. 소득세 과표구간을 물가상승률에 연동하여,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과표구간이 자동 상향 조정되도록 한 내용도 담았다. 소득세, 법인세, 상속세 등의 손비와 공제도 정비한 터라 ‘감세의 종합선물세트’라는 평가를 받았다.
레이건은 재선된 후에는 ‘세제개혁법’(Tax Reform Act of 1986, 레이건 2차 감세)을 통해 소득세 최고세율을 28%까지 더 낮췄다. 취임 전에 비해 최고세율이 절반 이하로 낮아진 것이다. 법인세 최고세율도 레이건 임기 동안 46%에서 34%로 떨어졌다. 이 시기 미 상원은 공화당이 제1당이었으나 하원은 민주당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서 공화당 표만으로는 통과시킬 수 없었다. 경제회복세법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공화당의 감세 법안은 민주당 지미 카터 정부 시절(1977~1981)에도 발의된 바 있으나, 민주당 반대로 통과되지 못한 까닭이다. 카터 대통령은 거부권을 쓰겠다고 미리 선언하기까지 했다.
대선에서 레이건이 당선된 이후 민주당은 입장을 바꿨다. 1981년 경제회복세법은 하원 의장 팀 오닐(매사추세츠) 등 민주당 지도부가 협조하여 찬성 323 반대 107의 초당적 지지로 통과됐다. 1986년 세제개혁법은 하원 세입위원회 위원장인 민주당 댄 로스트(일리노이)가 법안을 발의했다. 사실 집권당이 감세를 추진할 때 야당은 굳이 반대할 정치적 인센티브가 없다. “70%의 세금을 죽인 것은 민주당이었다”라는 내용을 담은 노스웨스턴 대학 모니카 프라사드 교수의 폴리티코 기고문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자본 시장은 감세를 환영하기보다는 불안감을 드러냈다. 재정 적자 누적에 대한 우려로 레이건 대통령이 1981년 경제회복세법에 서명한 후 한달 만에 주가는 11% 하락했고, 장기 금리는 상승했다. 레이건 임기(1981~1989) 동안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적자는 평균 4%로 직전 8년 동안 평균 2.2%에 비해 거의 두배 가까이 치솟았다.
■ 레이건의 변심, 긴축의 경제학에서 기쁨의 경제학으로
사실 대규모 재정 적자와 건전성 악화는 과거 레이건이 가장 앞장서서 비판하던 사안이었다. 레이건은 공화당 내에서 온건파에 맞서 보수혁명을 주창한 상원의원 배리 골드워터(애리조나)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골드워터는 세금도 줄어야 하지만 지출 삭감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세금을 먼저 삭감한다면 재정 적자와 인플레이션에 시달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것이 공화당 보수파의 ‘긴축의 경제학’(economics of austerity)인데, 유권자들은 이를 인색한 스크루지로 생각하고 외면했다.
1964년 대통령 선거에서 골드워터는 보수혁명의 기치를 내걸고 공화당 후보가 되지만, 본선에서 조지아 등 단 다섯 개 주에서만 앞섰을 뿐 나머지는 모두 뒤져 선거인단 수 486 대 52라는 참혹한 패배를 당했다. 이 선거에서 골드워터의 핵심 운동원으로 참여했던 레이건은 1976년 대선에 본인이 나섰을 때도 여전히 긴축 노선을 견지했다. 레이건이 감세의 전제조건으로 연간 9백억 달러의 지출 삭감을 제의하자 공화당 내에 ‘레이건은 제2의 골드워터’라는 인식이 확산됐다. 레이건으로는 본선에서 이길 수 없다는 뜻이었고, 결국 레이건은 당내 경선에서 온건파 제럴드 포드에게 패배했다.
이후 절치부심하던 레이건에게 찾아온 기적의 한수가 바로 ‘래퍼 곡선’이었다. 1974년 리처드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 여파로 대통령 직을 사임한 후 직을 승계한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증세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도널드 럼스펠드(이후 포드와 아들 부시 대통령의 국방부 장관 역임)와 비서관 딕 체니(아들 부시 대통령의 부통령 역임), 월스트리트저널의 보수 논객 주드 와니스키는 시카고 대학 교수 아서 래퍼와 워싱턴의 한 식당에서 식사하며 포드의 증세안에 불만을 토로했다. 래퍼는 그 자리에서 세율이 0%면 세수가 없듯이, 세율이 100%일 때도 역시 세금을 한푼도 못 걷게 된다고 설명했다(아무도 일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냅킨에 그 유명한 래퍼 곡선(사진 참조, 이 냅킨은 진위 논란이 있지만 스미소니언 미국 역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을 그려가며 세율을 높일수록 경제활력이 줄어 세수는 더 감소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래퍼 곡선의 ‘정치적 가치’를 즉시 알아챘다. 와니스키는 이 가설의 열렬한 신봉자가 되어 네오콘의 대부인 어빙 크리스톨과 함께 월스트리트저널과 여러 잡지를 통해 래퍼의 감세론을 확산시켰다. 정치권에서는 공화당 하원의원 잭 켐프(뉴욕)와 상원의원 윌리엄 로스(델라웨어)가 이 주장에 기초해서 카터 대통령 시절 대규모 감세법안을 발의했다. 레이건은 1978년 당내 대선 후보 중 최초로 켐프-로스 감세법안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닉슨과 포드 대통령 시절 대통령 경제자문위원장이었던 허버트 스타인은 레이건이 신중한 ‘긴축의 경제학’에서 ‘기쁨의 경제학’(economics of joy)으로 넘어갔다고 비꼬았다. 기쁨의 경제학은 감세를 해도 재정적자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환상적 이야기라는 뜻이다.
■ 세율 낮추면 세수가 는다는 환상
래퍼 가설이 공화당 보수파에게 발상의 전환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세율 인하가 세수 증가로 이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니다. 당시 레이건 캠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앨런 그린스펀(이후 레이건에서부터 아들 부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19년간 연방준비제도 의장 역임)은 감세의 경제 활성화 효과에 의한 추가 세수는 삭감된 세금 중 20%에 불과하다고 계산했다. 그 외에도 레이건 선거 팀의 많은 경제학자들이 대규모 감세가 세입을 증가시킨다는 주장에 의문을 표했다. 이에 대한 확고한 옹호자는 래퍼와 켐프 의원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대규모 감세안이 채택될 수 있었을까?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하워드 베이커(테네시)는 감세를 도박이라고 불렀다. 긴축 주장으로는 당내 후보가 될 수 없었던 레이건과 그 지지자들은 도박에서 사실 잃을 것이 없었다. 도박의 결과 레이건은 대통령이 되고, 레이거노믹스를 시행했고, 막대한 재정 적자를 미국인에게 남겼다.
또한 전세계에 감세의 바람을 일으켰다. 미국에서는 아들 부시와 트럼프 대통령 시절 두 차례 감세가 있었고, 영국에서는 대처 외에 카메론과 트러스의 감세 시도가 있었다. 국내에서는 전두환부터 김영삼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세율이 인하되었다. 다음 컬럼에서는 이들을 살펴 본다.
신현호 경제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