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대형마트에 라면이 진열되어 있다. 연합뉴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18일 <한국방송>(KBS) 일요진단에 출연해 라면 가격 인하를 요구했다. 이어 한덕수 국무총리가 공정거래위원회에 라면값 담합 여부 조사를 주문했고, 농림축산식품부는 대놓고 제분업체 임원들을 불러 밀가루 가격 인하를 압박했다. 그 여파로 농심, 삼양식품, 오뚜기 등 라면 업체가 백기 투항해 줄줄이 가격을 낮췄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추 부총리는 지난 2월에도 국회 발언을 통해 소주 가격 인상 자제를 촉구한 바 있고, 국세청이 실태 조사를 하겠다고 나서 업계를 긴장시켰다.
재미를 본 정부는 최근 남양유업과 매일유업 쪽에 유제품 가격 인상 자제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시장에 대한 전방위적 개입을 하면서도 한사코 ‘가격 통제’가 아닌 ‘협조 요청’이라고 주장한다. 경제부총리와 주무 부처 요구를 압박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기업은 없고, 공정위와 국세청이 나서니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인플레이션은 순수하게 경제적 문제로만 봐야 한다는 경제학자들의 바람과 달리 오래전부터 정치적으로도 민감한 문제였다. 1970년대 미국의 대인플레이션기 닉슨과 카터 대통령의 행보나 2010년대 빵 가격 폭등이 초래한 아랍의 봄까지는 아니어도 인플레이션 정치는 여전하다.
✅ 공식 통계와 체감 물가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가계가 소비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을 중요도를 따져 가중치를 둬 계산하는데 품목과 가중치에 대해 사회적 합의는 어렵다. 공식 통계가 장바구니 물가나 체감 물가와 다르다는 언론 보도는 이것을 지칭한다. 애주가들에겐 소주 가격이 중요하지만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은 관심이 없다. 사교육비는 학생이 있는 집과 그렇지 않은 집에서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부잣집과 가난한집 장바구니도 비슷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집집마다 장바구니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모두가 동일하게 체감하는 물가지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성장과 거시경제 안정성을 책임지는 정책당국과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을 고민할 때는 식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소비재 가격(근원물가) 변화에 더욱 주목한다. 식품과 에너지는 상대적으로 경제 외부의 일시적 요인에 따라 변동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적 중요도는 이와 반대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식사 비용과 주유비 같은 것들이 중요하고 눈에 잘 띈다. 마트와 주유소에서 높은 가격에 망연자실한 소비자(이자 유권자)들에게 ‘경제학적으로 덜 중요하니까, 그걸 제외한 인플레이션을 먼저 보라’고 말하는 정치인은 없다. 미국 정치인들이 빈번히 ‘햄버거와 휘발유 가격에 분노’를 표하고, 한국 정치인들이 툭하면 ‘라면과 짜장면 가격에 경악’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 바이든 인플레이션 vs 푸틴 인플레이션
미국 유권자들은 2022년 11월 전국 규모 중간선거를 앞두고 진행된 여론조사에서 ‘투표할 때 가장 고려하는 요소’로 인플레이션을 꼽았다. 공화당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공화당 지도부는 인플레이션 원인이 바이든 행정부의 무책임한 대규모 재정 확대 때문이라며,
‘바이든 인플레이션’(Bidenflation)이란 말을 만들어 민주당에 맹공을 펼쳤다. 정치에서 논리를 ‘의인화’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다.
이에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반격에 나섰다. 다만 그 대상은 공화당이 아니었다. 전 정부(트럼프 정부) 책임으로 돌리기엔 옹색했던 터라 그 책임을 외부로 돌렸다. 바이든은
“인플레이션의 진범은 푸틴”이라고 외쳤다. 또다른 의인화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와 국제 곡물 가격이 폭등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는 주장이었다. 전쟁으로 고조된 미국인들의 반러시아 여론을 선거에 활용한 것이다. 또 ‘전쟁할 때 우리 편 장수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전통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하다는 풀이가 나왔다
✅ 탐욕 인플레이션
바이든 정부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소·돼지·닭고기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4대 회사가 위기 상황에서 막대한 이익을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정유사와 해운사도 에너지와 공급망 위기를 활용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연방거래위원회(FTC·한국의 공정위와 비슷한 구실을 하는 행정기구)와 해사위원회 등을 동원해서 압박했다. 정치인들도 기업의 탐욕(greed), 바가지요금(price gouging), 폭리(profiteering) 같은 거친 표현을 입에 올렸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 연구 등으로 인플레이션과 기업의 과다한 이윤추구의 관련성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기본적으로 거시경제 현상이다. 경제의 전반적인 과열과 냉각, 정부의 통화 및 재정정책, 거대한 공급충격(오일쇼크나 우크라이나 전쟁 등) 같은 것들에 의해 주로 결정된다. 독점 기업이 일부 시장에서 소비자들에게 피해를 줄 수는 있지만, 인플레이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경제학계의 지배적인 견해다.
지난해 1월 미국 경제학자
패널 조사를 보면, 인플레이션의 주요인이 기업의 시장지배력을 통해 이윤을 높인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반대(73%)가 찬성(7%)을 압도했다(‘불확실’이 20%). 하지만 대중의 인식은 이와 상당히 다르다.
지난해 2월 미국 여론 조사에 의하면 미국인 53%는 기업의 탐욕에 의한 가격 인상이 인플레이션의 주요인이라는 주장에 동의했다.
✅ 사라진 한국 야당의 물가 정치
추 부총리 발언은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표현한 바대로
‘정치적 말씀’이다. 그는 관료 출신이지만 동시에 재선 국회의원인 현직 정치인이다. 소비자물가지수에서 라면 가중치는 0.27%로 라면 가격이 전체적으로 5% 하락해도 지수에 미치는 영향은 0.01%에 불과하다. 더구나 한국은 올해 들어 인플레이션이 둔화되어 6월 소비자물가는 2.7%까지 떨어졌다. 추 부총리도 심지어 ‘물가 상승세는 확연히 둔화하는 모습’이라며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을 물가안정에서 경기제고로 전환하기까지 했다. 경제적 이유로 라면값을 누른 것이 아니라는 정황은 곳곳에 있다.
과거에도 물가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면 정부는 무리수를 두면서 정치적 행보를 보인 바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13년 1월 개별 공무원에게 각 물품의 가격 인상 책임을 묻게 하는 ‘물가관리 책임실명제’를 지시했으며, 문재인 정부는 2022년 2월 외식가격을 잡겠다며 ‘외식가격 공표제’를 도입했다.
이런 ‘정치 활동’으로 일시적으로 가격이 주춤하고, 국민이 위로를 받을 수도 있으나 ‘사회적 비용’이 없는 것이 아니다. 앞의 미국 경제학자 패널 조사에서 ‘가격 통제로 성공적으로 물가를 인하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동의하지 않는다가 63%로 ‘동의한다’(25%)와 ‘불확실하다’(12%)보다 월등히 높았다. 게다가 ‘동의’와 ‘불확실’이라고 답변한 경제학자들도 대부분 부작용이 클 것이라며 우려했다.
정부가 무리해서 시장 가격에 개입하면 야당은 비판하기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경제와 정치 어느 한쪽으로 치우지지 않게 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현재 진행 중인 라면값 소동에 대해 민주당의 입장과 대응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의아한 대목이다. ‘라면 값 50원 내리는 것으로 뭐가 되겠냐’며 추가경정예산 편성을 요구하거나, ‘정부가 기업을 압박해서 라면·과자 값을 내려 물가 지수에 영향을 미치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지속가능한 방법은 아니다’라는 발언 뿐이다. 추 부총리처럼 ‘물가 정치’를 적극적으로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추 부총리의 물가 정치를 정면 비판한 것도 아니다. 야당의 경제정책은 물론 정치전략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민주당이 물가 정치에 매번 소극적이었던 건 아니다. 과거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물가관리 책임실명제’에 대해 민주당 지도부가 나서 “자장면 사무관, 기름 서기관, 라면 국장으로 물가를 잡겠다는 것은 해외토픽감, 무책임의 극치, 시대착오”라고 질타한 바 있다. 지금은 무리한 시장 개입을 걱정하는 민주당 정치인은 모두 사라진 것일까.
신현호 경제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