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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레이건 ‘복지여왕’ 흉내…졸렬하고 위험한 국힘 ‘시럽급여’의 실패

등록 2023-08-03 06:00수정 2023-08-03 12:27

[전문가 리포트] 경제가 정치를 만날 때

“여자들, 계약 기간 만료자, 젊은 청년이 밝은 표정으로 실업수당을 받아 쉬면서 해외여행 가고 샤넬 선글라스를 구매한다.”

지난달 12일 국민의힘이 개최한 공청회에 참석한 고용노동부 공무원이 한 말이다. 국민의힘 박대출 정책위원장은 이를 받아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달콤한 보너스가 된 시럽(syrup)급여.” 실업수당이 새고 있다는 주장을 2000년대 중반 유행했던 ‘된장녀’ 프레임과 결부해 여론의 폭발성을 높이려는 시도였다. 박 의장은 이 표현이 내심 만족스러웠을까. 그날 저녁 산업계와 학계 인사를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다시 한 번 ‘명품 선글라스’와 ‘해외여행’을 강조했다. 같은 당 소속 임이자 의원은 고용보험이 “일하는 개미들보다 베짱이를 더 챙겨준다”고 했다. 임 의원은 노동운동가 출신이다.

사실 확인부터 해보자.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분석을 보면, 2014년 실업급여 신청자는 남성 51%, 여성 49%였다. 실업급여 신청에서 성별 차이는 거의 없는 셈이다. 하지만 부정수급자는 남성이 여성을 압도했다. 부정 수급률은 남성(4.3%)이 여성(2.3%)의 거의 두 배였다. 연령별로는 부정 수급률이 60대 이상(5.3%), 50대(4.7%) 순으로 높았다. 20대 이하는 1.6%로 가장 낮았다. 정부·여당 주장과는 정반대로 ‘젊은 여성’은 실업급여 부정을 저지르는 비율이 가장 낮았다.

■ 복지 여왕과 로널드 레이건

‘시럽 급여’의 원조에 해당하는 사건이 50년 전 미국에서 있었다. 로널드 레이건이 그 주인공이다. 캘리포니아 주지사로서 1976년 대통령 선거운동에 뛰어들면서 “시카고의 한 여성은 80개의 가명, 30개의 허위 주소, 12개의 복지 카드로 세금 한 푼 안 내고 15만 달러를 챙겨간다”고 공격했다. 레이건은 특정인을 지명하지 않았지만, 복지 사기에 연루된 흑인 여성을 지칭하는 ‘복지 여왕’(welfare queen) 프레임과 맞물리면서 여론을 뒤흔들었다.

레이건은 4년 후 선거에 또다시 복지 여왕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당선됐다. 이후 복지 여왕에 대한 공격은 미국 보수 정치인과 언론의 단골 메뉴가 됐다. ‘복지 사기를 일삼는 흑인 미혼모’라는 의미로 미국인의 고정관념 속에 자리 잡았다.

진보 진영은 반발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아니 굴복했다. 민주당 지미 카터 대통령은 1977년 “복지가 전반적으로 합리적이지도 정당하지도 않고, 반노동, 반가족적이며, 불공정하고 세금을 낭비한다”고 발언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1996년 재선에 도전하며 “우리가 알던 복지를 끝장내겠다”라고까지 했다. 복지 확대를 시도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본인이 흑인이라는 사실과 겹쳐서 임기 내내 복지 여왕 프레임에 시달렸다.

■ 안 먹힌 ‘시럽 급여’ 기획

‘복지 여왕’을 흉내 낸 정부·여당의 ‘샤넬과 시럽’ 기획은 미국에서와 달리 실패한 듯하다. 임이자 의원 표현을 빌리면 일하는 개미들이 샤넬 선글라스를 끼고 시럽을 빠는 베짱이를 공격하기보다 정부 여당의 발언을 더 비난했기 때문이다. 여당과 정부도 ‘발언 취지의 일부만 부각’ 등 상투적인 변명으로 수습하려 했다. 한국과 미국의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우선 실업급여 자체의 특징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실업급여는 기본적으로 정부 재정이 아니라 취업 기간 동안 납부한 고용보험료에 기초해서 나온다. 그러하기에 수혜 자격을 따지는 ‘소득과 자산 기준’(means test)은 없다. 재벌 회장이라고 해서 건강 보험 혜택에서 제외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다. 재산을 감추고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아내는 사기 범죄를 겨냥한 복지 여왕 프레임과는 같을 수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차이는 표적 대상이다. 젊은 여성은 국민의힘 지지도가 가장 낮은 집단이다. 하지만 ‘시럽 된장녀’로 몰아가도 재수 없다는 것 이상 증폭돼 적대적 증오의 대상이 되기는 어렵다. 미국의 복지 여왕도 젠더 프레임(성적으로 방만한 미혼모)과 인종 프레임(게으른 흑인)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형성됐지만, 후자가 훨씬 더 중요하게 작동했다.

미 프린스턴대 정치학자 마틴 길렌스 연구를 보면, 미국인들의 복지에 대한 낮은 지지는 대중의 두 가지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복지 수혜자는 대부분 흑인이라는 것과 흑인은 다른 미국인보다 게으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길렌스는 이러한 인식이 확대된 원인으로 언론의 역할에 주목했다. 1967~92년 동안 타임과 뉴스위크,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리포트 등 3대 시사 잡지 빈곤 기사에 실린 인물 사진 중 흑인 비율은 57%로 실제 비율의 두 배를 넘었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미 남캘리포니아 대학 경제학 교수 로버트 메트칼프 등의 2022년 연구에서도 백인들은 복지 수혜자의 38%가 흑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실제 비율은 21%였다. 흑인 응답자들조차 수혜자의 35%가 흑인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인식 왜곡은 폭넓은 현상이었다.

하버드 대학 저널리즘 연구소 니먼 파운데이션은 1999년 복지 축소를 우려하는 가상의 방송 보도를 사람들에게 시청하게 하는 실험을 수행했다. 뉴스에 흑인 여성의 사진을 포함시키면 백인 여성의 사진을 포함시킬 때보다 시청자들의 ‘복지 지출 반대’와 ‘가난은 개인의 잘못’이라는 의견이 모두 다 높게 나왔다. 반면 ‘여성 사진’이 포함된 기사는 사진이 없는 기사에 비해 오히려 복지에 대한 반대를 줄였다. 복지 여왕 프레임의 핵심 고리는 여성이 아닌 흑인이었던 셈이다.

■ 졸렬한 정치기획을 너머

미국 보수진영은 복지 여왕 프레임으로 수십년간 미국 정가를 뒤흔들었지만 실제 복지 여왕이 누구인지는 관심이 없었다. 진보진영은 실재하지 않는 복지 여왕을 레이건이 조작하거나 침소봉대한 것으로만 치부했다.

하지만 온라인 매체 슬레이트 기자 조쉬 레빈은 진지했다. 그는 2019년 <더 퀸>이라는 책에서 ‘복지 여왕은 1974년 시카고 트리뷴의 기사에 처음 등장하며, 그 주인공 린다 테일러는 실재 인물이고 여러 차례 복지 부정을 일으켜 처벌받았고 레이건이 언급한 사례와 가깝다’는 것을 밝혀냈다. 더 놀라운 것은 복지 부정은 테일러의 범죄 중 미미한 것이었다. 그녀는 유괴 및 살인의 유력한 용의자였다. 어차피 복지 여왕은 상징이었고, 실재 인물은 중요하지 않았던 셈이다.

단 한 건의 복지 부정도 없으면 좋겠지만 복지 대상자와 규모가 크기 때문에 부정 수급을 완전히 근절하기는 어렵다. 우리에게도 언제든 린다 테일러가 등장할 수 있다. 진보 진영은 보수 정부보다 복지 부정을 막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하고 그 모습을 대중에 각인시켜야 한다. 그것이 한두 건의 자극적인 사례로 복지 체제가 흔들리지 않도록 예방하는 길이다. 또 외국인 노동자 및 이민의 증가가 불가피한 만큼 복지에 대한 공격이 이주민과 인종 이슈와 섞이지 않도록 각별히 경계해야 한다. 그 경우엔 이번처럼 솜방망이가 아니라 예리한 칼날이 될 수도 있다.

정치적 소동과 별개로 현재의 고용보험기금 재정은 문제가 있고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게다가 대리 기사, 배달 노동자, 학습지 교사 등 특수형태근로종사자, 노동자보다 더 불안정한 영세 자영업자 등을 포괄하려면 재정 부담은 더 커진다.

몇 가지 방안이 모색된 바 있다. 첫째 고용보험의 기업 부담금을 지불 급여에 기반하는 대신 이윤에 연동하도록 하는 방안이다. 기술 변화에 따라 노동자의 특정 기업에 대한 전속성이 낮아진 것을 고려한 것이다(배달 노동자의 고용주는 누구인가?). 다음은 취업 안정성이 높은 공무원과 교사가 고용보험에서 빠져있는 것을 바로잡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매년 1조7천억원 정도의 고용보험기금이 늘어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법안 발의도, 국회와 정부의 진지한 논의도 없다. 왜냐고? 여야 정치인 모두 기업, 공무원, 교사를 상대하는 정치적 부담을 지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샤넬 선글라스를 쓰고 시럽 급여를 빠는 된장녀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신현호 경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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