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스스로를 정치경제학자로 생각했으며, 정치와 경제가 분리될 수 있다고는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현대에도 정치적 의사결정은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반대로 각 집단은 경제적 이해를 정치에 반영하려고 필사적입니다. 국내 외 정치와 경제의 교차점을 살펴볼 계획입니다.
지난 1월19일(현지시각) 미국 국가 부채 총액이 법에서 정한 31조4천억 달러 한도에 도달했다. 조 바이든 정부와 공화당의 벼랑 끝 대치로 미국 국가 부도 우려가 증폭되며 세계 경제는 상반기 내내 살얼음판을 걸었다. 미국 정부는 아랫돌 빼서 윗돌을 괴는 특별 조처로 아슬아슬하게 부도를 피했지만, 이마저도 6월 중 고갈될 것이 확실했다. 다행히 부도 직전 여야 합의로 진정 국면에 들어갔다.
■ 부채 한도란 무엇인가?
미국 헌법은 조세와 부채 등 ‘자금 조달 권한’(power of the purse)은 의회에 속한다고 선언하고 있다(제1조 제8항). 초창기 미국 정부는 국채 발행 시 매번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대규모 국채 발행 필요성이 발생하자 1917년 국채 운용의 유연성을 높였고, 한도는 1939년 ‘공공 부채법’에 450억 달러로 처음 설정되었다.
미국 경제 규모가 커지고 재정 적자가 누적되고 부채는 계속 늘면서, 부채 한도도 빈번히 변경되었다. 1960년 이후 미 의회는 총 78회에 거쳐 부채 한도를 조정하거나 적용을 유예했다. 부채 증가와 한도 조정 모두 민주당과 공화당 정부를 가리지 않았다.
부채 한도와 예산은 서로 다른 것이다. 미 의회는 다른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예산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정부가 지출할 금액을 결정한다. 하지만 의회가 정한 부채 한도 때문에 의회가 승인한 예산을 집행할 수 없는 모순적 상황에 부딪힐 수도 있다. 부채 한도를 별도로 총량 규제하는 나라는 미국과 덴마크 외에는 없다.
이 제도에 대한 회의감과 부작용 우려는 전문가들 사이에선 널리 공유돼 있다. 이는 시카고 경영대학이 미국 최고의 경제학자들을 대상으로 각종 현안에 대한 의견을 수시로 수집한 결과에서 확인된다. ‘부채 한도를 통해 상당한 부채를 장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라는 항목은 35명의 답변자 중 찬성 11%, 반대 66%였다. ‘부채 한도 설정은 불필요한 불확실성을 야기하고, 재정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주장에는 94%가 동의했고 단 3%만이 반대했다.
■ 보수 강경파의 힘자랑과 역풍
미국 부도가 코앞에 닥친 5월 초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공화당이 원하는 지출 삭감에 정부가 동의하지 않으면 부도로 나아가야 한다. 바이든 정부가 술 취한 선원처럼 흥청망청 돈을 쓰게 놓아두는 것보다는 부도가 낫다”라고 말했다. 트럼프 특유의 선동에 가까운 발언이다. 공화당 강경파인 ‘프리덤 코커스’ 소속 의원들도 이 주장에 적극 동참했다. 미국 부도 가능성에 놀란 시장은 휘청였다.
이제까지 주요한 세 번의 부채 한도 위기는 빌 클린튼, 버락 오바마, 조 바이든 시절 발생했다. 모두 여소야대 민주당 대통령 집권기다. 매번 공화당이 ‘대규모 정부 지출 삭감이 동반되지 않으면 부채 한도를 올려주지 않겠다’고 위협하면서 위기가 고조되는 수순을 밟았다. 이는 미국 대중의 국가 부채에 대한 광범위하고 일관된 우려에 기반한 것이다. 최근 하버드 대학 의뢰로 여론조사기관 해리스가 미국 대중을 상대로 한 조사에 의하면 ‘미국 국채가 지나치게 많다는 의견’(66%)이 ‘지나치게 적다’는 주장(13%)을 압도했다. 심지어 민주당 지지자로 국한해도 그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52% 대 17%).
공화당 강경파 주장대로 힘으로 밀어붙이면 승리할 수 있었을까? 클린튼 시절로 돌아가 보자. 공화당은 1994년 중간선거에서 무려 하원 54석을 추가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승리의 주역 뉴트 깅그리치는 하원의장에 선출되어 정국을 주도했다. 균형 예산을 강요하고 클린튼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자 부채 한도를 상향하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 정부는 두 차례 셧다운을 겪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 준비에 신경을 뺏긴 깅그리치가 정부와의 협의에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서 여론은 공화당에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와중에 깅그리치는 ‘대통령 전용기를 탔는데 야당 대표에 대한 대접이 소홀했다’라고 투덜댔고, 이것이 셧다운의 원인으로 보도되었다. 유명한 ‘떼쓰는 아이’(cry baby) 이미지가 한 신문 표지에 실리면서 깅그리치는 직격탄을 맞았다. 결국 공화당은 클린튼 정부 예산안과 부채한도 상향을 수용하기에 이른다. 이것으로 깅그리치의 정치 생명은 꺾였고, 클린튼은 기사회생 연임에 성공하게 된다.
■ 민주당 강경파 궤변의 정치
민주당 강경파도 공화당과의 협상 자체에 반대하면서 극단적 주장을 편 건 마찬가지다. 심지어 부채 한도를 올리지 않아도 국가 부도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놨다. 대표적인 것이 헌법 제14조 발동이다. ‘적법하게 승인된 국가 채무의 법적 효력은 문제 삼을 수 없다’는 조항이다. 적법한 절차에 따라 발생한 기왕의 국가 채무를 상환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므로, 부채 한도를 정한 법률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급하기 위해 국채를 추가로 발행할 수 있다는 논리다. 민주당 강경파 ‘프로그레시브 코커스’ 의장 프라밀라 자야팔과 청년 진보를 대표하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 등 66명의 하원 의원들은 5월19일 대통령에게 이를 촉구하는 공개서한을 발송했다. 급진파 상원 의원 버니 샌더스도 같은 달 24일 폭스 뉴스 기고문에서 같은 주장을 폈다.
두 번째 방법은 영구채 아이디어이다. 일반적으로 채권은 이자 지급과 만기 상환에 대한 약정을 담고 있는데, 특이하게 영구채는 만기를 갖지 않아 상환 의무는 없고, 그 보상으로 이자를 영원히 지급한다. 부채 한도는 발행 채권의 만기 상환금을 합쳐서 계산하므로, 액면가 없는 영구채로 부채 한도 규정을 우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 방법은 액면가 1조 달러 백금 기념 동전을 발행하자는 주장이다. 1997년 미국은 주화수집을 염두에 두고 주화법을 개정하면서 재무부 장관에게 백금 동전의 액면가에 대한 포괄적인 재량권을 부여하였다. 재무부가 1조 달러 백금 주화를 발행해서 은행에 예치하고, 필요한 금액을 인출해서 쓰면 부채 한도 문제에 부딪히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이런 방법들은 법률적 도박, 회계적 장난 또는 법의 허점을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자금조달 권한’이 의회에 있다는 헌법 정신에도 맞지 않고, 통화량 결정 권한은 연방준비제도에 속한다는 미국 화폐 제도의 기본 틀에도 반한다. 하지만 강경파 정치인들과 영향력이 큰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만의 지원에 힘입어 정치권에선 실체가 되어갔다. 강행될 경우 민주당에게 거센 역풍이 불었을 것이다. 재닛 옐런 재무장관과 제롬 파월 연준 이사장이 의회의 한도 상향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고 못 박은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 승자와 패자
미국 보수와 진보 양 극단이 부채 한도 정국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갔지만 5월27일 바이든 대통령과 하원의장 케빈 맥카시는 합의에 도달했다. 2024년 말까지 부채 한도 적용을 유예하는 대신, 정부 지출을 일부 삭감한다는 내용이었다. 양당 강경파 의원들은 항의하고 표결에서 반대표를 던졌지만 상하원 모두 초당적 지지로 통과되어 6월3일 대통령 서명으로 위기는 일단락됐다.
미국 다수 언론은 일제히 합의의 주역인 바이든과 맥카시를 정치적 승리자로, 트럼프를 위시한 양당 강경파를 패배자로 평가했다. 특히 약체로 간주되던 맥카시는 강력한 대선 주자 트럼프의 선동에도 불구하고 공화당 하원의원의 67%의 찬성을 이끌어내는 정치력을 발휘해 주목받았다. 미국의 부도 사태가 발생했을 경우 전 세계 경제에 심대한 위기를 초래했을 것이 확실함으로 세계 경제도 이번 합의의 수혜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동에 편승하지 않는 정치인의 합리적인 사고와 반대파를 끌어안는 정치력의 중요성은 비단 미국에서만의 덕목은 아닐 것이다.
신현호 경제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