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과 낸시 레이건 여사. 연합뉴스
지난 칼럼(8월17일치)에서 우리는 감세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1980년대 ‘레이건 감세’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1920년대와 1960년대에도 큰 감세가 있었다. 소득세 최고세율은 1921년 73%에서 1925년 25%에 이르기까지 매년 급격하게 하락했다. 그 외에 과표구간과 공제액도 감세 방향으로 조정됐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20~1921년에 발생한 디플레이션 불황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지만, 제1차 대전 전비 조달을 위해 급격하게 올린 소득세 최고세율(1916년 15%에서 2년만에 77%로 상승)이 원상 복귀된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이 시기의 감세는 역사적으로 중요성이 덜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뒤이은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소득세율은 다시 치솟아 90%를 넘게 된다.
✅ 케네디, 케인즈 경제학으로 대규모 감세를 선도하다
두 번째 감세는 민주당이 주도했다. 1962년 케네디 대통령이 제안하고, 그의 사망 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존슨이 1964년 법제화를 통해 완성한 ‘케네디-존슨 감세’는 당시까지의 미국 감세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를 통해 소득세율은 최고구간에서 91%에서 70%로 하락하는 것을 포함해 전 구간에서 삭감됐다. 1909년 제16차 헌법개정을 통해 본격 도입돼 지속적으로 상승하던 법인세율도 케네디-존슨 감세로 52%에서 48%로 하락했으며, 감가상각비 규정이 자유화되어 실제 감세 폭은 더욱 컸다.
애초 케네디 대통령은 감세에 소극적이었다. 첫 번째 이유는 경기 자극을 위한 재정 정책 중 감세보다는 지출을 늘리는 것을 더욱 선호했다. 재정 지출을 통해 분배 등의 영역에서 정부의 직접적인 역할을 강화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가뜩이나 적자인 재정 상황이 더욱 악화될 위험 때문이었다. 보다 정확하게는 적자 자체보다는 보수 진영으로부터 ‘무책임하게 재정 적자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더욱 우려했다.
하지만 케네디 대통령은 집권 첫해인 1961년 민주당이 상하원에서 모두 다수당이었음에도 원하는 지출 증가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킬 수 없었다. 그만큼 케네디 지출 프로그램은 인기가 없었다. 또 경제는 자신했던 만큼 강한 성장세와 완전고용에 도달하지 못하고 소강상태였다. 정치적으로 예민했던 케네디 대통령은 재선을 위해 감세에 정치적 승부를 걸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말 뉴욕 경제인 클럽 연설에서 “오늘날 세율이 너무 높아 세수가 너무 적게 걷히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세수를 증가시키는 바람직한 방법은 세율을 낮추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설적이지만 진실입니다”라고 진단하고, “감세의 목적은 재정 적자를 야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를 성장시켜 재정 흑자를 가져오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름을 가리면 아마 현대의 사람들은 레이건 대통령의 말이라고 생각할 수준의 발언이다. 케네디와 레이건 대통령의 감세가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세율 인하로 민간 인센티브를 활성화시켜 경제 성장과 세수 확대를 이룰 수 있다는 공급 측 경제학의 입장에 섰다면, 케네디 대통령에게 있어 감세는 가처분소득을 늘려 경기를 자극할 수 있다는 수요 관리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케네디-존슨 감세가 통과된 직후인 1964년과 1965년에 세수는 줄지 않았다. 국가부채(이하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율)도 케네디와 존슨 대통령 임기 동안 61%에서 49%로 크게 감소했다.
이 시기 세수 증가의 원인은 세율 인하와 무관한 다른 요인일 수도 있어서 정확한 효과는 불확실하고, 경제학자들의 논란의 대상 중 하나이다. 다만 애초 소득세 최고세율이 91%로 비정상적으로 높았던 것을 고려하면 세율 인하로 인한 세수 감소가 있다고 하더라도 크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케네디 대통령에게 감세 아이디어를 제안한 것은 미네소타 대학의 확고한 케인지언 경제학자 월터 헬러였다. 그는 케네디와 존슨 두 대통령의 경제자문위원장으로 재임하면서 ‘감세’와 ‘빈곤과의 전쟁’을 모두 입안해 미국 경제 정책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리고 동시대 사람들은 케네디-존슨 감세를 케인즈 경제학의 최대 성과로 간주했다. 이십 년 후 레이건 대통령과 그의 보수 경제학자들이 감세를 추진하면서 정당성을 케네디-존슨 감세에서 찾은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 대처, 레이건 감세를 무책임하다고 비판하다
대처 총리와 레이건 대통령은 198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 보수주의 부흥을 이끈 양대 축이다. 이들은 정부 개입 축소, 민영화, 탈규제, 통화 공급 제한 등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두 사람은 정치적 소울메이트라 불릴만큼 인간적으로도 가까웠다. 2004년 레이건 대통령 장례식장에서 대처 총리는 “우리는 위대한 대통령, 위대한 미국인, 위대한 인물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사랑하는 친구를 잃었습니다”라고 슬픔을 표현했다. 사람들은 대처 총리와 레이건 대통령이 모두 1980년대 양국의 감세를 주도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세금에 대한 접근은 상당히 달랐다.
대처 총리 역시 레이건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임기 동안 소득세 최고 세율을 83%에서 40%로 반토막냈고, 법인세율도 52%에서 35%로 대폭 삭감했다. 하지만 공통점은 여기까지다. 소득세와 법인세 감세로 인해 미국 정부 부채는 레이건 대통령 임기 동안 41%에서 60%로 폭등했지만, 영국 정부 부채는 대처 총리 시절 47%에서 28%로 오히려 대폭 하락했다. 대처 총리는 레이건 대통령이 이루진 못한 ‘세율 인하, 세수 증가’를 달성한 것일까?
대처 총리는 소득세와 법인세를 대폭 삭감하는 한편 부가가치세율을 8%에서 15%로 거의 두배로 올렸다. 그리고 레이건 대통령이 국방비를 포함해서 지출을 늘려가는 동안 대처 총리는 정부 지출도 억제했다. 대처는 1979년 5월 영국 역사상 최초 여성 총리로 취임했는데, 선거 유세 기간 동안 “경제 질환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상당 기간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라고 솔직히 말했다. 이 점에서 감세를 하면 오히려 재정 적자가 줄어든다는 기적을 설파한 레이건 팀의 유세와는 달랐다.
대처 총리는 사실상 감세를 한 것이 아니라 세 부담 구조를 변경한 것이며, 정부 재정에 미친 결과는 레이건 대통령과 정반대였다. 1983년 1월 대처 총리는 노동당 국회의원을 역임한 방송인 브라이언 월든과 인터뷰를 했는데, 월든은 영국인들의 세부담(간접세를 포함해)이 오히려 늘었다고 대처를 공격했다. 대처는 ‘감세가 재정 건전성을 훼손한다면, 나는 감세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물론 대처 총리의 세제 개혁 역시 그 자체로 큰 논쟁의 대상이다. 직접세(소득세와 법인세)를 줄이고, 간접세(부가가치세)를 늘려 부자의 부담은 줄고 보통 사람들이 더 큰 부담을 지게 됐다. 당연히 분배에 악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재정 측면에서 두 사람의 세제 개혁을 동일하거나 유사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심지어 대처 총리는 ‘미국은 재정적자를(세금이 아니라) 줄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레이건 대통령에게 전달해서 레이건의 스탭들을 불편하게 했다.
우리는 과거 미국과 영국에서 있었던 세 차례의 주요한 감세를 경제적 효과뿐아니라 정치적 배경까지 살펴보았다. 통념과 다른 몇가지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 미국에서 최초의 감세를 주도한 것은 공화당이 아니라 민주당이었다. 둘째, 1960년대까지 감세는 케인즈적 정책으로 생각됐다. 셋째, 감세는 언제나 세수 및 재정 건전성에 미치는 효과와 같이 고려해야 한다. 넷째, 레이건 대통령은 감세 자체에 주목한 반면 대처 총리는 재정 건전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감세는 누가 추진하건 재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큰 사안이다. 따라서 야당은 보수든 진보든 이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과도한 감세가 야기하는 세수 부족과 재정 건전성 악화를 비판하고 견제해야 한다. 그것이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옳은 길이다.
신현호 경제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