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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우리사회 민주주의는 과학기술 앞에서 멈춰서죠”

등록 2006-02-02 18:02수정 2006-02-06 15:40

‘황우석 사태’ 겪었지만 기술 민족주의 남아
시민사회 욕먹을 일조차 없어, 한 일 없으니
여성·과학 등 중첩된 ‘간분야’는 새 시민운동 필요
지난해 황우석팀 연구투자액 무려 543억
아토피 연구 DB구축은 단돈 2억이 없어 못해

권은정의 인터뷰 무제한/한재각 과학기술 시민운동가

그는 황우석 사태로 요즘 부쩍 바빠졌다. 논문조작이니 조사니 하는 말들이 나오면서부터다. 모든 것이 잘되어가는 듯 했을 때는 그의 이야기에 사람들은 별로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이제야 그동안 갈고 닦아온 생각들을 제대로 드러내 놓을 수 있게 된 셈이다. 전날에는 토론회, 그 다음날은 지방강연, 당일 오후에는 세미나. 겨우 오전 시간을 비집고 들어가 이른 아침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젊은 활동가 한재각(35)씨를 만났다.

그동안 그는 황우석의 신화가 왜 신화가 될 수 없는지를 과학적으로 설명해 오는 일을 했다. 네티즌의 항의, 촛불시위, 악의적인 댓글 테러로 많이 시달렸을 성 싶은데 그는 의연한 모습이다. 며칠 전 나는 TV토론 프로그램에 나온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가 양복을 입고 나왔기 때문이다. 한재각 씨를 여러 해 동안 알아 왔지만 정장 차림은 처음이었다. 그는 참여연대 과학기술민주화 모임에서 활동가의 길을 시작했다. 그 전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서 잠깐 일한 것 까지 합하면 지금껏 이 분야에서 일한지 십여 년이 되었다. 시작에는 복제양 돌리가 한몫을 했다.

“물론 그 전부터 과학기술 분야의 민주주의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돌리가 출현했을 때 모두 히틀러 복제되는 거 아니냐는 등 다소 과잉된 걱정을 했었지요. 저는 다만 생명공학기술이 통제 없이 빠르게 발전하면 엉뚱한 기술이 엉뚱하게 이용될 수 있겠구나 하는 우려를 했지요. 생명공학기술은 빠르게 발전하는데 사회가 못 쫓아가는구나, 윤리적 문제 등이 분명히 나오는데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구나, 시민운동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한 그는 엔지니어로서 어떻게 진보적 사회진출을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대학원에서 과학사를 파고들었다. 우리나라가 과학기술에 특히 낙관적인 탓에 그 위험성이나 폐해를 간과해 버린다는 점에 그는 주목했다.

그러나 그의 운동방향이나 내용에 사람들은 대개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물위에 기름처럼 빙빙 돌았지요.”


과학기술 투자에 대한 규제를 중심으로 시민참여 활동을 기대하고 들어간 시민운동 4년 동안 그는 자기 의견을 전파하기가 어렵다는 점만 절감했다.

‘황우석 사태’로 무척 바빠져

“제 능력부족 탓도 있겠지만 환경 자체가 어려웠어요. 생명과학이라는 게 전문적인 내용이다 싶으니 도대체 무슨 이야긴지 난 모르겠다, 자연과학은 난 모른다며 손사래 치면서 가버리더군요. 그걸 보면서 어느 정도까지 이야기해야 수용이 가능한지, 늘 답답했지요.”

시민운동의 대열에서조차 언제나 공허한 메아리만 돌아왔다. 외로웠을 것 같다.

“외로웠지요. 저뿐만 아니라 이쪽 분야 문제 제기하는 모든 분들이 외로웠지요.”

즉, 단체로 외로웠다는 말이다. 그 힘든 과정을 극복하느라 애썼다고 하니 그가 말한다.

“뭐 극복이라기보다는 그냥 하다보니 여기까지 온 거지요. 좌절감이 있고, 지금도 그렇구요.”

그는 우리사회가 과학문화를 주도하는 방식이 상당히 “후지다”라고 혹평한다. 지금도 우리 국민들의 과학적 소양을 측정하는 기준은 가령 이런 것이란다.

“원자가 더 클까요? 분자가 더 클까요?”라고 물어서 정답률이 높으면 우리 국민의 과학쪽 지식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분류된다는 말이다.

과학운동에 청춘을 바치며 매진하고 있는 그의 말은 이렇다.

“민주주의는 공장 문 앞에서 멈춰 선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민주주의가 과학기술 앞에서 멈춰 선다는 말을 하지요. 아무도 과학기술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고 함의가 뭔지 모르고 판단 자체를 유보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시민사회운동의 미래를 이야기할 때 과학기술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지를 지나쳐 버리는 것이 큰 약점입니다.”

그래도 요즘 들어서 시민들의 얘기 중에 과학이 많이 들어 있다. 줄기세포, 배반포…. 처녀생식은 아예 일반어가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지금부터라도 과학기술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깊어질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그는 ‘글쎄요’, 하는 표정으로 말을 받는다. 일반인들의 관심은 어쩌면 반짝하고 지나가버릴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우리 과학문화 상당히 후져”

“만약 논문조작을 안했거나 줄기세포가 한두 개라고 있었다면 우리가 이런 논의 자체를 하고 있을까요? 기술이 발전하면 좋은 게 아니냐, 지금도 그런 의식이 강력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기술민족주의, 기술낙관주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현대 과학기술의 위험성에 대해서 차분히 짚어가면서 일해야 한다는 의식이 자리 잡았다고 보기에는 힘들지요. 이제 겨우 시작이에요. 또 언제 새로운 기술적 성과, 소위 과학적 영웅이 나오면 손바닥 뒤집기만큼 쉽게 뒤집어질 분위기입니다. 아주 조심스러울 뿐입니다.”

그는 요즘 ‘정리투쟁’에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다. 정리투쟁이라니? 정리정돈에 무슨 투쟁?

“이 사태의 의미를 어떻게 잘 정리할 것이냐, 그게 중요합니다. 지금 저마다 아전인수, 중구난방으로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결과를 해석하기 바쁘거든요. 이번 사태의 의미를 잘 간추리고 맥을 잘 짚어야 다음 과제를 실천해 내는데 기반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거든요.”

그는 자신이 시민운동의 일원임을 분명히 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민사회는 이번 사태로 욕먹을 일도 칭찬받을 일도 없어요. 시민사회가 무슨 역할을 했느냐고 물으면 아무 것도 없었다고 답해야 해요.”

그런 역할은 <피디 수첩>, <프레시안>, <브릭>에게 돌릴 수 있을 것이고 시민사회는 드러나지도 않았고 주장도 없었다는 점은 깊이 반성해야 한다며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기존 시민운동이 자기 분야에서 고립되어 각각 자기 일을 하느라 다른 데 신경을 쓰지 못했어요. 이번 문제는 간분야적인 성격의 것이라서 그에 대한 대항 자체가 안 되었던 것이지요.”

간분야?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역시 과학이니 이야기가 갈수록 어려워졌다.

“다양한 여러 영역의 문제가 엉켜 있다는 말이지요. 지난번 생명윤리법 제정 때 실무를 맡아 일했는데요, 그때 배아복제를 이야기할 수 있는 단체들의 갈래를 꼽아 보았습니다. 여성, 보건의료, 환경, 종교, 과학기술, 인권, 동물권…. 이런 주제들이 중첩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와 관련해 시민운동을 전개하려면 여러 분야가 서로 연결되어 일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앞으로 전혀 새로운 과학기술이 불쑥불쑥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간분야간 운동에 대한 관심이나 준비가 절실해 질 것이다. 그런 문제를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든 게 이번 사태로 얻은 교훈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앞으로 어떤 주제로 활동해나갈지 물었다.

“생명공학의 경우 새로운 기술 분야이다 보니 정보가 빠르고 전문적인데 체계적으로 수집해서 시민사회에 제공하는 정보센터의 역할이 중요하지요. 그동안 시민사회가 정보를 미리 갖고 논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상당히 해온 셈인데 이번엔 전혀 그렇게 하지 못했잖아요.”

과학기술을 시민운동 대상으로

그를 만나면 꼭 물어보고픈 게 있었다. 혹시 그의 이름 ‘각’자가 ‘뿔 각’ 자가 아닌지?

“하하하…. 제가 좀 각진 인생을 살긴 하지만 그건 아닙니다.” 구슬 각자를 쓰지만 각진 인생, 각진 젊음을 사랑한단다. 그는 과학기술을 시민운동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회분위기는 아직 요원하지만 평생 해야 할 과제이니 조급하게 마음먹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권은정/전문 인터뷰어
권은정/전문 인터뷰어
그날 오후 토론회에서 아토피 질환 환자들과 과학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현재 그는 민주노동당의 정책연구원으로 일하면서 당의 과제인 ‘아토피. 천식 등의 환경성 질환’를 주로 다루고 있다. 아토피를 유발하는 식품첨가물 데이터 베이스구축에 ‘고작’ 2억원이 없어 못하고 있단다. 그런데 지난 한 해 황우석 관련 연구투자액은 543억원이었다. 전국의 아토피 아이들과 황우석 중에 누구를 구해야 할 것인가, 그는 묻고 있다. 앞으로도 죽 그는 시민들에게 과학기술이 무엇인지 쉽게 풀어서 말해 줄 것이다. 그리고 국가는 시민들에게 어떤 과학기술로 봉사해야 하는지 그 임무를 분명히 제시해 줄 것이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그의 날렵한 걸음이 아주 과학적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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