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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해뜨는 바다’에 가보실래요

등록 2005-12-22 18:40수정 2005-12-23 15:08

알로에가 익어가는 항아리들을 앞에 두고 사진 한 방 찍다.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조영숙, 유수복, 강무영(뒷쪽 남자), 배지희, 조영순, 서명순 조합원.
알로에가 익어가는 항아리들을 앞에 두고 사진 한 방 찍다.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조영숙, 유수복, 강무영(뒷쪽 남자), 배지희, 조영순, 서명순 조합원.
빈곤층 무담보대출금 500만원 종잣돈 삼아 어부의 아내들 알로에 음료 제조 일을 벌였다 2년만에 빚 갚고 생협 납품 판로 개척 “우리가 해냈어…믿기지 않아요” 고되고 힘들지만 “웃지요”
권은정의 인터뷰 무제한/희망이 익는 거제 알로에 생산공동체

올해는 유엔이 정한 ‘마이크로 크레디트’의 해였다. 저신용 저소득계층에 제공되는 무담보 소액대출 서비스를 말한다. 해가기 전에 마이크로 크레디트로 벌떡 일어선 어부의 아내들을 만나러 거제도를 찾아 남으로 남으로 달렸다.

도착한 때가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작은 교회 안마당 작은방에 ‘해뜨는 바다’의 식구들이 밥상에 둘러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대충 인사를 나눈 뒤 사양 같은 것은 하지도 않고 끝자리에 끼어들어 밥 한 공기를 받아들었다. 생선구이에 생선찌게, 어촌의 밥상다웠다. 상을 치우기 무섭게 그중에 있던 남성 몇 분은 마당으로 나가 땅을 다지기 시작했다.

생산공동체 ‘해뜨는 바다’의 오리지널 멤버는 다섯 명의 여성조합원. 남편들이 모두 고기잡이배를 타고 집을 떠나가면 그 자리를 지키며 살아왔다. 이들이 힘을 합쳐 알로에 효소를 개발하여 대체음료를 생산 판매하는 일을 시작한지 2년 남짓. 바로 이 달 초에 생활협동조합에 제품을 발주하는 쾌거를 올렸으니 벌써 사업이 상승가도를 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인터뷰는 작업장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의 아주머니 멤버들은 뭐든지 물어보라는 자세이지만 일을 쉬지 않는다. 알로에 병을 비닐에 감아서 박스에 넣는 사람, 비닐을 사이즈에 맞게 잘라두는 작업을 하는 사람, 장부를 정리하는 사람…. 나는 기록을 하는 사람. 어떻게 해서 알로에 만드는 일을 하게 되셨는가요? 큰소리로 질문을 던지자 그중 유수복(50)씨가 가장 빨리 대답을 한다.

“우리가 사는 게 늘 같았죠, 뭐. 생활비는 없지 애들 공부는 시켜야지 셋방살이도 해야지, 그렇게 늘 허덕이며 사는 거지요. 돈이 들어와도 그 뿐이지요. 반찬가게 외상 갚고, 옆집에 빌린 돈 갚아야지요, 그래야 다시 빌려주니까. 똑같은 생활에, 사는 게 재미가 없었어요.”

이때 전화가 왔다.


“아, 예, 예, 주문하세요, 네 병이요. 예, 예, 고맙습니다.”

전화주문을 받아 장부에 기록하고 확인하는 조영순(46)씨의 자세가 아주 의젓해 보인다. 이 일에 대한 자긍심이 몸에 배어나와서일 것이다.

“사는게 재미가 없었지요”

“저는요, 아가씨 때부터 안 해 본 일이 없어요. 식당일에 세차장, 험한 일도 많이 했고 애들이 어릴 때는 굴 공장에도 다니고 그랬지요.”

통영에서 가까운, 아주 큰 지도에서나 겨우 보일까 말까하는 섬이 고향이라는 조씨는 중매로 배타는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죽자고 열심히 일만하며 살았다.

“남편이 처음엔 돈을 잘 벌어 주었어요. 일본 쪽으로 가서 일했는데 지금 우리나라에 불법으로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 같은 처지였지요. 쫓겨 다니다가 결국 자수해서 왔는데, 그렇다고 육지 일을 해본 적이 없으니 다시 배를 타고 나가지요. 멸치배 타고 가까운 데로 나갑니더.”

조영순씨는 텔레비전에 비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면 눈물이 나온다고 한다. 남편도 저랬지 싶어서다. 이들 남편들은 배를 탄 세월이 수십 년이건만 목숨걸고 청춘을 바친 댓가가 말할 수 없이 초라하다.

“우리집 양반은 배운 것도 없고 그러니 항해사나 선장 시험을 친 적도 없고 평생 똑같은 일을 하니 받는 돈도 그저 그렇지요.” 어부의 아내들은 자기 처지에 별다른 토를 달지 않는다. 으레 그러려니 하면서 평생을 버텨온 이 순한 사람들이 모두 하나같이 아직도 셋방살이 신세다. 전세도 아닌 월세. 한달에 얼마나 내시냐고 물었더니 여기저기 대답이 튀어나온다. “난 17만원, 여긴 13만원, 저긴 25만원, 강 집사는 12만원이제?” 사는 게 재미있을 리 없고 아이들한테 화풀이나 하는 나날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유수복씨가 말을 이었다, “여기 목사님과 사모님이 오시면서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거지요.”

사실 ‘해뜨는 바다’의 탄생에는 정원기 목사와 그 부인인 조영숙씨의 공이 컸다. 정목사가 온 그해 태풍 매미가 몰아치는 바람에 주민들이 물바닥에 잠기게 되었다. 수해 복구를 위해 근 한 달간이나 교회에 함께 모여 살았다. 같이 밥을 지어먹고 잠을 자며 무너진 집들을 고쳐나갔다. 그렇게 하는 사이 정목사 부부는 교회신자들의 생활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한달 25일을 배 위에서 보내고 겨우 닷새 뭍에 있는 동안 육지멀미에 시달리며 살지만 전혀 사정이 나아지지 않는 가장과 그 가족들의 삶이었다.

‘마이크로 크레디트’ 재기 발판

조영숙씨는 두레 일꾼으로 자처해 뭔가 일을 꾸려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즉시 실천에 옮겼다. 가장 먼저 한 일이 마이크로 크레디트의 ‘신나는 조합’을 통해 소액대출을 받는 것이었다. 사업계획서에는 알로에 효소 음료 생산판매라는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 거제에서 오래전부터 알로에가 잘 자라는데 착안한 것이었다.

작업하는 옆방에는 크고 작은 항아리가 꽉 들어차 있다. 근 여든 개의 단지 안에 이들의 보물인 알로에가 익어가고 있는 중이다. 항아리만 있는 이방에 음악이 늘 흐른다.

“알로에 잘 익으라고요. 음악이 물이나 음료 숙성에 도움이 된다고 어느 책에서 읽었어요.”조영숙씨의 설명이다.

“우리는 서로 싸우고 기분 나쁜 일 있는 사람은 알로에 젓기 하지 말라고 해요.”

이들 사이에는 불문율이다. 알로에는 황설탕과 함께 넣어 6개월 이상 발효를 시키는데 중간 중간 긴 주걱으로 저어주어야 한다. “알로에야 알로에야, 우리는 너희를 정말로 사랑한단다….” 곱고 정갈한 마음가짐으로만 하자는 멤버간의 약속이다.

“우리가 처음에 5백만원을 대출받아 항아리 10개로 시작했거든요. 우리가 해낼까 걱정 많이 했는데 우리가 다 갚았잖아요.” 한 아주머니의 자랑이다.

이들에게 종자돈 5백만 원이 얼마나 큰돈이었으랴. 자신들을 시험대에 올린 최초의 2년 동안 매주 꼬박꼬박 한번도 미루지 않고 갚았다. 그 신용으로 2차 대출 2천만 원을 쉽게 받았다. 이들에게는 빚을 갚아나간다는 말이나 사업이 번창한다는 말이나 같다. 2천만원은 앞으로 매주 141200원씩 150주간, 즉 3년 안에 다 갚을 계획이다. 그뿐이랴, 이제는 각자 배당금 매월 5만원씩에 수당을 더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전국에서 주문이 밀려와서 하루에 수십병, 한달에 수백병...곱하기 1만5천원 ,매달 그렇게만 된다면! 이들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맨손으로 시작하여 항아리 1백개, 자산 몇천 만원의 사업체가 된 것이다.

“참말로 우리가 해낼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았어요. 지금 여기까지 온 거 생각하면 대견하기도 하고 우리 자신이 너무 자랑스럽기도 하고….”

배지희(65)씨가 비닐을 자로 대어 한 장 씩 자른다. 서명순(47)씨가 박스정리를 했다. 서씨는 뇌졸중으로 10년 전에 쓰러져 왼쪽 팔을 쓰지 못한다.

“몸이 안 따라 주니 일을 열심히 못하지요. 저를 같이 있으라고 해주니 그저 고맙지요.” 다른 한명인 최은옥씨는 오늘 없다. 진 빚이 많아서 이일 말고도 다른 일을 더해야 한다. 오늘은 배 청소 일하러 나갔다.

저, 그런데 알로에 먹으면 예뻐진다는데 진짜 그런가요?

“아, 그럼요. 알로에를 먹으면 소화도 잘되고 장에 좋거든요. 그러니 피부도 좋아지지요. 근데 이미 진 주름에는 별 소용없어요! 하하하…”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그들에게 알로에 판매를 위한 전략이 있는지 넌지시 물어보았다.

“아이구… 우리 마음으로는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생각하지요. 여기 앉아서 팔지 말고 길에 나가서 팔아볼까, 근데 아직 우리 물량이 아직 적으니까 생협거래를 꾸준히 늘여가는게 제일 좋지요. 나중에 텔레비전 같은데 한번 타고 그래보면 좋겠어요.”

텔레비전 한번 타봤으면

딱딱한 알로에 껍질을 벗기는 일에서 뻑뻑한 겔 상태의 알로에를 젓는 과정까지 몹시 힘들고 고된 일이다. 여럿이 마음 맞춰 일하는 게 꼭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육체적인 어려움이 가끔 티격대격하게 만들지 않나?
권은정/전문 인터뷰어
권은정/전문 인터뷰어
“그런 일도 있지만 하루를 못 넘기고 다시 웃어요. 우리는 모두 똑같은 멤버예요. 그저 정성으로 힘을 합치면 언젠가 이 시설이 작다 할 그런 날이 반드시 올 거라고 믿습니다.”

하룻밤 묵고 가라는 청을 뒤로 하고 돌아오는 바다 길 위에 보름달이 비추고 있었다.

오늘 하루 너무 좋은 사람들은 한꺼번에 만났다. 희망이 있다는 말은 무엇인가? 이들처럼 하루를 살고 또 한 해를 살다보면 꿈★은 이루어질 거라는 믿음이 아닐까. 서울행 버스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살짝 졸았나보다. 잠결너머로 나는 ‘해뜨는 바다’를 바라보며 행복에 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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