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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내게 철학 공부는 칼을 벼르는 일이었다”

등록 2006-01-19 16:58수정 2006-01-20 15:37

과도한 편애로 빚어진 결과가 학벌의식임을 지적하는 김상봉 교수는 진정한 도덕교육이 사랑을 가르쳐준다면 고질적인 학벌의식도 사라질 것으로 전망한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과도한 편애로 빚어진 결과가 학벌의식임을 지적하는 김상봉 교수는 진정한 도덕교육이 사랑을 가르쳐준다면 고질적인 학벌의식도 사라질 것으로 전망한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힘없는 사람에 쥐어줄 칼 만들려 공부
현장에서 현실적 변화 꾀하며 ‘혁명’ 실천
자기 발견 못하는 망가진 교육 안타까워
진보진영조차 학벌사회 침묵하는 데 분노
노예로 만드는 도덕교육 신랄 비판

권은정의 인터뷰 무제한/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 정도가 지금까지 내가 아는 유일한 철학관련 지식이었다. 철학과 무관하게 살아온 생이었지만 그다지 문제는 없었던 것 같다. 알면 알수록 골치 아픈 게 철학이라고 믿고 살아온 내가 철학자와 만날 약속을 했다. 게다가 그는 실천하는 철학자로 이름높은 사람이지 않은가. 며칠 전부터 초긴장 상태였다. 내 무식이 탄로 나면 어떻게 하나? 철학 근처에도 데려가주지 않았던 우리시대의 교육이 새삼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일단 심호흡을 하고 김상봉 교수(48)를 만나러 갔다. 시작은 당연히 철학적이지 않은 질문으로 했다. 몇 년 만에 다시 학생들을 가르치는 감회가 새로우실 것 같다, 학생들이 강의를 좋아하겠네요? 보도된대로 부산 사람인 그는 지난해 가을학기부터 전남대 철학과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의 발령소식은 전국의 학계에 적지 않은 파장을 던졌다. 지연과 학연을 깡그리 무시한, 참으로 ‘생소한’ 방식으로 전남대 철학과 열한 분 교수들이 만장일치로 그를 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학과의 학풍이 몹시 자유롭고 건강하고 힘찰 것 같다. 참, 어떤 학교에서는 철학과를 아예 폐지하거나 축소한다던데요?

“우리 대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 과목만 보더라도 정원이 스무 명인 강좌가 있는데 요즘 그 세배 넘는 학생들이 강의를 들으러 옵니다. 공부 열의도 대단하고요.”

그는 겨울 방학 중에도 라틴어와 그리스어 강좌를 만들어 일주일에 두 번 수업한다. 철학공부에는 이런 고전어가 필수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도 라틴어 수업을 혹독하게 수련하지 않았던가. 그의 학동들은 기꺼이 수업에 들어와 ‘잔인한’ 서너 시간의 강행군을 마다하지 않는단다. 어쩐지 철학의 르네상스가 남쪽에서 꽃필 것 같은 느낌이다.

바야흐로 입시철을 맞이하여 모든 학생이 진로를 두고 고민을 하는 시절이다. 학문의 재미와 현실적 선택은 언제나 엇갈린다. 대학입시는 결국 더 좋은 학교, 더 나은 학벌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게 우리의 현실이다. 눈치작전으로 원서마감 몇 시간 앞두고 몇몇 유명대학의 서버가 다운되는 사건도 벌어졌다. 그동안 학벌 없는 사회를 위해 학벌타파 운동을 맹렬히 전개해오셨는데 어떤 변화의 조짐 같은 게 보이는가?


전남대 교수 임용 학계에 파장

“변화가 없지요. 우리사회에서 학벌이란 워낙 세력이 강고하니까요. 마지막 남은 성역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세상의 어떤 지배체제도 한국의 학벌체제처럼 피지배 측으로부터 전체적인 동의를 얻어낸 적이 없습니다. 우리사회에서 배움은 학문인 동시에 종교였습니다. 교육이 종교적인 아우라를 가지게 된 데는 조선시대 역사와 무관하지 않지요. 이런 분위기에서 학생들은 스스로 비하하게 되지요, 내가 능력이 없으니, 공부를 안했으니, 이런 대접을 받는 게 당연하다, 이런 거야말로 한국의 계급 불평등을 완벽하게 정당화해주는 장치입니다.”

그나마 처음 얘기를 꺼냈을 때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한 것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공론화된 셈이라고 하면서 그는 톤을 높인다.

“진보적인 일반시민운동 진영에서조차도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무풍지대라는 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교육이 망가져 있는 이 사회 안에서 거대담론을 현실화시켜줄 수 있는 주체를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끝끝내 이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건지, 저는 분노를 담아서 묻고 싶습니다.”

김 교수는 플라톤의 <이상국가론> 첫 번째 주제가 교육이다, 이상적인 정치체제와 이상적인 교육체제는 동전의 앞뒤라는 말이라며 작금의 교육현실을 그의 철학적 이론으로 파고든다.

광주서도 청소년 철학교실 열어

사실 교육문제에 대한 그의 연구는 그 전부터 쉼없이 이어져 왔다. 최근 펴낸 <도덕교육의 파시즘>에서 그는 잘못된 교육의 심각한 병폐를 진단했다. 이 책은 한국의 도덕교육은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를 기르기 위한 교육이며 그런 교육이 국가에 대한 희생과 충성을 맹목적으로 강요할 때 도덕은 파시즘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게 된다는 점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번 황우석 사태를 보면서 수 십년 간 우리가 사유하지 않은 인간을 길러낸 결과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히틀러에게 넘어간 경우가 이 땅에서도 가능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이들이 자기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학 3, 4학년이 되어서도 뭘 해야 할지 모른다고 하지요. 제가 말해요. 무얼 하고 싶은지 말해 보라고, 그러면 뭘 해야 하는지 말해주겠노라고.”

그의 표정에는 안타까움이 가득 배어 있다. 피폐한 땅에서 함부로 자라난 학생들에 대한 연민, 아니 진작 더 일찍부터 아이들을 보듬어 주지 못한데 대한 자책까지 느끼고 있는 듯하다.

그는 독일에서 칸트 연구를 했다.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제목은 나도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런데 칸트가 한국의 현실사회와 어떤 상관이 있나? 흔히 철학은 은둔자의 학문이라고 알려져 있지 않나? 그는 왜 자신의 사상을 굳이 이 시끄럽고 아수라장인 현실에다 벌여놓았는가? 사실 처음부터 궁금했던 질문이었다.

“소크라테스가 평생 가르친 곳이 어디였습니까? 광장이었습니다. 진짜 철학은 비판적인 힘을, 비판적인 생명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가 원래 뜻한 바는 철학자가 아니었다. 정치를 하고 싶었다.

“혁명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세상에 바꾸고 싶은 게 너무 많았는데 근원적인 실천 없이는 아무 것도 안 되겠다 싶어서 철학을 공부하기로 했지요. 이론 없이 혁명이니 뭐니 말하는 것은 우스꽝스런 일이며 무책임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우리의 현실 속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내야 했다. 지금 이 역사적인 단계에서 그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기 위해 그는 공부했다.

그에게 공부란 ‘한 자루의 칼을 벼르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에게 쥐어줄 수 있는 칼. 그는 보검을 만들려 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이의 일상에서 쓰임이 되는 무쇠 칼을 원했던 것이다. 힘없고 가진 것 없는 누구라도 그 칼을 잡고, 무엇을 썰거나 간에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그런 칼을 만들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일’을 해왔다.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별안간 철학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제가 하려는 것은 대단한 거대담론이 아닙니다. 그전에도 해왔고 이제 광주에서도 시작할 청소년 철학교실만 하더라고 그렇습니다. 그 일은 하나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냥 철학교육이 이렇게 이루어지더라는 것을 보여줄 것입니다. 주위에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어,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되네, 우리도 할 수 있겠네…. 그 길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맑스가 말한 바대로 ‘전형’을 보이는 일, 그게 바로 제가 할 일이지요.”

아무리 작고 개별적인 사안이라도 동시에 복제 가능한 보편성을 담보하고 있다면 그 일이 몰고 올 힘은 엄청나다는 말이다. 현실과 이론의 끊임없는 대질이 그의 몸에 배어 있다. 끊임없이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현장에서 현실적인 변화를 이루어 보이는 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혁명이다. 그의 정치인 것이다.

그는 진정한 도덕교육이 사랑을 가르쳐준다면 고질적인 학벌의식도 사라질 것으로 전망한다. 과도한 편애로 빚어진 결과가 바로 학벌의식임을 그는 지적하고 있다. 그의 말에 세상이 얼마나 열렬하게, 얼마나 시간에 맞춰 그에게 응할지 아직 모른다. 그는 다만 “잊지 말아야할 것을 잊지 않도록 상기시키는 일이 바로 철학이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일”임을 알뿐이다.

권은정/전문 인터뷰어
권은정/전문 인터뷰어
베토벤 연주 꿈꾸며 피아노 배워

이 철학자는 요즘 피아노를 배운다. 자기 자신을 위한 생애 최초의 배려이며 호사라는 피아노 레슨은 언젠가 베토벤을 연주하고야 말겠다는 야무진 꿈에서 시작했다. 월사금은 6만원. 동급생은 어린 초등생들이다. 바이엘을 치면서 그는 요즘 바하에 빠져 있다. 천상의 질서처럼 단순한 바하의 음계가 바로 그가 확신하는 ‘전형’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바하의 음으로 수많은 곡이 탄생하였듯이 김 교수도 아마 꿈꾸고 있을 것이다. 수많은 변화와 진정한 나아감을 위한 ‘전형’을 만들어 내기를 소망하고 있을 것이다. 그 마음을 담은 피아노 건반은 또 얼마나 깊은 소리를 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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