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윤경 교수는 애니메이션을 지망하는 아이들에게 부모들이 잘되면 스필버그가 될 수 있지만 못 되면 평생 고생토록 흑연가루 먹어가며 남이 그리라고 한 그림을 똑같이 그려내야 하는 현실을 분명히 보여줘야 한다고 말한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남녀차별 당연시되던 만화영화판에
반대 무릅쓰고 뛰어들어 3년만에 감독 돼
황금박쥐·밀림의 왕자 레오 등 옛 인기작품
사실 OEM방식으로 국내서 제작한 것
애니메이션은 종합예술…작품에 철학·인생 담겨야
반대 무릅쓰고 뛰어들어 3년만에 감독 돼
황금박쥐·밀림의 왕자 레오 등 옛 인기작품
사실 OEM방식으로 국내서 제작한 것
애니메이션은 종합예술…작품에 철학·인생 담겨야
권은정의 인터뷰 무제한/국내 최초 애니메이션 여자감독 채윤경 올해 고등학교 입학하는 조카애가 설날 모인 친척들에게 자기가 그린 만화책을 2천원에 팔았다. 우리 아이는 틈만 나면 만화그림을 끄적인다. 아이 친구는 방이 전부 만화로 덮여 있다고 한다. 요즘 청소년들에게 장래희망이 뭐냐고 물어보면 ‘애니메이션 작가’가 되겠다고 하는 답이 전 국민 중 <왕의 남자>를 본 비율과 같을 것이다. 애니메이션에 인생을 걸겠다는 아이들, 마치 마법사의 요술지팡이에 아이들이 푹 빠져 있는 것 같다. 왜 그럴까? 해답을 찾으려 채윤경 (43) 선생님을 만나러 갔다. 그는 애니메이션계에서 국내 최초의 여자 감독이다. 계원조형예술학교에서 애니메이션을 가르친 지도 어언 십년이 넘었고 학교 오기 전 그의 경력은 그보다 더하다. 튀는 색깔의 머리염색도 안했고 옷도 그저 수수하다. 어투는 정확하지만 아주 부드럽다. 차세대 유망산업인 애니메이션 하는 사람치고 전혀 ‘튀는 분위기’가 아니다. 그는 언제부터 애니메이션의 마술에 걸려 든 것일까? “대학에서 응용미술을 전공했는데 졸업반 때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우리 학과로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왔어요. 감독으로 키울 사람을 원한다고 했어요. 재미있을 것 같아 그 회사로 갔지요.” 원래는 패션디자인 쪽으로 나가기로 이야기가 다 되어 있었단다. 영상디자인 수업시간에 애니메이션에 대해 배운 게 전부였다. 당시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는 애니메이션에 대해 이해가 거의 없었다. “애니메이션? 그게 뭔데?” 하다가 “아, 만화영화”하는 정도였다. 모두 반대했다.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은 아직 가내수공업 수준이다, 절대 가지마라는 학과교수들. 한술 더 떠 아버지는 “영화계는 화류계 다음이다, 만화영화도 영화계니 절대 안 된다”며 펄쩍 뛰셨다. 고집을 피워 그쪽 회사에 갔는데 이번엔 그가 황당해졌다. “이제 와서 남학생이 아니라고 난감해 하더군요. 그래서 제 오기가 발동했지요.”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뭐 그리 내세울만한 근무조건이나 좋은 환경도 아니었다. 봉급도 성과급으로만 계산했고 출퇴근도 불분명. 걸핏하면 철야작업이었다. 그래도 그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런 근무조건을 즐기며 일했다. 그렇게 일해서 3년 만에 감독을 달았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의대 가려다 고3 직전 마음 바꿔 “애니메이션계에서 여자 감독은 생각도 못했지요. 더구나 20대 후반의 젊은 감독이었거든요. 사실 그때는 여자가 원화를 그리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어요. 남자들은 4-5년 동화를 그리면 원화로 올라가는데 여자는 10-15년 동화만 그리는 게 당연히 여겨지던 때였어요.” ‘원화’는 만화영화에서 주동작을 나타내는 그림이고 ‘동화’는 보조동작을 표현하는 그림이다. 원화를 그리는 사람이 1, 5, 7, 10번을 그리면 동화작업자가 그 사이를 채워 넣는 것이니 원화가 창의적인데 비해 동화는 보완적이라고 볼 수 있다. 남자는 원화, 감독파트를 맡고 여자는 주로 동화, 채화 파트를 맡았다. 남녀 불평등, 그게 자연스런 관행으로 굳혀져 있었단다. 채 이십년도 안 된 때의 이야기다. “요즘은 남녀차별 그런 게 있을 수 없지만 그때 애니메이션 산업은 하청산업이 주를 이루었어요. 우리가 하는 일이란 게 창조적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했지요.” 채 교수는 우리가 어릴 적에 TV안으로 거의 들어가다시피 홀딱 빠져 봤던 저 유명한 황금박쥐, 밀림의 왕자 레오, 사파이어 왕자, 이런 외화가 사실은 모두 국내제작이었다고 설명한다. “미국과 일본이 가장 큰 시장이었지요. 모두 OEM(주문자상표부착 생산방식)방식으로 했지요. 그쪽에서 스토리 보드, 캐릭터 디자인, 이런 게 오면 우리가 레이아웃, 원화, 동화, 필름까지 해서 보내고 그쪽에서 후반작업해서 그 회사 이름으로 나가는 거죠. 웬만한 것은 우리 시장을 다 거쳤다고 볼 수 있어요.” 오랜 하청산업을 통해 우리의 기술이 향상되고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음을 그는 솔직히 인정한다. 현재 우리의 애니메이션의 기술적인 발전은 세계 3위권에 이른다. 그런데 요즘 창작작품과 하청산업을 나누면서 가치를 다르게 매기는 현실을 냉정하게 짚는다. 애니메이션 기술 세계 3위권 “하청산업 분야가 그 자체로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 우리 창작에 대한 지원 폭이 넓어지면서 하청을 창작인 것처럼 겉포장을 하려는 분위기가 있는데 이건 창작을 지원하려는 취지를 망가뜨린다고 봐요.” 그는 애니메이션에 관한 한 확고한 자기주장이 서 있다. 기초부터 찬찬히 밟고 올라온 사람의 태도다. 감독을 하면서 캐릭터 디자인으로도 일가를 이뤘다. 지난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캐릭터도 그의 작품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그림을 잘 그렸지만 의대를 목표로 공부하였다. 그러다가 고3 직전에 마음을 바꿔먹었단다. 막 의대에 입학한 언니가 밤새워 공부하는 것을 보고 대학가서 또 공부해야 하나 싶어서. 집안과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1년 공부해서 미대에 떨어지면 두말 않고 재수해서 의대 간다고 부모님께 각서까지 썼다. 그의 미대 합격소식으로 부모님은 낙망에 빠지고 마셨단다. 애니메이션을 하겠다고 나서는 요즘 아이들의 기분을 그라면 충분히 이해할 것 같다. “만화영화는 예술과 엔터테인먼트가 합해진 것이에요. 애들이 좋아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성격들이 하나로 모여 있지요. 요즘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겠다는 게 존중받는 세상이 되었잖아요. 직업에 대한 가치기준도 다양해졌어요.” 사회적인 변화도 한몫을 했다. 90년대 중반부터 정부가 첨단영상산업 지원을 내세우면서 사회적인 붐-업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무슨 만화영화냐고 펄쩍뛰던 어른들도 돈이 되는 분야라니 쉬 설득당하고 만다. 정부가 미는 차세대 영상산업이라지 않는가. 그래도 못미더운 부모들이 많다. 만화가 그저 어린시절 오락일 뿐이지 평생을 좌우하는 직업으로 삼을 만 한가? 더러는 아이의 꿈도 이해 못하는 ‘무지한 부모’로 몰리기도 한다. 아이와 부모들의 거리를 어떻게 메워야 하나? “입시상담을 하려고 부모, 학생, 제가 마주 앉는데 셋 다 머릿속 그림이 달라요. 아이는 일본만화를 떠올리며 그걸 하겠다 하고, 부모는 신문에서 본 차세대 영상산업, 돈 잘 버는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저는 애니메이션이 고생스럽고 성공확률이라야 고작 3프로라는 걸 알고 있고…. 좀더 많이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부모도 공부를 해야 해요. 일단 아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여러 사실을 알게 해줘야지요. 잘되면 스필버그가 될 수 있지만 못 되면 평생토록 흑연가루 먹어가며 남이 그리라고 한 그림을 똑같이 그려내야 하는 현실을 분명히 보여줘야 해요.” 우리나라의 애니메이션 붐이 좀 지나친 면이 없지 않다고 그는 조심스레 지적한다. 현재 전국 대학에 애니메이션 관련학과가 160개나 된다고 한다. 채 교수는 애니메이션을 하겠다는 아이들에게 늘 이런 말을 해준다. “애니메이션은 종합예술입니다. 영화와 비슷하지요. 무엇보다 작품 안에 무엇을 담을지 그 생각이 있어야 해요. 철학이 기본이고 인생도 알아야 해요. 직간접적인 경험이 필요하지요.” 단지 기술적인 테크닉만 배워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난 물어보았다. 애니메이션은 좀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공상, 상상, 환타지… 그런 세계에 산다는 게 어쩐지….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는 상상, 그게 비현실적이라고요? 왜요? 아주 현실적이지요. 우주소년 아톰을 보세요. 그때는 먼 상상 이었지만 지금 로봇이 나오고 있잖아요. 무빙 워크, 달나라 여행, 그 전에는 비현실적이었지만 이제 가능해졌잖아요. 애니메이션은 우리의 꿈을 앞당겨서 현실화 시켜주는 것이에요.” 꿈을 앞당겨 현실화시켜 주는 것 그러하니 아이들이 애니메이션에 끌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으냐고 반문한다.
권은정/전문 인터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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