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열(42)
[36.5˚C 데이트] 교직 버리고 LIG화재 코치로 ‘10년만의 귀환’ 이상열
코트 위에서 그는 유난히 튀었다. 여느 선수들과는 다른 긴 머리카락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코트 위에서 고삐 풀린 야생마였다. ‘배구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후위공격을 할 때는 주위 사람들의 숨을 멈추게 하곤 했다. ‘야생마’ ‘삼손’으로 불리던 그 사나이가 최고령 프로배구 코치로 다시 코트 위로 돌아왔다. 1997년 소속팀 LG화재(현 LIG손해보험)에서 은퇴한 뒤 꼬박 10년 만이다.
모습은 꽤 달라졌다. 군데군데 흰머리가 엿보이는 머리카락은 선수 때처럼 치렁치렁하지 않다. 안경도 썼다. 입가에 편안한 미소도 품었다. ‘선수’가 아닌 ‘코치’ 이상열(42)은 그랬다. 얘기를 나누다 보면, 강인할 것만 같은 삼손 이미지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는 섬세하고 꽤 감성적이다. 아내가 첫 아이를 낳을 때 고통을 함께 하면서 눈물을 흘렸고, 몇년 전에는 큰 딸 유빈이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또 울었단다. “요즘 들어 눈물이 많아졌어요. 예전엔 안 그랬는데 …. 애들이 생겨서 그런가 봐요.” 그는 지금 두 공주(유빈·효빈)의 아빠가 돼 있다. 젊은 시절 반항기 많던 모습은 이제 그에게 없다.
사실, 그가 머리카락을 기른 이유는 “얼굴이 작고 강해 보이지 않아서”였다. 갈퀴머리는 초등학교 때 뇌막염에 걸리는 등 선천적으로 약한 몸을 가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는 연약한 자신의 몸과 싸우기 위해 남들보다 더 많은 운동을 해야 했다. “뇌막염을 앓고 난 뒤 의사가 무리한 운동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쩌다 배구를 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정말 희한한 종목이네’ 했는데, 하고 보니 나름대로 매력이 있더라고요.”
고질적 무릎통증 때문에 은퇴한 뒤, 1999년 모교인 인창고 배구부 코치가 됐다. ‘지도자가 될 자질이 있을까’ 싶은 마음에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러다 감독이 됐고 2001년에는 체육선생님도 됐다. 낯선 교직생활이 처음에는 익숙치 않았다. 그러나, 그런 삶 속에서 서서히 자신 안에 잉태돼 있던 지도자 모습을 찾아갔다. 선수시절 때 어렴풋이 느꼈던 경기분석의 중요성도 서서히 깨달아갔다. 그리고 다른 학교 훈련시스템이 훌륭하다면 기꺼이 받아들여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어갔다. 비록 2003년 학교 쪽과 불화로 배구부와는 인연을 끊게 됐지만, 소중한 경험으로 남았다.
어쩌면 정년이 보장된 교직에 있는 게 더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배구에 대한 목마름이 너무 뜨거웠다. 마침내 2006년 도하아시아대회를 앞두고 김호철(현대캐피탈 감독) 대표팀 감독이 코치로 불러줬을 때 기회가 왔다. 아시아대회 금메달 이후 일은 술술 풀려 새로 LIG 사령탑으로 부임한 박기원 감독으로부터 코치 제의를 받았다. 친정팀이었기 때문에 망설임은 없었고, 학교에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는 현재 자신이 직접 나서서 선수들과 똑같이 올해 새롭게 도입된 선진 웨이트트레이닝 시스템을 소화하고 있다. 자신이 솔선수범하지 않으면, 선수들이 새로운 시스템에 의구심을 품을 것 같아서다. “박 감독님의 선진배구를 배우고 싶어요. 실업시절 못했던 우승도 함께 하고 싶고요.”
‘삼손’의 머리는 잘렸다. 그렇다고 힘이 빠졌을까. 세월의 무게로 체력은 떨어졌을지 모르지만, 정신적으로는 한결 풍요로워진 그가 힘차게 프로배구 지도자로 첫발을 내딛고 있다.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