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단체연합은 5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3·8 세계여성의날 기념 제37회 한국여성대회를 개최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제공
1908년 3월8일 미국 뉴욕의 광장으로 쏟아져나온 1만5000여명의 여성 섬유노동자들은 “우리는 빵을 원하지만, 장미도 원한다”는 구호를 외쳤다. 빵은 생존권을, 장미는 여성의 참정권을 뜻한다. 그로부터 113년이 지난 오늘, 가장 기본적인 정치 참여 권리인 여성 ‘투표권’은 보장되고 있지만, 적극적 의미의 여성 참정권 보장은 요원하다. 2020년 21대 총선에서 당선된 300명의 의원 중 여성 의원은 57명으로 19%에 불과하다.
적극적 의미의 여성 참정권 보장은 곧 ‘정치에서의 여성 폭력’이 일어나는 현실을 인지하고, 이를 없애려는 노력을 얼마나 기울이느냐에 달렸다. ‘정치에서의 여성 폭력’은 투표할 권리, 선거에 출마할 권리 등 여성들이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자유롭게 행사하는 걸 방해하는 폭력적인 행동이나 위협을 뜻한다. 보통 여성 정치인이나 여성 당직자 등이 정치에서의 여성 폭력을 경험하지만,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려는 여성 유권자들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지난 수개월 대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되짚자면 젠더를 ‘소비’하는 방식이 될 듯 하다. ‘여성 배제의 정치’가 ‘정치에서의 여성 폭력’을 향한 길을 새롭게 열었다는 점부터 짚어볼 구석이 많다. 이른바 ‘이남자(20대 남성)’ 표심 잡기에 나선 정치권이 ‘청년 정치’를 표방하며 사실상 백래시(사회‧정치적 변화에 대해 나타나는 반발 심리) 흐름에 올라탄 ‘여성 배제 정치’를 전면화했기 때문이다.
지난 1월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여성가족부 폐지’ 일곱 글자를 자신의 페이스북에 내건 일은 정치 영역에서의 체계적 ‘여성 배제’의 ‘신호탄’ 역할을 했다. 윤 후보는 이준석 당대표와의 갈등을 가까스로 봉합할 무렵부터 지지율 반등을 위해 적극적인 ‘이남자 정치’를 펴기 시작했다. 후보 직속기구에 영입됐던 ‘페미니스트 정치인’ 신지예씨는 영입 2주 만에 사실상 방출됐고, 당초 내걸었던 ‘양성평등가족부 개편’ 공약도 ‘여가부 폐지’로 후퇴됐다. 윤 후보가 지난 2월4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더는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 차별은 개인적인 문제”라고 답한 것은 ‘여성 배제 정치’가 제1야당의 주요 의제로 자리 잡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꼽힌다.
동시에 여러 언론사와 시민단체의 여성·성소수자·인권 의제 관련 질의에는 ‘답변 거부’가 이어졌다. 국민의힘 선대위는 지난 8일 보도된 <한겨레>의 ‘나의 선거, 나의 공약’ 기획 시리즈 중 ‘성평등’ 편에 대한 질의에 답변을 거부했다. 당시 국민의힘 관계자는 “따로 공약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예정하고 있어 시기를 정해서 발표하려 하다 보니 시차가 발생했다”고 했지만, 그뒤 성평등 공약 관련 기자회견은 7일 현재까지 열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준석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도 국민의힘이 청년 시민단체의 성평등 관련 질문에도 응답하지 않았다고 강조하며 답변 거부의 ‘의도성’을 홍보했다. 국민의힘과 국민의당은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의 성소수자 정책 질의, 일본군위안부피해지원단체 네트워크의 질의에도 답변을 거부했다.
백래시 정서가 강한 청년남성 위주로 짜여진 국민의힘 청년 그룹은 ‘여성 배제 정치’의 선두에 섰다. 국민의힘 선대위 청년본부 양성평등특별위원회는 ‘성인지 예산’이나 ‘비동의 간음죄’와 관련해 사실관계를 왜곡한 가짜뉴스를 카드뉴스 형태로 유포했다. 이어 윤 후보는 지난달 27일 경북 포항 유세 과정에서 “성인지 감수성 예산 30조 중 일부만 떼어내도 북한의 핵 위협을 막아낼 수 있다”고 발언하는 등 청년 그룹이 유포한 ‘가짜뉴스’를 확대재생산하는 데 앞장섰다. 양성평등위는 비동의 간음죄 도입 법안을 발의했던 조배숙 전 의원의 후보 직속기구 영입에 반대해, 조 전 의원으로부터 ‘비동의 간음죄에 반대한다’는 입장 변화를 끌어내기도 했다.
최근 성평등 이슈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 대선후보도 선거 레이스 초기 ‘이남자 정치’ 앞에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 후보는 지난해 11월 ‘문재인 정부가 페미니즘 정책으로 남성을 역차별해 남성 표심이 돌아섰다’는 취지의 남초 커뮤니티의 글을 선대위 회의에 공유했다. 지난 1월에는 ‘페미 방송에 출연하지 말라’는 일각의 주장을 의식해 유튜브 채널 <씨리얼>과 <닷페이스> 출연을 번복하기도 했다.(<닷페이스>는 이후 다시 출연을 결정했다) 이 후보가 지난 2일 대선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민주당 소속 지자체장들의 권력형 성범죄를 처음으로 사과하기는 했지만,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에 앞장섰던 이들이 여전히 민주당 선대위에 남아있는 상황이라는 지적도 있다.
“배제의 정치, 여성폭력 가능성 심화시킬 것”
‘배제의 정치’가 ‘정치에서의 여성 폭력’을 용인하는 위험한 신호들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에는 윤 후보의 유세현장에서 지지자들이 ‘선제타격’ 발언을 비판하는 1인 시위를 하던 여성을 밀치고 손팻말을 빼앗는 영상이 연달아 에스엔에스(SNS)에 공유되며 논란이 됐다. 영국 <비비시(BBC)>의 로라 비커 한국 특파원은 자신의 에스엔에스에 유세현장 폭행 영상을 공유하며 “한국의 반페미니즘 급부상에 대한 보도를 준비하면서 윤 후보의 젊은 남성 지지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침묵시키고 싶지 않다’고 반복해서 말했지만, 이 영상은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고 썼다.
이번 대선에서 ‘청년 정치’의 이름으로 반복된 ‘여성 배제 정치’는 청년 여성 유권자들은 위축을 불러왔다. 지난달 <한겨레>의 대선 정책 기획 인터뷰에 응했던 20대 여성 유권자들은 “선거권을 박탈당한 느낌” “화도 나지 않는 포기와 절망감” “나를 위한 정치를 해줄 사람은 없을 것 같은 무기력감”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권수현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는 “이번 대선에서 목격된 ‘배제의 정치’는 여성 유권자를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점에서 ‘정치에서의 여성 폭력’이 발생할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심화시키는 것”이라며 “결국 한쪽 성별의 정치 독점을 막는 성별할당제의 도입 등으로 현재 과소대표되고 있는 더 많은 여성 정치인과 여성 유권자의 목소리가 정치 영역에서 관철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짚었다.
임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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