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급 4700원 대학 청소노동자
압박붕대 감고 종일 중노동
“백수 아들…두딸은 간호조무사
계층상승 꿈 허망하게 사라져”
근로기준법 보호 못받는
가사·육아도우미는
고용·산재보험 가입도 안돼
‘비공식 노동자’로 불리는 설움
전주의 한 중학교에서 급식조리사로 일하는 최유정(가명·43)씨의 삶은 빽빽하다. 틈이 없다.
한달에 95만원을 번다. 자녀 학원비로 93만원을 쓴다. 고등학교 2학년 맏아들의 주말 학원비 25만원, 고등학교 1학년 딸의 영수학원비 50만원, 초등학교 1학년 막내아들의 태권도학원 및 방과후교실 3과목 18만원 등이다. 남는 2만원은 아이들 대학등록금에 쓰려고 적금에 넣는다. 2년 전 정규직이 된 남편의 월급 250만원은 다섯 가족 생활비로 쓰인다.
밥짓고 또 밥을 짓느라 하루 24시간을 보낸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아침상을 차린다. 2남1녀의 곁에서 최씨도 졸린 눈으로 한술 밥을 뜬다. 아이들이 각자 학교로 가는 길에 최씨도 최씨의 학교에 간다. 7시반까지 출근해 중학생들 점심 밥과 반찬을 또 짓는다. 오전 11시40분까지 배식 준비를 마치고, 10분 동안 최씨는 급한 점심을 해치운다.
급식이 끝나면 설거지와 청소를 한다. 오후 4시 퇴근해 집에 오면 방과후 수업 등을 마친 초등학생 막내가 도착한다. 다시 저녁을 차려 먹이고 숙제를 봐준다. 한숨 돌리기는 쉽지 않다. 저녁 11시께 고등학생인 첫째· 둘째가 온다. 간식을 챙겨주면 자정이다.
주말은 쉬는 날이 아니다. 경기도에서 일하는 남편은 빨래더미와 빈 반찬통을 들고 주말마다 전주에 온다. 남편이 먹을 반찬을 챙기고 밀린 빨래를 하면 토·일요일이 순식간이다.
그의 인생 전체가 순식간이었다. 여상을 졸업하고 봉제공장 경리사원으로 취직했다. 그에게도 젊어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 스물일곱에 결혼해 아이를 낳으며 회사를 관뒀다. 둘째가 두살 되던 해, 다시 일을 시작했다. 남편은 비정규직이었고 살림은 벅찼다. 주말마다 시댁에 아이를 맡기고 예식장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그 사이 아이들이 자랐고 교육비도 늘었다.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말에 보험설계사로 일했다. 4년 동안 성과압박에 시달리다 셋째를 가지면서 관뒀다. 출산 뒤 다시 일을 시작했다. 어느덧 중년이 된 최씨에게 돌아오는 일자리는 식당 파트타이머 뿐이었다. 직업훈련학교에서 조리사 자격증을 딴 것이 그나마 보탬이 됐다. 3년 전 중학교 급식조리사 일을 구했다. 월급은 조금 올랐으나 비정규직인 처지는 변함이 없다.
최씨의 꿈은 어디선가 갈피를 잃었다. “아이들이 있으니까… 제 꿈은 생각 안하게 되더라고요.” 최씨의 심신도 생기를 잃었다. 하루 종일 식칼, 국자, 배식통을 붙들고 용쓰느라 어깨·허리·팔이 욱신거리지만, 근육이 미처 생기를 찾기도 전에 매일 새벽을 맞는다. 최씨의 손발은 항상 부어 있다.
여자를 이해하는 대통령이 있으면 좋겠다고 최씨는 생각한다. 자녀의 교육비가 줄었으면 좋겠고, 교육비를 감당할만한 좋은 일자리가 여성에게 제공됐으면 좋겠고, 굳이 나이 들어 고된 일을 감당하지 않도록 자녀들이 일찍일찍 취업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자식 세명 낳으면 애국자라던데, 나라에선 아무것도 안 도와주네요.” 최씨가 말했다. “힘들죠. 그래도 뭐 어쩌겠어요. 엄마들은 다 이렇게 사는 거죠.” 그것은 나라가 할 일을 온통 떠안아버린 한국 아줌마들의 일생이다. 전주/이경미 최유빈 기자 kmlee@hani.co.kr
만경강의 상류가 되는 삼천과 전주천이 전주를 세로 지른다. 동쪽 전주천 주변이 한옥마을이 있는 구도심이다. 구도심에 있던 도청·경찰청·교육청 등 공공기관은 2000년대 이후 삼천을 건너 서쪽 신시가지로 이전했다.
신시가지의 서쪽 끝에 있는 전주대학교에서 정영숙(53)씨는 12년째 청소 일을 한다. 13일 아침 8시 인문·사범대 건물인 5층짜리 진리관에서 정씨는 바쁘게 움직였다. 난방이 안 되는 복도는 춥다. 추위를 덜 느끼려면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 “애들 뒷바라지 하느라 그랬지, 뭐.” 노련한 손놀림으로 강의실 쓰레기통을 재빨리 비우는 동안에도 수업을 기다리는 학생들은 정씨를 신경쓰지 않았다. 며칠 전 임용고사가 끝났다. 건물 곳곳엔 흔적이 남았다. 파티라도 벌였는지 쓰레기통 안엔 맥주캔, 피자박스 등이 그득하다. 포장을 뜯지 않은 찹쌀떡도 처박혀있었다. “흠. 돈이 흔하구먼.” 문제집과 강의자료도 쓰레기통에서 쏟아져나왔다. 금세 불어난 쓰레기는 정씨 혼자 들기 무거웠다. 계단 아래로 낑낑대며 굴려보냈다.
전주대엔 모두 50명의 청소노동자가 있다.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한다. 화장실·강의실·복도·계단 등 구석구석 쓰레기를 줍고 쓸고 닦아 시급 4700원을 받는다.
오전 근무 중 10시20분부터 30분까지 단 10분만 휴게시간이 허락된다. 2시간20분 동안 쉬지않고 건물을 돌아다니며 청소를 한 정씨는 신발도 안 벗고 3평짜리 온돌 깔린 휴게실에 들어가 굽었던 허리를 폈다. 티셔츠 안에 찬 압박붕대가 보였다. “하루종일 허리 숙이고 있으니께, 이거 안 하면 아파서 일을 못혀.”
전북 임실에서 우체부로 일하던 남자를 만나 정씨는 열아홉에 결혼했다. 큰 아이가 13살 되던 20대 초반 무렵 전주로 이사했다. 자식 교육은 도시에서 시키고 싶었다. 이사와 함께 일자리도 구했다. 가난했지만 끼니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초등학교를 겨우 마친 정씨가 직장 생활에 미련을 뒀던 것도 아니었다.
“애들 뒷바라지 하느라 그랬지, 뭐.” 정씨는 통닭집에 취직해 양념 만드는 일을 했다. 18년 전부터 청소일을 시작했다. 퇴직한 남편은 골프장 탈의실과 사우나 청소를 하고 있다. “비정규직이니께. 언제 잘릴지 몰라 불안하지.”
자녀들이 중고등학교에 차례로 들어가는 동안, 정씨가 허드렛일로 번 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뒷바라지는 아이들이 자라 스무살을 넘긴 뒤에도 계속 됐다. 그러나 제대로 교육시켜 자식만큼은 잘 살게 해주고 싶었던 정씨의 노력은 충분히 보상받지 못했다.
■ 계급 상승의 꿈은 사라지고 큰 아들은 대학 진학에 실패했다. 부모에게 짐이 되기 싫다며 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었던 게 패착이었다고 어머니 정씨는 생각한다. 아들은 군 제대 뒤에 다단계 판매에 빠졌다. 돈을 벌기는커녕 잃었다. 이후 전주 시내 대형마트 비정규 점원으로 일했다. 아무리 일해도 월급은 오르지 않고 보람도 없었다. 그 심정을 모르지 않는 정씨는 아들에게 덜컥 3000만원을 건넸다. 아들은 당구장을 차렸지만 이내 망했다. 이제 30대가 된 큰 아들은 공장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 대기업 공장에 자리가 나길 기다리느라 아직은 백수 신세다.
큰 딸 역시 서른 나이로 접어들었는데, 지난해 2년제 대학 간호조무과에 들어갔다. 고교 졸업 뒤 간호조무사로 일하며 박봉을 받다가, 2년제 대학 졸업장이 있으면 조금이나마 월급이 오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둘째 딸은 어릴 때부터 심장병을 앓았다. 학교 생활을 따라잡기 힘들었던 탓에 성적은 좋지 않았다. 그나마 언니가 사는 모양새를 보고 간호조무사 일을 시작했다. 자녀 교육을 통해 ‘계급 상승’을 기대했던 정씨의 꿈은 이제 가뭇없이 사라지고 있다.
전주의 한 병원에서 일하는 간병인 김순자(가명·58)씨는 지난날을 돌아보면 한스럽다. 하루 12시간 일해서 일당 4만5000원을 받는다. 시급 3750원꼴이다. 젊은시절 봉사활동을 겸해 간병인 자격증을 따뒀는데, 가계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간병일을 시작했다.
“애들이 고등학생 되니까, 이리저리 쓰일 돈도 있고해서 일을 시작했는데, 오히려 후회돼요. 저녁에 퇴근해 애들 얼굴도 못보고 쓰러져 잤는데, 그때 차라리 집에서 뒷바라지 했더라면…. 대학을 나왔어도 아이들이 아직 취업 준비하고 있는데, 괜히 내 탓 같아요.”
저소득층 주부 대부분은 김씨처럼 교육비를 감당할 요량으로 월급 100만원 이하의 맞벌이에 나서지만, 이들이 자녀교육을 통해 중산층을 따라잡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평생 일해 돈버는 저소득층보다 더 많은 돈을 중산층은 자녀교육비에 투자한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소득 하위20%와 상위 20%간의 교육비 지출 격차는 2003년 4.9배에서 2010년 6.3배로 늘었다.
■ 아줌마들을 위한 좋은 일자리는 없다 값비싼 학원에 다니며 공부한 상류층·중산층 자녀들은 곧잘 명문대에 진학해 고소득 직종을 선점한다. 이를 따라잡으려는 저소득층 기혼여성의 전략이 성공하려면 더 많은 돈을 버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줌마들을 위한 일자리는 마땅치 않다. “공부 잘하면 교사·공무원 되고, 못하면 비정규 서비스직 한다”고 전주에서 만난 아주머니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덕진구 인후동 모래내시장 근처 옷가게에서 판매원으로 일하는 김숙희(가명·42)씨는 수많은 일자리를 거쳤다. 처음엔 백화점 매장에서 판매사원으로 일했다. 나중엔 마트에서 햄 판촉일을 했다. 그 뒤 발마사지를 배워 마사지샵에서 일했다. 그 뒤로는 급식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지난해부터 친구의 소개로 옷가게에서 일한다.
“마트에서 처음 일할 때 월급을 60만원 받았는데, 8년 동안 일해도 월급이 90만원이었요. 해도해도 월급은 안 오르지,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려 해도 갈 데가 없지, 여자들 살기가 참 힘들어요.”
지난해 기준으로 전주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43.9%로 전국 평균(49.7%)보다 낮다. 제조업 비중이 낮고 서비스업 비중이 높은 전주의 산업구조는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여성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주지 않는다. 전주 여성 근로자의 비정규직 비율은 전국(42.8%)과 비슷한 42.9%다. 특히 비정규직이 많은 교육·보건·사회복지서비스 분야 종사자 비율이 전국(23.9%)보다 많다(29.6%).
배영숙(가명·52)씨는 그런 비정규직조차 부럽다. 지난 5일, 덕진구 송천동의 50평짜리 아파트에서 가사도우미 배씨는 다섯식구가 출근·등교한 뒤 전쟁터처럼 어지러워진 집안을 빠른 발걸음으로 오가며 치우고 있었다. “무거운 화분 들다 허리 다치고, 의자 위에 올라 책장닦다가 넘어지고, 화장실을 락스로 청소하느라 눈도 나빠졌어요.”
그래도 치료비는 배씨 돈으로 치르는 수밖에 없다. ‘파출부’로 불렸던 가사도우미는 근로기준법으로 보호받는 노동자가 아니다. 고용·산재보험에 가입할 방법도 없다. 노동계에선 이들을 ‘비공식노동자’라 부른다.
비공식노동자 배씨는 지난 5월 자궁에서 혹을 떼는 수술을 받느라 넉달간 일을 못했다. 유치원 교사였던 딸도 몸이 아파 일을 쉬던 터라 가계 수입이 전혀 없는 상황이 됐다. 전기세를 낼 돈조차 없었다. “차상위계층 지원받으려고 구청에 갔더니 6개월 이상 병원 진료 기록이 있어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지원 받으려면 더 오래 치료받아야 한다는 건데 그럴 수 있나요. 필요해서 도움 받으려는 사람한텐 정부가 도와주는 게 없어요.”
배씨의 평생은 비정규 노동과 비공식 노동으로 점철돼 있다. 젊은 시절엔 여러 업종을 전전하며 판매·판촉 직원으로 일했다. 45살부터 간병일을 시작했다. 환자를 옮기는 일이 힘에 부쳐 2년 전부터 가사도우미를 하고 있다.
교육비를 벌겠다고 일자리를 구하지만, 제공되는 일자리는 비정규·비공식 노동 뿐이고, 낮은 임금으론 높은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고, 자녀의 학력 격차는 벌어지고, 결국엔 취업조차 고전하는 자녀를 건사하느라 아픈 몸으로 저임금 불안정 노동을 계속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 악순환 고리에 빠져드는 젊은 아줌마들 30대의 ‘젊은 아줌마’들도 그 불길한 미래를 예감한다. 김혜영(가명·37)씨는 중학생 1·2학년인 두 아들의 학원비를 벌기 위해 7년 전 재취업에 나섰다.
“적게 벌어 적게 쓰면 된다는 사람들이 있지만, 애들이 중고등학생이면 교육비를 안 쓸 수가 없어요. 엄마가 벌어야 교육비를 감당할 수 있고…. 교육비 때문에 맞벌이하는 사람들 많아요.”
결혼 전엔 제약회사 연구보조원으로 일했지만, 30대의 나이에 구할 수 있는 일자리는 변변치 않았다. 건설회사 사무직을 겨우 구했다가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경리로 일하고 있다. “일하고 싶어도 요즘 누가 아줌마를 써주나요. 더 나이들면 마트 정도 가겠죠. 자격증 공부라도 해볼까 하는데, 아이 키우고 가사일 하면 하루가 피곤해서 쉽지 않아요.”
지난해부터 전주의 한 중학교에서 특수교육지도사로 일하고 있는 박혜선(가명·35)씨는 지난 9일 전북도교육청을 찾았다. 학교 조리사·영양사·특수교육지도사 등 주로 돌봄노동을 하는 여성 비정규직들이 모여 집회를 열었다. 이들 대부분이 한달 100만원 이하의 저임금을 받는다. 수십년 일해도 월급은 제자리에,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에 시달린다.
박씨는 특수교육지도사다. 장애아이가 수업을 들을 수 있게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돕는 일이다. 미술시간엔 아이의 손을 잡고 그림을 그리고, 체육시간엔 다른 아이들이 뛰놀 때 매트에서 같이 윗몸일으키기를 한다. 옷을 갈아입히고, 업고 계단을 오르내리고, 밥을 떠 먹이고, 화장실에서 뒤를 닦는 일까지 박씨의 몫이다.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아이를 제어하느라 온몸이 쑤신다.
박씨 같은 특수교육지도사는 돌보던 장애아가 졸업하고 새로운 장애아가 입학하지 않으면 일거리가 사라진다. 어렵게 다른 학교에 취직해도 기존 경력이 인정 안 된다.
결혼 전 박씨의 삶은 이처럼 불안정하지 않았다. 정규직 사회복지사였고 130만~140만원을 받았다. 지금은 100만원이 안 된다. 버는 돈은 대부분 9살과 6살 두 자녀 교육비로 쓴다. 임실에서 계약직 회사원으로 일하는 남편의 한달 수입도 110만원 남짓이다.
결혼 전엔 복지단체를 차리는 개인적인 꿈을 꿨지만, 이제는 아이가 살 세상 고민이 먼저다. 대선을 앞둔 박씨는 모든 정당의 복지정책을 꼼꼼하게 살펴본다. “약자한테 복지혜택이 가야 하는데 힘 없고 돈 없어 지원에서 더 소외되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서민 실상을 잘 아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좋겠어요.”
올해 엄마가 된 특수교육지도사 노진영(31)씨도 마찬가지다. 보육수당이 지원되니까 그동안 일할 수 있었는데, 내년부터 중단된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불안하다. 그는 보육비, 교육비 부담을 줄여주거나, 그 부담을 지고 살아가는 아줌마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해주거나, 둘 중의 하나라도 제대로 하는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다. “다음 대통령은 제발 부디 엄마들 처지를 이해하고, 엄마들 일자리라도 안정되게 해주면 좋겠어요.”
전주/이경미 최유빈 기자 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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