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 합정동 홈플러스 입점 저지에 나선 망원동 시장 상인 서정래(오른쪽)씨가 지난 9월18일 합정역 앞 농성장에서 동료 상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지난 8월 시작된 이들의 천막농성은 두달 가까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경제민주화와 나] ① 시장상인 서정래씨
경제민주화는 재벌 개혁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헌법 조항에서도 재벌의 시장 지배와 경제력 남용을 막는 것뿐 아니라 국민경제 전반의 안정과 적정한 소득분배, 다양한 경제주체들 사이의 조화를 아우르는 넓은 의미로 경제민주화를 규정하고 있다. 경제민주화는 또한 대선을 앞둔 정치권에서 맴도는 ‘그들만의 이슈’가 아니라 중소상인, 일반 납세자, 중소기업 등 각 영역에 두루 얽히는 ‘우리들의 과제’이다. 경제민주화 바람이 대규모 유통자본의 골목상권 침범을 제어하는 ‘무기’로 활용되고 있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이미 ‘나’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그 흐름은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여섯 차례의 연재물을 통해 경제민주화 흐름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꿔 놓을지를 가늠해 본다.
대형마트에 맞선 8개월…“경제민주화가 따로 있나요”
망원시장서 옷가게 20년
대형마트가 삶 뒤흔들어
입점반대 집회 전면에 나서 ‘합정동 홈플러스 결사반대’라는 글귀가 적힌 연두색 ‘투쟁조끼’가 이젠 어색하지 않다. 집회 현장에서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도 어느덧 유행가 가락처럼 편안해졌다. 지난 일곱달 새, 서울 마포구 망원시장 상인 서정래(50)씨의 삶은 많이 달라졌다. 지금은 대형마트에 맞서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망원시장 상인들의 싸움을 맨 앞에서 이끌고 있고 ‘경제민주화’니 ‘대형 유통자본의 탐욕’이니 하는 말들을 자연스럽게 입에 올리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하루하루 매출 올리기에 바쁜 평범한 옷가게 사장님이었다. 서씨는 20년 전 맨손으로 옷 장사에 뛰어들었다. 지방의 작은 회사에서 2년 남짓 직장생활을 하다 그만두고, 망원시장에 8평짜리 가게를 얻었다. “4평은 살림집으로 쓰고, 나머지 공간에서 ‘꼬마동이’라는 자체 브랜드로 어린이옷을 팔았어요. 장사 경험이 없다 보니 처음엔 꽤 고생을 했죠.” 당시엔 그래도 시장 경기가 좋았던데다, 앞뒤 안 가리고 열심히 뛴 덕분에 그는 자리를 잡았다. 시대 흐름에 발맞춰 인터넷 의류 쇼핑몰도 열어 판로를 넓혔다. 그런데 세금 문제로 한순간에 사업을 접어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초창기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다 보니까 잘 몰랐죠. 오프라인에서 하던 방식대로 했고 세무사도 그 정도만 신고하면 된다고 했는데 뒤늦게 세무조사를 받았어요. 매입자료가 없다 보니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추징을 당해 가게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죠.” 서씨는 16년 동안 키워온 어린이옷 사업을 포기했지만 시장을 떠날 순 없었다. 그동안 관계를 맺어온 단골들이 있고, 젊은 시절을 모조리 쏟아부은 삶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그는 같은 자리에 숙녀복 매장을 열어 재기에 나섰다. 다만 이번엔 자신의 브랜드가 아니라, 중견 패션업체의 가맹점을 운영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그동안 대형마트가 유통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자본력이 있는 업체 쪽으로 힘이 쏠리다 보니, 개인이 시장에서 이들과 경쟁하기는 힘든 시대가 됐다”며 “큰 기업에 의존해 장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망원시장 인근에 대형마트가 들어온 것은 서씨가 장사를 시작하고 10년쯤 지난 2003년이었다. 시장에서 1.5㎞ 정도 떨어진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 까르푸가 매장(현재 홈플러스 월드컵점)을 열었다. 하지만 처음엔 이 대형마트가 자신을 포함한 시장 상인들의 삶을 옥죄는 ‘괴물’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엔 하나의 문화트렌드로 생각
경쟁상대라는 의식도 없없는데…
어느 때부터 장사가 안되기 시작
경기가 살아나도 마찬가지였다” 시장 670m 거리에 대형마트 예정
반경 1㎞ 소매점 545개 타격 전망
“상인들이 수십년 일궈온 상권인데
블랙홀처럼 모든 걸 빨아들여가” “그때는 하나의 문화 트렌드로 생각하고 저도 대형마트에 쇼핑하러 자주 갔었죠. 경쟁상대라는 의식도 없었고요. 그런데 까르푸가 이랜드로 넘어갔다가 다시 홈플러스에 인수된 뒤 24시간 영업을 하고, 최저가 마케팅에 열을 올리는 것을 지켜보면서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죠.” 대형마트뿐 아니라 기업형슈퍼마켓(SSM)인 홈플러스익스프레스도 시장에서 300m 떨어진 망원역에 매장을 냈다. 이웃 동네인 상암동과 연남동의 목 좋은 곳에도 홈플러스익스프레스가 들어섰다. 홈플러스 월드컵점이 홈플러스 전국 최고 매출 매장으로 성장해가는 동안 시장 상인들의 매출은 눈에 띄게 떨어졌다. “어느 때부턴가 장사가 잘 안되는 거예요. 경기가 살아난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저의 경우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루 매출이 비슷할 정도예요.”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봄부터 홈플러스 매장이 또 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전통시장 부근에 대형마트가 들어오는 것을 규제하는 법률과 조례가 통과됐기 때문에, 시장 상인들은 처음엔 ‘설마 그럴까’라고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지난해 10월 마포구청에 정식 질의를 했더니, ‘홈플러스 합정점이 입점하기로 돼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조례가 통과되기 직전에 홈플러스가 등록 절차를 완료한 것이었다.
홈플러스 합정점은 지하철 2호선 합정역과 바로 연결되는 신축 주상복합건물 지하에 터를 마련했다. 망원시장과는 불과 670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상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홈플러스 월드컵점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 비슷한 규모의 대형마트가 또 들어서면, 지역상권 붕괴는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실제 한누리창업연구소의 보고서를 보면, 홈플러스 합정점이 들어설 경우 반경 1㎞ 이내의 소매점 545개가 타격을 입고, 특히 가공식품과 농수축산품을 판매하는 69개 점포는 영업이익이 66.8%나 줄어드는 것으로 예상됐다.
망원시장과 바로 옆 망원월드컵시장 상인들은 홈플러스 입점 저지 대책위원회를 꾸려 지난 2월부터 서명운동에 들어갔다. 서씨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집회 시나리오도 직접 짜고 사회도 보면서 동분서주했다. 상인들은 4차례나 시장 전체 가게 문을 닫고 홈플러스 입점 반대 집회를 열었다. 연대의 손길도 이어졌다. 지역주민 1만7000여명이 홈플러스 입점에 반대하는 서명에 동참했고, 시민단체도 반대운동에 결합했다. 그사이 세 차례 홈플러스와 상인들이 만나 사업조정안을 논의했다. 하지만 홈플러스 쪽의 입점 의사는 변함이 없었다. 상인들은 결국 마지막 수단으로 지난 8월10일부터 홈플러스 합정점이 들어설 예정인 주상복합건물 앞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서씨는 매일 낮 12시부터 2시까지 그곳에서 3평짜리 천막을 지키고 있다.
그는 홈플러스 합정점 입점 반대 투쟁을 하면서 자신과 시장 상인들이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고 했다. “시장 상인들이 다 그렇듯이 먹고살기 바빠서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깊이 고민할 여력이 없어요. 이번에 함께 공부하고 논의하면서 대형마트가 지역경제를 어떻게 파괴하는지 알게 됐죠.” 지역상인들이 수십년 동안 투자하고 고생해 일궈놓은 기존 상권에 대형마트가 치고 들어와 수천억원의 매출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그 돈은 대부분 지역 밖으로 빠져나간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지역에 돈이 돌 수가 없죠. 결국 예전에 중소영세 자영업자와 지역주민들이 상생하던 지역경제의 선순환 구조가 무너져버리는 거죠.”
서씨는 올해 대통령선거의 화두인 경제민주화가 ‘나 자신의 문제’라는 사실도 깨닫게 됐다. “입점 반대 투쟁을 한창 하고 있을 때, 정치권과 언론에서 경제민주화라는 얘기가 계속 나오더라고요. 그때 생각했죠. 복잡한 이론이나 논리도 중요하지만, 대형 자본의 탐욕에 맞서 지역경제의 건강한 생태계와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우리 상인들의 투쟁이 바로 경제민주화 운동이라는 것을….”
시장 상인들의 끈질긴 투쟁에 시민단체가 연대하고 정치권과 언론이 관심을 보이면서 홈플러스 합정점 입점 반대 운동은 한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 골목상권을 지키기 위한 상징으로 떠올랐다. 서씨가 자부심과 함께 책임감을 아울러 느끼는 배경이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싸우고도 막아내지 못하면 희망은 없습니다. 상인들도 끝까지 열심히 버티겠지만, 경제민주화를 하겠다는 정치권이 힘을 실어줘야 합니다.”
김수헌 기자 minerva@hani.co.kr
[관련 영상] <정보다> ‘오만한’ 영국대사관 ‘방자한’ 홈플러스
대형마트가 삶 뒤흔들어
입점반대 집회 전면에 나서 ‘합정동 홈플러스 결사반대’라는 글귀가 적힌 연두색 ‘투쟁조끼’가 이젠 어색하지 않다. 집회 현장에서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도 어느덧 유행가 가락처럼 편안해졌다. 지난 일곱달 새, 서울 마포구 망원시장 상인 서정래(50)씨의 삶은 많이 달라졌다. 지금은 대형마트에 맞서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망원시장 상인들의 싸움을 맨 앞에서 이끌고 있고 ‘경제민주화’니 ‘대형 유통자본의 탐욕’이니 하는 말들을 자연스럽게 입에 올리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하루하루 매출 올리기에 바쁜 평범한 옷가게 사장님이었다. 서씨는 20년 전 맨손으로 옷 장사에 뛰어들었다. 지방의 작은 회사에서 2년 남짓 직장생활을 하다 그만두고, 망원시장에 8평짜리 가게를 얻었다. “4평은 살림집으로 쓰고, 나머지 공간에서 ‘꼬마동이’라는 자체 브랜드로 어린이옷을 팔았어요. 장사 경험이 없다 보니 처음엔 꽤 고생을 했죠.” 당시엔 그래도 시장 경기가 좋았던데다, 앞뒤 안 가리고 열심히 뛴 덕분에 그는 자리를 잡았다. 시대 흐름에 발맞춰 인터넷 의류 쇼핑몰도 열어 판로를 넓혔다. 그런데 세금 문제로 한순간에 사업을 접어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초창기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다 보니까 잘 몰랐죠. 오프라인에서 하던 방식대로 했고 세무사도 그 정도만 신고하면 된다고 했는데 뒤늦게 세무조사를 받았어요. 매입자료가 없다 보니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추징을 당해 가게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죠.” 서씨는 16년 동안 키워온 어린이옷 사업을 포기했지만 시장을 떠날 순 없었다. 그동안 관계를 맺어온 단골들이 있고, 젊은 시절을 모조리 쏟아부은 삶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그는 같은 자리에 숙녀복 매장을 열어 재기에 나섰다. 다만 이번엔 자신의 브랜드가 아니라, 중견 패션업체의 가맹점을 운영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그동안 대형마트가 유통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자본력이 있는 업체 쪽으로 힘이 쏠리다 보니, 개인이 시장에서 이들과 경쟁하기는 힘든 시대가 됐다”며 “큰 기업에 의존해 장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망원시장 인근에 대형마트가 들어온 것은 서씨가 장사를 시작하고 10년쯤 지난 2003년이었다. 시장에서 1.5㎞ 정도 떨어진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 까르푸가 매장(현재 홈플러스 월드컵점)을 열었다. 하지만 처음엔 이 대형마트가 자신을 포함한 시장 상인들의 삶을 옥죄는 ‘괴물’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경쟁상대라는 의식도 없없는데…
어느 때부터 장사가 안되기 시작
경기가 살아나도 마찬가지였다” 시장 670m 거리에 대형마트 예정
반경 1㎞ 소매점 545개 타격 전망
“상인들이 수십년 일궈온 상권인데
블랙홀처럼 모든 걸 빨아들여가” “그때는 하나의 문화 트렌드로 생각하고 저도 대형마트에 쇼핑하러 자주 갔었죠. 경쟁상대라는 의식도 없었고요. 그런데 까르푸가 이랜드로 넘어갔다가 다시 홈플러스에 인수된 뒤 24시간 영업을 하고, 최저가 마케팅에 열을 올리는 것을 지켜보면서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죠.” 대형마트뿐 아니라 기업형슈퍼마켓(SSM)인 홈플러스익스프레스도 시장에서 300m 떨어진 망원역에 매장을 냈다. 이웃 동네인 상암동과 연남동의 목 좋은 곳에도 홈플러스익스프레스가 들어섰다. 홈플러스 월드컵점이 홈플러스 전국 최고 매출 매장으로 성장해가는 동안 시장 상인들의 매출은 눈에 띄게 떨어졌다. “어느 때부턴가 장사가 잘 안되는 거예요. 경기가 살아난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저의 경우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루 매출이 비슷할 정도예요.”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봄부터 홈플러스 매장이 또 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전통시장 부근에 대형마트가 들어오는 것을 규제하는 법률과 조례가 통과됐기 때문에, 시장 상인들은 처음엔 ‘설마 그럴까’라고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지난해 10월 마포구청에 정식 질의를 했더니, ‘홈플러스 합정점이 입점하기로 돼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조례가 통과되기 직전에 홈플러스가 등록 절차를 완료한 것이었다.
서울시 마포구 망원동 주민들이 3일 오후 망원시장과 월드컵시장을 돌아보며 저녁 찬거리를 사고 있다. 이곳 전통시장 인근에는 홈플러스 합정점이 들어설 예정인 가운데, 시장 상인들이 지난 2월부터 반대 운동을 펼치고 있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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