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금 조성과 편법 경영권 승계 등의 혐의를 받고 있는 정의선 기아자동차 사장이 20일 오전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 들어서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정의선 사장 소환… ‘후계자의 길’ 단죄 벼랑위에
20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검청사에 도착한 정의선(36)은 초라한 피의자였다. 50여명의 그룹 임직원들이 청사 안에 대기했지만 보호막이 되지 못했다.
정 사장은 취재진들에게 “임직원 여러분과 국민 여러분들에게 대단히 죄송스럽게 생각한다”며 혐의사실을 인정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안에 들어가서 말씀드리겠다”고 말했다.
검찰은 정 사장을 불러 비자금 조성,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의 비리, 계열사 부채 탕감을 위한 로비 의혹 등에 개입했는지 캐물었다. 만약 검찰 수사에서 혐의가 드러나 구속되면 그의 후계자 자리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천정배 법무부 장관은 이날 “(공정한 시장경제의) 룰을 어기면 그 피해는 다른 기업들에 돌아가기 때문에 다 감싸야 경제가 잘 된다는 주장은 논리에 맞지 않다”고 밝혔다.
정 사장은 29살 때인 1999년에 현대차 자재담당 이사로 입사해 지난해 초 기아차 대표이사 사장으로 오르기까지 후계자로서 탄탄대로를 걸어왔다. 1년에 한번꼴로 승진을 하면서 구매, 국내영업, 기획총괄, 해외영업본부 등 그룹의 주요 보직을 두루 거쳤다.
현대차의 한 임원은 “그룹에서 절대 권력자는 회장 한 사람뿐이다. 실제로 정 사장이 독자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면서 경영권 승계 과정의 비리에 그가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 사장은 또 여느 재벌 3세들과 달랐다고 한다. 다른 임원은 “구매총괄본부나 국내영업본부에 있을 때 직원들과 회식 자리에서 결코 가운데 자리에 앉지 않았다. 직접 술병을 들고 돌아다니며 모두와 술잔과 인사를 나누었다”며 겸손함과 소탈함을 추켜세웠다.
하지만 정 사장에 대한 이런 ‘보호논리’가 통하기에는 지위가 이미 너무 올라가버렸다. 정 사장은 2000년 하반기부터 주력 계열사의 등기이사로 올라 모든 주요 의사결정에 대한 법적 권한과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에 있다. 그룹에서 만들어준 ‘후계자의 길’을 걸어갔다고 해도 회사가 불법을 저질렀으면 민형사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정 사장의 소환은 기업 총수가 절대권한을 가진 재벌구조와 후진적인 경영권 대물림 관행이 낳은 비극이다.
한편 검찰은 지난 18일 불러 조사하다 19일 긴급체포한 김동진 현대차 부회장을 이날 오후 석방했다. 검찰은 다음주 초 정몽구 현대차 회장을 소환해 조사한 뒤 관련자들에 대한 형사처벌 여부 및 수위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다.
박순빈 기자 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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