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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경찰이 파묻은 진실…동생 살해한 이춘재보다 국가가 더 밉다

등록 2023-03-30 11:30수정 2023-04-03 10:58

[잊혀진 헌법 30조, 홀로 남은 범죄 피해자]
②처벌에서 배제된 피해자

하굣길 실종된 동생, 가족시간 멈춰
이춘재 30년 지나서야 진실 털어놔
당시 수사 경찰, 동생 실종 5개월 뒤
주검 일부·속옷 등 유류품 발견하고
연쇄살인사건 압박에 다시 땅에 묻어
‘화성 연쇄살인사건’ 피해자의 유족인 김현민씨가 동생인 현정양의 생전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화성 연쇄살인사건’ 피해자의 유족인 김현민씨가 동생인 현정양의 생전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국가는 때로 연쇄살인범보다 더 지독한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김현민(45)씨에게도 그랬다. 김씨의 세살 아래 동생 현정이는 8살이던 1989년 7월7일 경기 화성시 태안읍에서 하교하다 실종됐다. 경기 광명시에 오래 살던 가족이 아버지의 일 때문에 잠시 화성으로 이사해 살던 시절이었다. 김씨 가족의 시간은 그날 이후 30년 동안 멈췄다. 광명 집이 더 익숙한 현정이 언젠가 문을 두드릴까 싶어 이사하지 않고 기다렸지만 2019년 그 바람은 물거품이 됐다. 진실을 알려준 건 다름 아닌 범인이었고, 바람을 물거품으로 만든 건 다름 아닌 경찰이었다.

2019년 ‘화성 연쇄살인사건’으로 불리며 장기 미제로 남았던 경기남부 일대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 이춘재로 확인됐다. 이춘재는 자신의 여죄를 진술하면서 현정을 살해한 사실을 털어놨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따로 있었다. 이춘재의 자백 이후 이뤄진 재수사 과정에서 당시 수사 경찰이 현정이 실종 5개월 뒤 현정이로 추정되는 주검 일부와 속옷을 비롯한 유류품을 발견하고도 이를 다시 땅에 묻어 은폐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국가가 현정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더해 살해 이후의 진실마저 왜곡하려 했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8살 현정을 부여잡고 30년을 살았던 가족은 하나씩 무너졌다. 김씨의 어머니는 한동안 이춘재가 딸을 살해했다는 사실조차 부정하다 67살이던 2020년 9월10일 세상을 떠났다. 김씨의 아버지 역시 69살이던 지난해 9월4일 숨을 거뒀다. 폐허가 된 진실 이후 가족 가운데 김씨만 덩그러니 남은 것이다. 동생의 주검은 끝내 찾지 못했다. “다시 처음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악몽을 반복하는 느낌이었어요. 부모님들은 더 견디기 힘드셨던 것 같아요. 이미 나이도 있으셨고….”

김씨의 분노는 이춘재보다 국가를 향해 있다. 김씨는 2020년 3월31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수원지방법원 민사15부(재판장 이춘근)는 지난해 11월 국가가 김씨에게 2억2천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 이 재판 판결문을 보면, 경찰의 사건 조작과 은폐 행위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당시 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화성경찰서 형사계장은 현정이 실종 5개월이 지난 1989년 12월께 인근 야산에서 줄넘기 줄로 묶여 있는 주검 일부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하지만 이 보고는 기록에 남지 않았고, 현정이 실종 사건은 1990년 8월13일 단순가출사건으로 종결됐다. 당시 수사에 관여했던 경찰은 이춘재 사건 재조사 과정에서 “김현정의 사체가 발견됐으나 (연쇄살인사건에 대한) 압박감으로 인해 그 당시 형사계장의 주도로 사체를 묻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진술했다. 심지어 경찰은 이후 “기자들의 눈을 피해 밤에 현장에 간 적이 있고, 현장 인근 나무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핏자국을 찾는) 루미놀 반응 시험을 했던 기억이 있다”는 진술까지 했다. 은폐 사실이 드러날까 우려해 ‘과학적 검증’까지 한 것이다.

‘화성 연쇄살인사건’ 피해자의 유족인 김현민씨가 지난 5일 오후 경기 광명시 집에서 피살 당시 8살이던 동생 현정양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화성 연쇄살인사건’ 피해자의 유족인 김현민씨가 지난 5일 오후 경기 광명시 집에서 피살 당시 8살이던 동생 현정양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게다가 경찰은 현정이 주검 일부를 발견한 직후인 1989년 12월25일 김씨 아버지를 참고인 조사하면서 “현정이가 행방불명된 당일 학교 준비물로 줄넘기를 가지고 갔나요” 하고 물었고, 여기에 김씨 아버지가 “준비물이 없어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줄넘기 줄은) 집에 있었습니다”라고 답변했다는 진술조서를 남겼다. 하지만 김씨 아버지는 생전에 경찰에게서 줄넘기와 관련한 질문을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김씨는 당시 경찰이 발견된 주검 일부가 현정이 아니라는 근거를 남기기 위해 아버지의 진술을 조작했다고 여긴다.

이런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춘재 사건 재수사를 맡은 경찰은 현정의 실종 사건을 담당했던 화성경찰서 형사계장 등 2명을 입건했다. 하지만 공소시효 만료로 형사 책임을 묻지 못했다. 이런 모든 과정을 지켜보다 숨진 김씨 아버지의 고통은 이춘재 사건 재수사 때인 2019년 12월18일 그가 진술조서에 남긴 말에 생생히 담겨 있다. “그 형사계장이라는 사람이 우리 딸을 어디 빼돌려서 알려주지도 않고, 말이 안 나온다. 내 심정 아무도 모른다. (중략) 어떻게 경찰이 그럴 수 있어. 지금이라도 우리 딸 어떻게 했는지 알려주고 사과한다면 내가 용서해줄 거다. 공소시효로 처벌도 못 한다고 하니 미칠 지경이다. (중략) 난 30년 넘는 세월 동안 가슴에서 (딸을) 떠나보낸 적이 없다. 애 엄마는 아무것도 못 하고 울기만 하고, 나도 신경안정제를 먹고 밤에 잠을 못 자 미칠 지경이다. 집이 초상집이다.”

경찰의 은폐와 조작이 남긴 피해자는 김씨 가족만이 아니다. 현정이 주검 일부가 발견되고 11개월이 지난 1990년 11월, 현정이의 유류품이 발견된 지역에서 30m 떨어진 곳에서 이춘재 연쇄살인 9차 사건의 피해자 주검이 발견됐다. 애초부터 현정이 사건이 제대로 수사됐다면, 이 피해자의 피해는 미리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김씨는 생각한다.

그래서 김씨는 1심 판결에 만족하지 못하고, 항소심을 진행하고 있다. 1심 일부 승소 판결에 법무부도 항소를 포기했지만, 김씨 스스로 항소를 결정한 이유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씨는 차라리 30년 전 현정이가 살해당한 사실을 진작 알고 수습했더라면, 가족들이 이렇게 오래 힘들어할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진실만 밝혀지면 저도 잊어버리고 싶어요. 이젠 미안하다는 말도 필요없어요. 그때 당시 어떻게 했는지만이라도 알고, 그 내용까지 기록해서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싶다는 마음뿐이에요.”

특히 사건을 은폐하고 정년퇴임한 뒤 숨어버린 당시 수사 경찰들이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느끼기를 바란다고 했다. “가족들은 평생 등에 보이지 않는 짐을 얹고 살아왔어요. 아무리 친한 사람들이라도 동생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았어요. 우리끼리도 얘기를 안 했으니까요. 뉴스는 물론 스릴러 영화 근처에도 안 갔죠. 계속 재판을 진행함으로써 그 사람들에게도 그런 짐이 얹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진실을 얘기해줄 마음이 들 수도 있으니까요.”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니 되레 범인인 이춘재에게는 허무하리만큼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다. 2020년 7월16일 김씨는 수감되어 있는 이춘재와 화상접견을 했다. “진짜로 그렇게 죽였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화상으로) 만났죠. 진짜 범인이 맞는지. 그런데 막상 만나니까 허무하다고 해야 할까요. ‘이런 노인이 그런 짓을 했나. 왜 그랬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계속 제게 ‘미안하다’고 말하는데, 진정성이 느껴지지도 않았지만, ‘이 사람 그냥 할아버지인데 왜 여기 앉아 있지’라는 생각, 범인을 만나러 갔는데 범인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현정이 실종 이후 ‘수사 결과대로 믿는 것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던 김씨 가족의 믿음은 경찰이 피해자의 반대편에 섰다는 사실이 드러난 그날 이후 속절없이 무너졌다. 국가는 1989년 이후 김씨 가족에게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지은 기자 quicksilv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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